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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1부)

by uesgi2003 2016. 2. 14.


의외로 사나다 마루 검색 후에 제 서재를 방문하시는 분이 많군요. 네이버 블로그에도 옮길겸 오래 전에 정리했었던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전투 오사카성 공방전을 다시 옮겨옵니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의 최후가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를 즐길 분은 피하시기 바랍니다. 역사에 스포가 있을 수 없는데, 스포라고 우기는 분들도 있어서 당부합니다.


일본 사극, 사나다 마루는 지금까지 완성도가 높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머리가 어설프게 분장한 티가 난 것을 제외하면요.


(이전 내용을 좀 다듬었습니다.)


이제 오사카 성으로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가 모두 정리됩니다. 두 번째 전투인 세키가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정리해두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 어지러워져 전국의 영웅들이 군웅할거하던 전국시대는 오카사 동계, 하계 공방전을 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시대를 열면서 평화를 이어갑니다.

 

일본 전국시대 3대 영웅을 이렇게 표현하죠.

 

오다 노부나가 - 울지않는 새는 죽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지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지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논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벼를 베어 탈곡을 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쌀로 낼름 떡을 해 먹었다... 라고요.

 

일본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쩌다가 운이 좋아 얼떨결에 지니의 요술램프를 집은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이에야스는 젊었을 때에는 패배를 모르는 대단한 무장이었다가 많은 위기를 넘기며 기구한 삶을 살다보니 나중에는 너구리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의 지략가(효웅)가 되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급사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본능사)에 친위부대없이 지내다가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부터는 관대해졌다는 점에서 보면 누구보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 기회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모두 주어졌던 것이고 이에야스가 출중한 실력과 의지로 자신의 기회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다이묘와 달랐습니다.


 

젊은 때의 용장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음흉한 너구리 영감의 초상화입니다. 말년에는 너무 비만해서 갑옷도 제대로 못 입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호들갑이 심한 금수저 정도로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죠.

 

오사카 공방전을 설명하기 전에 간단하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을 볼까요? 아래 나이는 우리나라 나이 기준입니다.

 

- 2살 때에 주변 강국의 힘겨루기로 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와 생이별

- 7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가던 중 오다 가문으로 납치되어 엉뚱한 곳에서 인질생활

- 8살 때에 아버지가 가신의 배반으로 사망하고 마쓰다이라(도쿠가와의 당시 이름) 가문이 와해되어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됨

- 9살 때부터 19살 때까지 이미가와 가문에서 인질생활. 마쓰다이라 가문과 가신은 이마가와 가문의 선봉대가 되어 오다 가문과 대립

- 16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의 여성과 정략결혼

- 17살 때에 이마가와 가문의 무장으로 첫 출전. 오다 가문에 큰 타격을 입히고 승전

-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전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죽은 다음에도 이마가와 가문의 눈치를 보며 오다 가문과 계속 대립

- 20살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초대를 받고 기요스 돔맹을 결성.


가족 사이에서도 반란과 배반이 일상적이었던 전국시대에 보기 드물게 서로를 존중한 동맹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이에야스가 최선을 다한 동맹이었고 노부나가도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준 것 뿐이었습니다. 노부나가에게 동맹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건이 곧 터집니다.

 

- 분노해 자신의 중신을 죽인 이미가와 가문을 상대로 승전

- 자신의 아들 노부야스와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의 결혼

- 2년 동안 농민과 가신의 반란(일향종 신도)으로 내전

- 이미가와 가문을 멸망시키고 영지를 두 배로 늘림

- 30살 때에 다케다 가문을 상대로 패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겐신에게 맞섰다가 죽음 직전에 도망쳐오는 패배를 당하는데, 얼마나 공포에 질렸던지 말 위에서 똥을 지렸을 정도입니다. 드라마에서도 이 일화가 잠시 나오죠. 그 치욕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 날의 패전을 교훈삼아 돌다리도 두들겨보는 신중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 37살 때에 장남 노부야스가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자살


장남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신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무장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반란에 연관이 있다던가 어머니의 조종으로 아내와 극심한 불화였다는 다양한 설이 있었지만, 이유가 무엇이던 동맹국 그것도 자신의 사위에게 할복자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의 가신은 동맹을 깨고 노부나가에게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장남을 처형하고 동맹을 계속 이어갑니다. 

