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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2부)

by uesgi2003 2016. 2. 14.


일본 드라마 사나다 마루를 추천한 김에 오래 전에 정리한 이야기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역사에도 스포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스킵하시기 바랍니다. 



몇 달에 걸쳐서 장대한 드라마의 인물에 몰입했던 적이 있죠? 몇 년에 걸쳐서 시리즈로 상영되는 영화를 기다린 적도 있을 것이고요. 또는 수십 권의 장편 소설을 밤잠을 잊고 읽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환하게 불켜진 상영관을 나설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정말로 그 상황에,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이 되었다면 '너무 재미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줘야지'라는 생각보다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낄 것입니다. 아마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해주었던 그 무언가를 떠나 보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오사카 동계/하계 공방전은 제가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었던 전사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끝으로 거의 150년 이상 수 많은 일본의 영웅들이 군웅할거하던 장대한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죠.

너무 강해서 자만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한 번의 기습에 목숨을 잃고, 24무장과 함께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다케다 신겐은 영지를 벗어나면서 급사하고,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경영과 시스템 개념을 도입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을 코 앞에 두고 불타 죽고, 중국까지 원정 가겠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거숭이 아들을 늑대들(야심 찬 세력가)에게 맡기더니 결국 언제나 유력한 2인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면서 통일막부시대를 다시 열게 되는데, 삼국지의 '수지지어  사마소'만큼은 아니지만 '수지지어 덕천가강'여서 허전함이 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제가 정리하고 싶은 일본 전사는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전설적인 가와나카지마 7차전이 남았으니까 아쉬움은 뒤로 하고 오사카성 동계/하계 공방전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Osprey Osaka 1615 편을 바탕으로 제 이야기를 많이 추가했으며 여러분을 위해 그림의 주요 부분도 번역해두었습니다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2부) 

 

동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세에 눌린 전국의 다이묘와 무장이 거의 참가했으니까 그냥 이에야스 한 사람만 주목하면 되고, 오사카 군에서는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가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의 큰 그림이 옳았고 이에야스를 죽음직전까지 몰아넣은 불운의 무장이어서 당연한 것이지만, 사실은 오카사 3인방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고토 모토쓰()구와 기무라 시게나리의 역할이나 활약이 대단했다. 노부시게가 팀의 20승 주력투수였다면, 모토쓰구와 시게나리는 전천후 마무리투수라고 할 정도로 오사카 군이 위기에 몰리는 곳이면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고토 모토쓰구는 (당시 일본 무장이 거의 그랬듯이) 임진왜란에 참전해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에서 평양성을 함락시켜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무장입니다. 그는 구로다 가문의 대표적인 무장으로는 실력이 대단했지만 왠지 구로다 나가사마와 사이가 안 좋아서 임진왜란 당시에 위기에 몰린 (주군) 나가마사를 돕지 않고 옆에서 구경만 했고 결국 구로다 가문과 인연을 끊게 됩니다.

오사카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며 살아가던 중에 오사카 성 전투가 벌어져 참전하게 됩니다.



기무라 시게나리는 겨우 23살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공은 없었고, 아버지 기무라 시게코레가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자결했는데도 히데요시 가문에 충성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오사카 성 전투에 참전하게 됩니다. 상당한 미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밖에도 오노 하루나가와 아들 하루후사, 조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가쓰나가 등의 무장이 참전했습니다.

 

(우에스기 왈: 오사카 성 동계/하계 공방전은 30만 명 이상이 동원된 일본 역사상 최대의 내전이어서, 부대 단위로 본다면 엄청난 백병전이 벌어졌지만 큰 그림에서의 전략이나 전투진행이 워낙 단순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자세한 전투전개는 그림 설명으로 넘기고 굵직한 것들만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데요리의 전선을 오사카 성 일대로 묶어놓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골적인 군사행동에 나서면서 동계 전투가 벌어진다. 당시 쇼군이었던 아들 히데타다에게 에도 부대를 맡기고 자신은 슴푸 부대를 이끌고 교토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동군에 합류하기로 한 다이묘들은 오사카로 직접 진격하거나 명령에 따라 포위망에 힘을 보태기로 되어 있었다.

 

동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히로가와 14,500

- 텐노지 46,100

남서 - 기즈가와 10,000

- 이쿠타마 수로 45,700

북서 - 노다-후쿠시마 2,000

- 요도가와 17,100

북동 - 교토 길목 2,000

오카야마 (도쿠가와 히데타다) 20,000

차우스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30,000

기타 7,000

194,400

 

이 밖에도 시마즈 이에히사의 30,000명이 있었지만 워낙 멀리서 출발했기 때문에 동계전투에는 합류하지 못했다.

