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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러일전쟁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뤼순항함대의 반격(5부)

by uesgi2003 2016. 2. 6.


일본 2/3군의 뤼순항 공성전까지 정리하면 너무 늘어져서 해전위주로만 정리하겠습니다. 


(마카롭(로프)가 전사하고 뤼순항에서는 3척의 전함만 가동되어 더 이상 위협이 안되었다. 일본은 23군을 곧바로 중국에 상륙시켰고 5월 말이 되자 만주와 조선 북부에 보병사단 9, 기병여단 1, 포병여단 1, 180,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도고는 2군을 만주로 수송하는 동안 뤼순항함대가 방해되지 않도록 마지막으로 자침봉쇄를 시도하기로 했다.

시바타(2,739), 코쿠라(2,590), 나가토(1,884), 아사가오(2,464), 미카와(1,968). 토토미(1,953). 후산(2,502), 예도(1,724), 오타루(2,547), 사쿠라(2,979), 사가미(1,927), 아이코쿠(1,773) 12척을 골랐다.

4척의 어뢰정, 포함 아카기와 초카이가 근접엄호를 맡았다.

 

51일 오후, 작전이 시작되었지만 진남포를 떠날 때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먼저 후산마루가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귀항했고 폭풍에 상선이 흩어졌고 작전중단을 결정했지만 코쿠라와 나가토만 그 명령을 받아 상선기함 시바타마루와 함께 귀항했고 나머지는 그대로 뤼순항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당연히 엄호도 받지 못한 상선은 항구 입구에 가기도 전에 파괴되었고 158명의 수병 중에 75명이 죽고 16명이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도 모두 부상당했다.

마카롭() 전사 후에 함대지휘를 잠시 맡은 알렉세엡()는 전임자와 달리 전함을 움직이지도 않았고 도고는 나중에 상선봉쇄가 성공한 것으로 착각했다.




뤼순항 부근에 좌초한 일본상선입니다.

 

도고는 보급로를 엄호하기 위해 뤼순항에서 167km 떨어진 군도에 새 기지를 마련했고 여기에 수뢰를 설치해서 러시아함대의 기습을 막았다.



지명을 확인할 때마다 난감해집니다. 자료는 영어와 러시아어 발음이고 지금 지도는 중국어 발음이기 때문에 여러 자료를 찾으며 연결해야 하는데 이번처럼 대충 짐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붉은 원이 연합함대의 새로운 기지이고 왼쪽의 붉은 표시는 뤼순항입니다. 


512일부터 10보병사단이 상륙할 다롄 일대에 러시아군이 지난 2월에 설치해 두었던 수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미 겨울폭풍으로 상당부분이 사라진데다가 해저가 평평해서 비교적 손쉬운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작업개시일부터 어뢰정 48호가 수뢰와 충돌해 침몰했다. 514일 오후에는 작업을 엄호하던 경순양함 미야코Miyako가 수뢰에 23분만에 침몰했다.  



미야코는 취역 후에 별다른 전과없이 침몰했지만 다행히(?) 2명만 전사했습니다. 인양 후에 고철로 매각되었습니다.

 

도고는 상선자침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순양함과 전함을 투입해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뤼순함대의 탈출에 대비했다. 513, 순양함 치토세와 요시노, 장갑순양함 야쿠모와 카스가, 전함 후지가 뤼순항 감시를 끝내고 돌아오던 중에 어둠과 안개 때문에 카스가가 요시노를 들이받았고 요시노가 순식간에 침몰했다.

 

514일에도 뤼순항 일대에서 짙은 안개가 걷히지 않자, 수뢰함 아무르 함장 이바놉은 일본전함의 항로에 수뢰를 설치한다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일본함대가 자리를 비우자 마자 안개를 틈타 해안에서 20km 지점에 수뢰를 뿌렸다.

15, 전함 하츠세, 시키시마, 요시마, 순양함 카사기, 타카사고, 포함 타츠타가 정찰과 봉쇄임무를 시작했고 정오가 되기 전에 수뢰지역으로 진입했다.

전함 하츠세와 야시마가 수뢰와 충돌했고 기함 하츠세는 30분 후에 다시 수뢰와 충돌해 뤼순항 수비대가 보는 앞에서 대부분의 수병과 함께 침몰했다. 선체에 큰 구멍 2개가 뚫린 야시마도 견인되던 중에 침몰했다.