 

- 40살 때에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의 배신으로 사망하고, 이에야스는 죽음 직전에서 가까스로 탈출



드라마에서 이에야스의 생환이 무척 코믹하게 재현되었죠. 말년은 어떻게 그릴 것인지 무척 기대됩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서 노부나가의 아들을 지원하며 나가쿠테 전투에서 승전

- 전쟁보다 화의를 선택한 히데요시가 늙은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보내 정략결혼시키고 이에야스는 복종.


아사히히메는 그 당시 남편이 있는 연상이었는데 강제로 이혼시키고 이에야스에게 결혼을 강요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이에야스입니다. 이 때에 이에야스가 기습공격을 받아 죽었고 가게무샤(암살 등을 피하기 위한 가짜 인물)가 역할을 했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냥 이야기일 뿐입니다.

 

- 전국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호조 가문의 영지를 강요.


자신의 가문이 있던 미카와를 비롯해 가신이 피흘려가며 개발한 영지를 모두 빼앗기고 당시 시골이었던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기라는 것은 사실 전쟁을 일으키라는 히데요시의 암시였습니다. 호조 가문의 영지는 이제 막 무력으로 병합한 지역으로 매우 적대적이었고 미카와 가신의 터전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싸워서 죽거나 말라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는데, 맞서다 멸망한 호조 가문를 지켜본 이에야스는 오히려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이동을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터진 임진왜란에서, 이에야스는 새 영지 개발을 이유로 참전하지 않았고 귀중한 전력을 전혀 낭비하지 않아서 히데요시의 사후에 큰 도움이 됩니다.

 

세카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굴욕과 위기를 넘겼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력있는 무장이 이 정도로 인내하고 노력해 일본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지 누구처럼 태어나니 수 백억 주식에, 20대에 부장으로 출발해 30대에 회장이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역경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본론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이제부터 그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떡만들어 먹는' 오사카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1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제 오사카 성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시의 아들)에게 방향을 바꿔 본격적인 압력을 행사한다. 그는 도요토미 가문에 남겨진 총 200만 석의 영지를 마음대로 나누어 전공을 세운 다이묘들에게 나누어주고 히데요리에게는 겨우 65 7천석의 영지만을 남겨주었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라는 일본 최대의 거성과 함께 상업도시 사카이와 오사카를 계속 수중에 두었고 히데요시가 남긴 엄청난 양의 구리와 금괴를 숨겨 두고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생력을 유지한 상태였다.

 

(우에스기 왈: 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하지 않고 성 안에 틀어박혀서 일본 천하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주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당시 기록이 불분명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 나름대로 조합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이에야스가 교활하게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할 때까지도 '히데요시 공을 위하여'라는 명목을 내세웠고 여기에 넘어간 히데요시의 많은 가신들이 동군에 합류합니다. 다른 의견도 있지만, 히데요시의 부인인 네네(출가 후에는 고다이인)조차도 자신을 따르는 많은 무장들에게 이에야스 편을 들라는 권유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히데요리 측근에는 미래를 내다볼 뛰어난 책략가가 없었습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있었더라면 이에야스를 제지하고 히데요리 편으로 유리하게 전개해나가겠지만 도시이에는 이미 사망했고, 그 다음에 조언자로 임명된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이에야스를 지지하면서 히데요리가 어느 편도 들지 않게 합니다.


이제 창끝을 자신에게 돌릴 이에야스에게 세키가하라전투 승전축하를 했을 정도로 히데요리 진영은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적을 나누어 하나씩 처리하는 이에야스의 무서운 전략이 적중한 것입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책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정략결혼으로 두 가문을 융합시키려고 했다. 먼저 아들 히데타다를 히데요리의 이모와 결혼시키고 1603 10살이던 히데요리와 히데타다의 딸을 결혼시켰다. 전국시대가 얼마나 혼란했던 시대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으로, 오사카 성 전투는 손자 사위이자 손자 조카와 할아버지의 전쟁이 된 셈이다.