 

오사카 군은 다음과 같이 배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마루(본채) - 3,080

니노마루() - 5,000

니노마루() - 22,300

니노마루() - 12,800

니노마루() - 11,000

네코마가와 - 5,000

남쪽 보강수비 - 15,000

이쿠타마 수로 - 8,600

텐마가와 강둑 - 7,900

사나다 마루 - 5,000

이마후쿠 - 2,600

기즈가와 - 1,500

노다-후쿠시마 - 13,300

113,080

 

니노마루의 병력에 23,000명 정도가 중복된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낭인이 전국에서 몰려들었기 때문에 총 병력은 비슷했을 것이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고토 모토쓰구는 대담한 전략을 주장했다. 오카사 성은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동군이 다가올 길목을 미리 차단하고 대회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먼저 약간의 병력으로 나라 도로를 장악한 다음에 이바라키 장악에 성공하면 본대가 나서 후쿠시마와 교토를 아예 점령하는 것이었다. 동군이 집결할 니조 성을 함락시킨 후에 천황을 조종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반란의 괴수로 공표해 동군의 다이묘들이 합류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동계전투 당시의 오사카 군은 지휘권이 분명하지 않아서 통일된 전략이나 전술이 부족했고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대군이 집결했지만 훈련이나 규율이 부족한 낭인들 또는 잡병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전투력에서는 동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지휘관의 판단이 옳았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에서 방어전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오사카 동계전투 당시의 양 진영의 움직임입니다. 오사카군의 작전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중요 부분은 한글로 번역해두었습니다.

 

(우에스기 왈: 노부시게와 모토쓰구의 전략이 옳았지만 그것은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들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히데요리을 비롯한 일부 무장이 주장한 오사카성 방어전도 해볼만한 전략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저만의 생각입니다.

 

1. 작전실패 시의 후폭풍 - 오사카성에 집결한 지휘관과 부대는 이에야스에게 불만을 품은 무장과 낭인이 상당수였습니다.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성장한 무장은 거의 없었으니까, 요격에 나섰다가 실패할 경우 반란이나 이탈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다시 결과론이지만, 의외로 오사카 군의 지휘관 대부분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히데요리 편에서 최후를 맞습니다.

 

2.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 지금 남아있는 성을 둘러보는데도 다리가 아파서 못 돌아다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림과 같이 당시에는 그 규모가 훨씬 컸고 방어시설도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남겨 둔 엄청난 황금 덕분에 몇 년 동안의 포위를 버틸 수 있는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공격하는 동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시간을 끌게 되면 동군은 포위망을 풀 수 밖에 없고 오사카 일대는 그대로 도요토미 가문이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론이지만 이에야스가 불과 18개월 후에 죽었으니까 수비작전이 더 효과가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방안에서 꾸민 작전은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어그러지는 법입니다.)



오사카 성만 세 번 이상 방문했던 기억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제 안사람, 큰 딸과 조카이고요.

아래 사진은 오사카성이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장소로 사진을 찾지 못해서 다른 사이트의 사진을 옮겨왔습니다.

돌 하나의 크기입니다. 왠만한 포격에는 상처도 안나겠죠? 

 

전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을 증축하면서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사진과 같은 엄청난 돌을 가져오게 합니다. 오사카 성 증축에 다이묘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총투입되면서 반란은 꿈도 못꾸게 되었고 그 덕분에 오사카 성은 엄청난 거성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10 10일까지 이에야스는 50명의 다이묘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냈고 히메지 성주 이케다 도시타카가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 성에서 가장 가까운 아마가사키 성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 자신은 11 12일이 되어서야 본대를 이끌고 슴푸를 나섰다. 11 14, 가타기리 가쓰모토가 전략항구도시인 사카이로 진격했지만 이미 히데요리의 낭인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오사카 동계전투의 서전을 장식했다.

 

1614 12 17, 동인도 회사에서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의 수비를 크게 보강했고 지난 3년 동안 자신에게 몰려든 일자리를 잃었던 무사, 은둔했던 무장, 불만이 많은 낭인들 8만에서 10만 명 정도를 지원해왔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선황제(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이 30만 명 정도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왔다... (중략) 선봉대가 이미 몇 차례의 공방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오사카 시내는 불타버렸고 성만 남았다.

12 10,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도쿠가와 군이 교토에 안전하게 입성했고 이에야스는 니조성에, 히데타다는 후시미에 진영을 차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이묘가 병력을 이끌고 오사카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사카 성의 수비선이 확장된 모습입니다. Osprey 도서는 마루와 구루와를 서로 다른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구루와로 부르다가 나중에 마루로 부른, 같은 의미입니다.

