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 사나다 마루를 추천한 김에 오래 전에 정리했던 이야기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드라마에서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주연이고 아들 사나다 마루는 조연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점차 비중을 높이고 있는 인물이 있죠?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사나다 마루의 최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일전이니 비중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죠. 역사에도 스포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스킵하시기 바랍니다.
잘 안보이는 중간 전황도는 클릭하면 몇 배로 커집니다. 한 번 잘 살펴보세요.
이제 오사카 겨울/여름 전투의 마지막 이야기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나다 마루의 최후 - 오사카 겨울/여름 공방전(3부)
오사카 성의 북부 수비선을 완전히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본진을 좀 더 성으로 옮겼다. 이에야스는 차우스야마(산)에, 히데타다는 오카야마(산)로 본진을 전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전투의 불길은 오사카 성 남부 외곽수비선인 사나다마루(여기에서 마루는 구역)와 마른 해자(남쪽 해자는 물이 없었음)로 옮겨 붙었다.
제가 직접 찍은 오사카 성의 마른 해자입니다. 아마도 당시보다는 규모가 축소되었을 겁니다. 오사카 성은 대부분
현대에 복구된, 심지어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공원이 되어서 일본 여행 길에 들르지 않는데, 이번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다시 들려보고 싶군요.
자신의 이름을 딴 사나다 마루보다 좀 더 외곽인 사사야마에 있던 사나다 노부시게는 동군의 주력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나다마루로 급히 몸을 피했다. 사사야마를 장악한 마에다 도시쓰네 병력 중 일부가 무분별하게 사나다마루를 공격하다가 노부시게가 노린 함정에 걸려들어 큰 피해를 입었다.
마에다군이 고전을 하는 동안, 이에야스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사나다마루 공격에 합류했다. 그는 전장에 늦게 도착해서 공을 세우려는 욕심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사나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궁지에 몰린 마쓰다이라 군에게 퇴각명령이 내려졌지만 전투소음이 너무 커서 일선병사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미우라 요에몬 휘하의 닌자부대가 아군을 향해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뒤에서 공격을 당한 동군은 허둥지둥 등 뒤의 적을 향해 공격에 나서는 자연스러운 퇴각이 되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사나다마루에서 큰 피해를 입고 있는 동군입니다. 창 모양의 깃발은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표식입니다.
전열을 정비한 마쓰다리아 군과 이이 나오타카 군은 사나다 마루를 버리고 남쪽 성벽을 공격해 동군 중 처음으로 성문까지 돌파할 수 있었다. 오사카 군의 전천후 구원투수였던 기무라 시게나리는 급히 반격에 나서 성문을 다시 탈환하고 마쓰다이라 군까지 해자 밖으로 밀어내면서 하루 전투를 끝냈다.
1615년 1월 4일, 동군의 도도 다카토라는 약간 서쪽의 성문을 공격했는데, 하필이면 무능한 오다 나가요리(오다 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던 곳이어서 바로 돌파당했다. 다시 한 번 오사카 군의 구원투수인 조소카베 모리치카가 반격에 나섰고 도도군은 구키 시로베이라는 무장이 깃발을 들고 패주하는 병사들을 돌려세운 덕분에 참패를 면할 수 있었다.
이틀 동안의 공격에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야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남쪽 성벽은 오사카 성에서 그나마 취약한 곳인데 이곳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전 병력을 동원해 총공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백전노장의 아버지조차 반대하자 마음을 바꿨고 일본역사상 최초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서양식 대포를 구입해두었다. 아담스 대위가 대포와 화약을 팔았다고 1614년 7월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때부터 오사카 성에 대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2월 5일에는 4문의 컬베린과 한 문의 세이커 포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른 기록을 보면 이에야스가 네덜란드로부터 5문의 대포를 구입했다고 하니까 오사카성 전투에는 최소한 8문 이상의 서양식 대포와 상당히 많은 수의 일본 재래식 대포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동군은 1615년 1월 8일부터 오사카성에 제한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포격은 1월 15일에 시작되었는데 처음으로 서양식 대포의 위력을 경험한 일본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교토의 귀족은 일기에 오사카성의 포격이 여기까지 들렸다는 글을 남겼고 안전한 오사카성 안에 있던 수비군도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는데도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포격전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오사카 군의 대응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포격 하루 만인 1월 16일 밤에 서쪽 다리를 방어하던 반 나오쓰구가 성 밖을 나와 야습을 시도해 사기 회복을 노렸다. 오사카군이 보유한 재래식 포로 대응사격했지만 사거리가 반도 미치지 못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반 나오쓰구의 반격모습입니다. 겨울 전투까지만 해도 오사카군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일본식 재래식 대포에 비해 비교도 안되는 위력을 가진 서양 대포라고 해도 오사카 성을 무너뜨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장기전을 대비해 수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히로시마 성이 1945년의 원폭에서도 대부분이 그대로 버텼기 때문에 훨씬 탄탄한 오사카 성이 원시적인 포격에 무너질 리 없었고 설사 틈이 생긴다고 해도 14.5km에 달하는 성 둘레를 조금만 줄이면 해결되는 위기였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밤마다 총을 쏘고 함성을 울려 마치 야습을 하는 것처럼 수비군을 괴롭혔는데, 누구도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효과로 오사카 동계전투는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게 마무리된다.