  

그러나 결혼으로도 두 가문은 융합되지 못했다. 이에야스가 쇼군(장군)에서 물러나 히데타다에게 넘겨주는 축하연에 히데요리는 참석하지 못했다. 어머니 요도기미가 이에야스를 의심하고 오사카 성을 나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풍운의 주연 중 한 명인 요도기미입니다. 전국시대에는 의외로 여성의 역할이 상당히 컸고 심지어 일본 최고의 무장 우에스기 겐신은 실제로 여성이었다는 낭설(?)도 존재합니다.

 

(우에스기 왈: 요도기미에 대해서는 워낙 흥미로운 인물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중간에 끊더라도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요도기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로,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는 당대 일본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혔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미천한 직위에 있던 히데요시가 짝사랑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첫 남편인 아사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죽음을 선택할 때에 함께 죽으려 했지만 히데요시가 계략을 꾸며 살려냈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노부나가의 최고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와 재혼한 오이치는 남편이, 노부나가 사망 후의 천하를 두고 히데요시에게 패하면서 죽음에 몰리자 함께 자살을 선택해 히데요시를 좌절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딸 세 명은 살아남았고 히데요시는 오이치를 가장 닮은 차차(요도기미)를 측실로 선택합니다. 차차는 노부나가의 성격을 닮아, 히데요시가 부모를 죽이고 천하를 빼앗은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확실한 권력을 선택하고, 히데요시가 그렇게 원하던 아들까지 낳아 막강한 권력을 누립니다.


실제로 오사카 성 공방전은 아들 히데요리의 의지는 거의 없고, 몇 명의 지략가와 요도기미의 욕망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도기미가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일본 역사를 또 다시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와 요도기미 그리고 숨겨놓은 막대한 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자, 도요토미 가문에는 패전 후에 갈 곳이 없어진 무사와 낭인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되었고, 두 가문 사이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히데요리를 어머니 품에서 자란 유약한 애숭이로 포장해 전쟁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1611년에 니조 성을 드디어 방문한 히데요리는 가쓰모토의 뜻과는 반대로 재능과 의지를 발산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제거해 자신이 떠난 후 가문을 위협할 여지를 아예 없애기로 한다.

 

(우에스기 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워낙 험한 인생을 살아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아들 히데타다가 워낙 인물감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처형한 장남 노부야스는 가신들이 모두 기대할 정도의 대단한 잠재력을 보여줬던 반면에 히데타다는 비교가 안되는 재능을 보였고 거의 처형직전까지 몰린 인물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북쪽의 서군(우에스기 가문)을 압박하다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세키가하라로 달려와 전장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미리 내렸지만, 앞 뒤 못가리는 히데타다는 중간에 지나는 아무런 의미없는 우에다 성을 함락시키려고 집착하다가 이에야스가 전투를 끝낸 후에나 도착하게 됩니다. 한 주먹도 안되는 우에다 성은 함락시키지도 못했습니다.


히데타다가 거느린 전력이 히든카드였기 때문에, 그가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하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전멸할 수 밖에 없었지만 서군의 지리멸렬한 지휘체계덕분에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둔 이에야스는 불같이 화를 내며 히데타다에게서 병권을 빼앗았고 오사카 성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도 쇼군인 아들은 자리에만 앉히고 실질적인 지휘를 했습니다.

우에다 성에서 히데타다의 대군의 발목을 잡은 사람이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인데, 오사카 성의 지휘관이 되어 겨울과 여름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도쿠가와 군을 괴롭히고 이에야스를 말년에 죽음직전까지 몰아넣습니다.)