구루와 또는 마루는 방어진지, 건물을 세운 택지 및 병사의 주둔시설로 쉽게 말해 수비의 한 구획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혼마루는 다이묘가 있는 본채, 니노마루는 두 번째 수비구획, 산노마루는 세 번째 수비구획...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자료를 인용하다 보면 일본어를 잘 모르는 외국저자가 혼동해서 쓴 단어가 많은데, 예를 들어 차우스야마는 차우스산인데 차우스야마 마운틴이라고 한다던가, 미시가와는 미시강/천인데 미시가와강이라고 중복표기를 많이 합니다. 이걸 미시가와로 해야 할 지 아니면 미시강으로 해야 할 지 저도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강/산을 따로 붙이는 중복표기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12 26, 우에스기 가게가쓰가 오사카 외곽의 북동쪽 요새를 점령하자, 오노 하루나가가 맹렬한 반격을 퍼부었고 우에스기 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급히 동군의 호리오 다다하루, 니와 나가시게, 사카키바라 야스카쓰가 지원해서 위기를 모면했고 이에야스가 후방으로 돌려 부대를 정비할 것을 권했는데, 동군 중 최고의 베테랑이었던 우에스기 가게가쓰는 매우 화를 내며 우에스기 가문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 동안 사타케 요시노부가 이마후쿠의 요새 세 곳을 점령했고, 오사카 군의 기무라 시게나리와 고토 모토쓰구가 반격에 나섰지만 동군을 밀어내지 못했고 결국 26일에 오사카의 북동쪽을 모두 동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12 29, 오사카성의 북쪽 수비선을 모두 무너뜨려는 두 차례의 작전이 있었다. 먼저 바쿠로구치 전투에서는 이치카와 다다후사가 기즈가와를 건너 오사카군의 스스키다 가네스케를 공격했다. 그리고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남쪽에서 바쿠로쿠치 공격을 지원했는데, 지휘관인 스스키다 가네스케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던 바람에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노다-후쿠시마 전투에서는 구키 요시타카가 노다 요새를 장악했다.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참패를 당했던 구키 요시타카의 아들인 그는 해적출신 가문답게 오사카 전투에서도 해군을 이끌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도 거북선을 흉내 낸 맹선(盲船, 갑판까지 뒤덮인)이 등장했고 해군도 서양에서 들여온 카트리지 교환식 대포(조선시대의 불랑기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아마도 이 전투가 일본 최초의 해군 지원포격과 상륙작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는 블랑기 포-프랑크의 한자 발음, 입니다. 카트리지 교환식으로 연사속도가 상당히 좋지만 폭발압력이 일부 새기 때문에 밀폐형 대포에 비해 큰 탄환을 사용하지 못했고 사거리로 상당히 짧은 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을 통해 이미 이런 신식 대포가 들어왔지만 당시 우리가 보유한 각종 대포의 성능이 훨씬 우수했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에서 호되기 당한 후에 본격적으로 대포를 도입하기 시작했고, 양 진영 모두 재래식 포와 블랑기 포를 대거 동원했습니다. 특히 동군은 이에야스가 서양식 최신식 대포를 들여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오사카군은 북부의 외곽수비선을 모두 내주었지만 몇 차례의 반격 외에는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방어전술을 채택한 히데요리는 외곽수비선이 버텨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당분간 동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기로 했고 일선 지휘관들이 개별적인 판단으로 대응하는 수준이었다.

 

바로 이 무렵에 동계전투의 숨은 폭탄 요도기미가 첫 번째 판단착오를 일으키게 된다. 히데요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던 요도기미는 수비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시녀들과 함께 무장을 하고 일선을 시찰하는데, 그녀의 바램과 완전히 다른 악영향을 미치고 만다.



이전의 일본 드라마에 등장한 요도기미의 전선시찰 장면입니다. 안타깝게도 기질에 비해 재능이 많이 모자란 인물로 고장난 시한폭탄의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낭인들의 눈에는 여성이 지휘관으로 나섰다는 것은 지휘관이 이미 죽었거나 실력있는 무장이 없는 것으로 보여 사기가 크게 떨어졌는데, 오다 요리나가(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이지만 무장으로는 볼품없었던 차의 명인)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무녀들을 이끌고 시찰에 나서 졸고 있는 병사들을 막대기로 때리게 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져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정작 지휘의 정점에 있어야 할 히데요리는 본채에 숨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심지어 지휘관들과 아예 만나지고 않고 있었다. 무장들이 히데요리에게 전선을 시찰해서 사기를 올려줄 것을 간청해서야 겨우 발길을 옮겼지만, '여러분의 수고를 치하한다'는 말도 더듬으며 주눅든 모습을 보이자 오사카 군의 지휘관들은 아예 기대를 접고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싸우기로 했다.

 

(우에스기 왈: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 인물이 3대를 가면 천하를 얻는다고 하듯이 좀처럼 인물이 3대를 가기 힘든 모양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도 아버지 노부히데에 이어 아들까지만 인물이 태어나고 그 다음 대부터는 완전히 평범해지더니 히데요시도 아들인 히데요리부터는 그냥 평범한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다를 것 없는 것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첫 아들 노부야스를 잃고나니 쇼군으로 앉힌 히데타다도 평범한 아들이었고 심지어 도쿠가와 가문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황당한 아들까지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