1월 17일, 히데요시의 기일을 맞아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성 안의 사당을 찾을 것으로 예상한 동군은 예식 시간에 맞춰 포격을 시작했고 어쩌다가 정확하게 날아간 포탄 한 발이 본채 천수각 중에서도 요도기미의 거실 지붕을 뚫고 들어가 시녀 두 명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오다 노부나가의 집안 출신으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어 온갖 전투를 경험했던 요도기미이지만 난생처음으로 보는 대포 탄의 위력에 얼마나 놀랐던지 바로 달려나가 히데요리에게 휴전하라고 매달라기 시작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휘관급 무장들과 전투회의조차 하지 않던 히데요리는 어머니의 종용에 따라 휴전하겠다고 나섰고 피를 흘리며 전장을 이곳 저곳 누볐던 사나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주전파 지휘관들은 제외된 채, 주화파 지휘관들 중심으로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야스는 전투에 가담한 오사카 군의 모든 무장들의 신변을 보장하고 히데요리도 오사카 성을 포함한 2개 영지 그대로를 가질 수 있는, 전투 직전으로 돌아가자는 제의를 했다. 히데요리는 시코쿠 섬 지역으로 영지를 옮겨 이에야스의 위협에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이에야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전파 지휘관들은 이에야스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지휘를 일임하고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에야스는 젊었을 때에 미카와에서 일어난 일향교도의 반란으로 고생을 하자 그들에게 절을 원래대로 돌려주겠다고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반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에야스는 절이 있던 자리는 원래 아무 것도 없던 자리이고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는 일향교도의 절을 모두 불태워 버렸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휴전합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1615년 1월 21일에, 전투 직전으로 모두 되돌리는 휴전합의에 이에야스가 피를 내 서명을 하고 양쪽이 무기를 내려 놓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와 요도기미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리고 이에야스가 얼마나 속이 검은 인물이었는지 바로 밝혀진다.
이에야스가 본대를 이끌고 귀국길에 오르고, 수 천 명의 인부가 동군의 포위진영과 막사를 부수는 공사를 시작하는데, 실제로는 오사카 성의 해자를 메우고 남쪽의 사나다 마루를 비롯한 외곽 수비선을 모두 해체하는 작업이 목표였다. 인부들이 해자를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을 목격한 오사카 군은 이에야스에게 격렬한 항의를 했지만 이미 교토로 돌아간 이에야스에게 사신이 왕복하는 동안 모든 외곽 수비선이 부숴지고 해자는 메워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아주 간단하게 '실무진의 실수에 사과한다. 휴전합의가 중요하지 해자따위가 뭐 필요하겠느냐'라는 답변을 한다.
이에야스는 불과 보름 만에 서양식 대포를 제작할 것을 명령하면서 오사카 하계전투 준비에 돌입한다.
이에야스가 여름전투를 일으킨 명문은 단순한 시비거리였다. 평화롭게 살겠다고 조약을 맺은 히데요리가 다시 해자를 파고 방책을 보수하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며 토벌하겠다는 억지였다. 지난 겨울전투에서 이미 외곽 수비선을 모두 정리해두었고 오사카 군이 수비를 보강할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별 다른 전략없이 그저 다시 한 번 다이묘들을 대거 동원해 총공세를 펼치면 며칠 만에 끝날 것으로 자신하고 있었다.
동군은 15~16만 명의 병력으로 그러나 역사의 모든 전쟁이 그랬듯이
책상에서 수립된 작전은 방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그러지기 마련이고 이에야스는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오사카군에게는 전략이고 전술을 논의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이미 오사카성은 해자가 모두 메워지고 외곽 방어선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동계전투에서 채택했어야 했던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겨울전투에 비해 전력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교토까지 노리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동군의 전진로를 예상해 길목을 기다리기로 했다. 동군이 무분별하게 전진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오사카에서 모든 동군을 한꺼번에 상대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몇 개의 큰 부대를 중간에서 요격하는 것이 그나마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목을 가지고 승리했을 때에는 오사카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사카 전투는 전국의 다이묘가 총출동했기 때문에 부대단위로 자세한 설명이 어렵습니다. 이 지도가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의 양쪽 진영의 움직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으니까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제가 중요한 부분은 번역해두었습니다.