  

이미 너구리영감이라는 명성아닌 명성을 가진 이에야스이니만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물밑에서 하나씩 전쟁준비를 했지만, 오사카 성 안의 도요토미 가문은 오래 전부터 '이에야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라는 소리만 외쳤을 뿐 큰 그림을 그릴 전략가가 없었다, 모여든 무장들은 직접 창칼을 들고 일개 부대를 지휘할만한 인물들이었고 아버지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다하던 다이묘들은 이에야스 진영에 가담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히데요리 주변에 있던 인물들도 요도기미나 가쓰모토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17세기 초반의 일본 신문으로 오사카 성 전투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까지도 문화는 우리보다 훨씬 뒤쳐진 상태였지만, 엄격한 신분제도와 관습에 얽매였던 조선과 달리 상대적으로 신분이동이 자유로운 편이었고 상인과 같은 중간 계층의 힘이 컸습니다.

 

1614년 경이면 일본에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진출해서 서양식 대포와 소총이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쟁준비를 하려면 대포와 화약을 대량으로 구입해야 할텐데, 오사카 성은 동인도 회사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 내가 가지고 있던 화약은 모두 히라도(중간 물류지)로 돌려보냈다... 여기(오사카)에서는 아무도 안사기 때문에 보내는 수 밖에 없다... 황제(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라도에서 피컬(pecul, 중국식 단위 약 60kg) 6타이(일본 단위)에 샀으니까 네덜란드인이 가진 것까지 합쳐서 황제에게 모두 팔 수 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가 주고 받은 다른 편지를 보면 오사카 성이 얼마나 허둥지둥 전쟁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편지에 썼듯이 여기(오사카)에서 화약을 급하게 원하고 있다. 지난 번에 되돌려보낸 화약이 모두 팔리지 않았거나 상태가 좋으면 특급으로 사카이(히데요리 소유의 무역항)로 보내기 바란다... 화약 가격이 이제는 피컬 당 26 타이로 치솟았지만 아마도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다. ...

 

첫 번째 편지가 1614 6, 두 번째 편지가 10월이었기 때문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엄청난 규모의 전투를 4개월 만에 급하게 준비하고 있는 오사카 성의 상황도 한심스럽지만 그만큼 이에야스의 계략이 철저하고도 신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그 해 5, 6월에는 긴장정도로만 여기던 히데요리와 요도기미는 한가롭게도 엄청난 자금을 들여 히데요시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사찰, 부처와 종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전쟁의 뇌관이 되고 만다. 종에는 축복과 기원을 구하는 문구를 써넣기 마련이고 많은 문구 중에 '영지가 평안하고 번영하기를...', '동에서는 밝은 달이 뜨고, 서에서는 새가 지는 해에게 작별을 고하고'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첫 번째 문구에는 이에야스(家康)의 한자가 한자씩 들어가있고 두 번째 문구는 동쪽의 이에야스를 달에 비유해 서쪽의 해인 히데요리를 빗대어 모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너무 사소한 시비이고 그렇게 문제된다면 종을 부수고 다시 만들면 되지만, 일본 전국을 쥐고 흔드는 쇼군이 모욕을 당했다고 하는데 감히 반론을 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도쿠가와 가문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걸 명목만 마련하면 되었는데, 훌륭한 구실이 되었고 오사카 성에서는 이에야스가 진심을 보여주고 나서야 전국의 낭인들을 불러들이며 전쟁준비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에야스에게 가문과 영지를 빼앗긴 이름있는 무장들을 찾아다니며 지휘를 부탁하게 되고 사나다 노부시게가 합류하게 되면서 오사카 공방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내전으로 기록된다.


 

오사카 성 안에 전시된 공방전 미니어처로, 사나다 노부시게가 지휘하는 모습입니다.

 

(우에스기 왈: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역사인물은 단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는데, 작년에 있었던 모 잡지의 조사에서는 신세대답게 사나다 노부시게, 다테 마사무네, 나오네 가네쓰구가 첫 세 손가락 안에 꼽혔습니다. 아마도 식상한 기존 인물보다 시대를 거스른 반항아기질이 요즘 더 인기있고 TV 드라마나 만화의 영향도 크지 않을까 합니다.