포함 타츠타도 귀항 중에 좌초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츠세는 중국의 전쟁배상금으로 영국에 주문한 전함으로 불과 5년 만에 침몰되었습니다. 침몰과 함께 496명이 전사했고 함장과 나머지 334명은 구조되었습니다.


 

야시마는 조향을 못하는 하츠세를 돕다가 수뢰와 충돌해 결국 침몰했습니다. 야시마도 영국에 주문해 하츠세보다 2년 먼저 취역했습니다.



영국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야시마 모형입니다.

 

516/17일 밤에는 포함 아카기와 오시마가 충돌해 오시마가 침몰했다. 연합함대의 비극의 마지막 주인공은 517일 수뢰와 충돌해 침몰한 구축함 아카츠키가 맡았다.

512~175일간, 연합함대는 러시아함대와 상관없이 전함 2, 포함 2, 구축함 1, 어뢰정 1척을 잃었고 장갑순양함 1척과 포함 1척이 중파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압록강을 건넌 육군 1군은 뤼순항의 보급로를 끊었고 2군이 뤼순항 공격을 맡았다. 519, 오쿠장군은 1, 3, 4보병사단, 포병여단과 1기병여단을 집결시켰다.

러시아군은 포크장군의 4동시베리아보병사단 17,800명 중 3,800명만 진저우 방어선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기차역 부근에 예비병력으로 남아 있었다.

524, 도고는 지원함대를 파견했지만 수뢰 때문에 다롄만에는 접근하지 않았고 반대로 러시아군은 포함 보브르와 구축함 보이키이Boykiy와 부르니이Burnyy를 접근시켜 아군을 응원했다.

일본군은 별 어려움없이 진저우를 함락시켰지만 난샨고지 공격에는 애를 먹었다. 일본전함의 지원포격으로 러시아군이 물러났고 일본군은 4,500명의 손실(러시아군은 1,400)1차 목표인 진저우 협로를 확보했다.

 

아군의 긴급한 요청을 받은 뤼순함대는 10척의 구축함을 진저우만에 보내 일본함선을 어뢰공격하기로 했다. 작전을 마친 일본함대는 기지로 귀환 중이었고 한밤 중에 두 함대가 서로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한 척의 구축함을 좌초로 잃은 러시아함대는 그대로 귀환했고 다롄만의 3척도 뤼순항으로 귀환했다.

진저우를 내준 4동시베리아사단은 7사단과 함께 뤼순항 16~20km 고지에 새 방어선을 폈고 일본군은 6월말에 노기Nogi장군의 360,000명이 집결해 뤼순항 공성준비를 마쳤다.


 

3군 지휘관 노기 마레스케입니다. 203고지를 정면공격해서 두 아들을 포함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귀국 후에 자살하려다가 일왕의 만류로 사임만 했습니다. 일왕이 죽자 결국 아내와 함께 자살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이 준 귀중한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뤼순항 부근의 요새를 강화시키는 정도에 그치고 주도권을 내준 채로 일본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뤼순항함대를 활용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뤼순항함대도 일본함대를 두려워했다.

5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 뤼순항함대의 주력은 항구를 벗어나지 않았고 소규모 작전만 벌였다.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깔아둔 수뢰를 제거하고 구축함으로 정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양측이 사소한 신경전만 벌이고 끝났다.

 

616, 그 동안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수뢰함 아무르가 좌초되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수뢰전에서 일본해군에 크게 뒤처졌다. 보가티르Bogatyr를 수뢰함으로 개조했지만 겨우 3~40개의 수뢰만 실었고 속도도 너무 느려서 별 도움이 안되었다.  

 

뤼순항이 고립되어 시시각각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도 랴오둥 지역 사령관 쿠로파트킨Kuropatkin은 반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일본군이 뤼순항에 집중하는 동안 병력을 모은다는 계획이었다.

뤼순항함대가 걱정된 알렉세엡은 뤼순항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되었고 65일에 차르의 명령이 도착해서야 1시베리아군단(2개 사단 35,000, 98)만 보냈다. 오쿠의 2(3개 사단, 1개 기병여단, 50,000명과 216)을 만나자 다급하게 수비태세로 전환했다.

측면을 돌파 당한 1군단은 3,600(일본군 피해 1,200)을 잃고 물러났고 뤼순항 구원은 실패했다. 그렇지만 원래 뤼순항 공성전에 참여하기로 했던 2군이 러시아군의 반격에 대비해 만주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도의 윗부분은 뤼순항전투에서 소개할 예정이고 지금은 아래 랴오둥반도 전선만 눈여겨 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