(우에스기 왈: 이 당시 오사카 군의 병력은 6~12만 명으로 기록에 따라 거의 2배의 오차가 나는데, 낭인이 대거 합류했기 때문입니다. 병력 수조차 파악이 안될 정도로 부대편제가 엉망인 상태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고, 낭인은 부대와 지휘관에 대한 소속감이 없기 때문에 이기는 전투에서는 전력에 보탬이 되지만 지는 전투에서는 오히려 혼란만 일으키는 사용하기 난감한 전력이었습니다.
오사카 전투에서 낭인이 선봉대에 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는 전투였습니다.)
이에야스는 1615년 5월 1일에 자신의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 공식전인 일정은 나고야 성에서 있을 아들 요시나오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었지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히데타다는 5월 7일에 에도를 떠났고 이에야스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슴푸로 돌아가지 않았고 5월 15일에 니조 성에 들어갔다. 히데타다는 다이묘들에게 총출동 명령을 내린 후에 근처 후시미 성에 들어가 합류했고 다이묘들은 밀약에 따라 4일 후에 오사카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군은 5월 23일, 오노 하루후사를 필두로 행동에 나섰다. 도쿠가와 본대가 나라 도로를 따라 접근할 것으로 예상한 그는 고토 모토쓰구와 함께 이코마 산을 넘어 요격할 계획이었다. 구라가리 협곡은 지름길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나는 무장은 모두 전투에 패한다는 속설때문에 이에야스도 지난 겨울 전투에서 멀리 돌아갔던 길이지만 하루후사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름길을 택한 하루후사는 고리야마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지를 통해 귀환하던 중에 고미다와 호료지 마을을 불태웠다. 다행히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한 호료 사는 화재를 피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재 건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노 하루후사는 바로 다음 날 다시 행동에 나섰다. 이번에는 오사카 만을 따라 남쪽으로 가서 사카이 항을 불태우고 기시가와 성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사노 나가아키라의 5,000명과 만나 카시이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패한 그는 오사카 성으로 귀환하고 전장에는 반 나오쓰구(포격에 야습을 감행했던)와 같은 이름있는 무장들이 시체로 남겨졌다.
6월 2일,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교토를 나서는데, 다테 마사무네와 다른 다이묘의 38,000명은 나라를 통하는 우회로를 선택하고, 자신과 아들은 121,000명의 병력으로 좀 더 빠른 이코마 지역을 관통하지만 지름길인 구라가리 협곡은 택하지 않았다.
묘지에서 벌어진 전투, 도묘지 전투
고토 모토쓰구는 황실의 무덤에서 전투를 벌일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6월 3일에 고마쓰 산의 정상을 확보하려고 나섰는데 마침 그 산은 야마토 강의 남쪽에 있었고 거기로 동군의 38,000명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보낸 정찰대는 동군이 이미 고마쓰 산의 동쪽 기슭에 별동대를 보냈다는 보고를 해왔다. 모토쓰구는 짙은 안개를 뚫고 병력을 서쪽 기슭으로 올려보내면서 정상에서 처음으로 동군과 오사카 군이 맞붙었다. 모토쓰구의 부대는 혼다 다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아키의 별동대를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다테 마사무네 휘하의 10,000명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공격해 내려가지 못하고 오사카 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오전 10시까지도 오사카 군은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고 동군의 공격을 받은 모토쓰구는 총상을 입고 자결하고 만다.
겨울 전투와는 달리 여름 전투에서는 오사카 군의 이름있는 지휘관들이 계속 전사를 합니다. 겨울 전투에는 그래도 오사카 성을 중심으로 여유있는 전투를 벌였던 반면에 여름 전투에서는 패배를 예상하고 죽을 생각으로 백병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고토 모토쓰구가 도묘지에서 도쿠가와 군의 오쿠보 다다노리와 맞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산을 넘은 동군은 묘지까지 전진한 오사카 군과 마주쳤다. 오사카 군의 좌익 선봉대는 지난 겨울전투에서 술에 취해 요새를 내준 스스키다 가네스케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지만 전사하면서 그 자리에 뭍혔고 지금까지도 묘지는 보존되고 있다.