전국시대 당시에 인물이 많이 나오기로는 시골 구석에 처박힌 사나다 가문만한 곳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노부시게는 유키무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참전해서 우에다 성에서 히데타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앞에서 설명했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서군이 완패한 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사나다 가문이 현명하게도 동군에도 가담해 공을 세웠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고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됩니다.

 

오사카 성의 요청을 받은 노부시게는 휘하부대를 붉은 색 갑옷으로 입히고 도쿠가와 군에게 타격을 입혀 겨울 전투 후에 이에야스에게서 영입제의를 직접 받지만 거절하고 다시 여름 전투에서 대활약을 펼칩니다. 결국 마지막 돌격에서 치명상을 입고 전사해서 전국시대의 전설로 남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배경설명때문에 많이 길어져서 본격적인 오사카성 공방전은 다음 이야기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여행을 많이 다닌 분은 잘 아시겠지만, 일본이 우리보다 서구화가 일찍 되었고 개인주의도 상당히 심하지만 보수주의 색채가 아주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교회 십자가가 밤 하늘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신 분 있나요? 사당과 절이 시내에도 많지만 교회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왠만한 대중(고급이 아닌) 음식점에서도 물대신에 차가 나옵니다. 시장에 가면 차 잎을 흔하게 볼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상품도 출시되는데, 유키무라의 아이폰 케이스입니다. 한정판으로 옻칠을 한 명인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가격이 무려 150만원 정도 합니다.


 

몇 개나 팔았을지 궁금합니다.

 

저도 일본 여행에서 제가 좋아하는 우에스기 겐신 열쇠고리를 사려고 고생 고생 찾아갔더니만... 오사카에서는 안팔고 다른 지점에서 판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자랑스러운 역사 인물에 대해 연구도 부족하고 현대에 재현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캐릭터화해서 일상생활에 남기는 일본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일본의 한 디자이너 회사가 공개한 월 페이퍼입니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사기급 능력치를 자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잡으면 바로 죽여버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왜소하고 못생긴 외모 때문에 노부나가에게 원숭이로 불렸던 특징을 잘 잡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천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태양의 자식'이라는 뜻의 햇살무늬 투구를 즐겼습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아서 여자를 밝혔음에도 자식은 말년에 겨우 한 명만 남겼고 그마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전쟁을 즐긴 댓가를 치뤘습니다.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에스기 겐신입니다. 일반적인 전국시대 무장과 달리, 명예를 너무 고집해서 흔한 스캔들 하나 없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본 최고의 무장으로 단 한 번의 패배(무승부는 많았습니다)도 몰랐던 그였지만 의외로 영지를 확장하지 못했고 출가승 신분으로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남기지 않아서 영지는 내란으로 반토막나고 맙니다.

 

다케다 신겐과의 7차례에 걸친 가와나까지마 전투가 유명하며, 이 전투에서 양쪽 모두 85%의 전력손실을 입는 전설적인 대결을 펼칩니다. 이후 다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겐신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모략으로 그의 진출을 방해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쵸소카베 모토치카입니다.

서남부 섬 지역인 토사를 장악한 실력자였지만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영토 대부분을 잃고 주종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입니다. 이건 초기의 일본 전통갑옷 차림이고


 

서양문물을 즐겼던 노부나가 답게 서양식 갑옥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갑옷입니다.


 

급사하지 않았다면 일본을 통일했을 다케다 신겐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의 몰락부터 시작되죠.

제 블로그에 워낙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으니까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입니다.

일본 무장들 중에는 붉은 색 갑옷을 좋아한 사람이 많은데, 노부시게역시 부대를 모두 붉은 색으로 무장시켰습니다.

 

코에이 게임때문에 노부시게가 꽃미남으로 나오는데 오사카 성 공방전 당시에는 이미 나이든 중년 늙은이였습니다.

 

가문이 좀 더 영향력있고 진출이 쉬웠던 중부지역이었다면 노부나가 이상 갔을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