이미 두 명의 이름있는 지휘관을 잃은 사나다 노부시게는 더 이상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아 성 방향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험지를 돌파하고 치열한 전투까지 벌이느라 지친 동군 중 상태가 가장 좋은 도쿠가와 다다테루(이에야스의 6번째 아들)에게 추격을 명령했지만, 그는 황당하게도 자신의 부대도 탈진한 상태라며 추격명령을 거부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다테루의 행동은 전투 후에 처벌을 받게 된다.
와카에와 야오 지역에서도 같은 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야오에서는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5,300명이 도도 다카로타의 5,000명을 요격했지만 도도 다카토라의 두 아들 다카노리와 우지카쓰를 죽이는 정도로 만족해야했다.
와카에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가 나이코 사다토리와 야마구치 히로사다의 지원을 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노리고 달려 들었다가 이이 나오타카의 부대와 마주쳤다. 이 전투에서 기무라 시게나리가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이에야스에게 보내졌는데, 기무라 시게나리의 머리에서 좋은 향 냄새를 맡은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본받으라고 했다고 한다. 시게나리는 목숨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 투구에 미리 향을 피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무라 시게나리의 동생 무네아키가 와카에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300명의 병력과 함께 북쪽으로 후퇴했지만 하필이면 이에야스의 본대와 마주쳤고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동군의 진격로를 막아세우지 못한 사나다 노부시게는 동군이 지난 겨울에 사령부를 차렸던 차우스야마(산)와 오카야마(산)를 장악하고 전국시대 최후의 전투인 텐노지 전투를 준비한다.
텐노지 전투 그리고 오사카 성의 최후
6월 3일 저녁, 오사카 성의 천수각에서 작전회의가 열렸다. 전투 전에 꽉 찼던 자리들이 이제는 거의 비어있는 것을 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겨우 54,000명의 병력이 전부였기 때문에 오사카 군은 마지막 전투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하고 모든 초점을 이에야스의 본대에 집중하는 과감한 시도를 하기로 했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모리 가쓰나가가 150,000명의 동군을 붙잡아두는 동안 아카시 모리시게가 해안을 따라 우측으로 선회한 다음 이에야스 군의 측면을 노리고,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모리시게의 공격이 있을 때에 오른쪽으로 떨어져나가 협공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에서 출격해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이 작전은 모든 것이 시간싸움이었다. 오사카 군의 공격이 너무 늦어지면 동군이 진영을 갖추게 되고, 공격을 너무 서두르면 협공이 되지 않고 각 부대가 산발적인 공격을 하다가 차례로 격파당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낭인들에게서 터지고 만다. 동군의 선봉대가 멀리 모습을 나타내자 마자 전장의 흥분을 참지 못한 낭인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고 모리 가쓰나가와 사나다 노부시게가 만류하는데도 전혀 듣지 않았다. 낭인부대가 제 멋대로 공격에 나서자, 모리 가쓰나가는 차라리 전군 총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오사카 군은 맹렬한 공격을 받은 동군의 선봉대는 궤멸되어 후퇴했고, 산 위에서 전장의 상황을 지켜보던 사나다 노부시게는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측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아들 사나다 다이스케를 성으로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본대를 이끌고 바로 나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동군도 지난 겨울전투와 달리 손발이 안맞아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 와카야마의 아사노 나가아키라는 동군의 좌측으로 크게 선회해서 이먀미야 근처로 접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실수로 거리측정을 잘못해서 동군의 좌익에 나타났다. 전투에서 다이묘들의 배반은 흔하게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동군 사이에서 '배반이다'라는 비명이 터졌고 대열이 어지러워졌다.
진격로를 따라 부대를 이끌던 이에야스는 어지러워진 진영을 통제하려고 앞으로 나섰고 이 모습이 사나다 노부시게의 눈에 들어왔다. 노부시게를 바로 말을 몰아 이에야스에게 달려 들었고 잠깐의 실갱이 끝에 이에야스는 부상을 입었다.
드라마의 한 장면입니다. 이에야스가 노부시게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게무샤-암살 등을 피하기 위한 가짜 대역-가 지휘를 대신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은 노부시게가 이에야스를 실제로 공격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일단 이에야스는 노년에 너무 살이 쪄서 갑옷을 입고 있지 못할 정도였는데 오사카 전투를 지휘할 때에도 갑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사카 전투 당시 73세의 고령이어서 노부시게의 공격을 받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구리 영감이 그렇게 무모하게 최일선에 나섰을리도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호위무사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노부시게가 돌격했다가 실패한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대반전이 다시 일어나면서 오사카 군은 희망을 잃게 된다. 양쪽의 수 많은 병사들이 보는 자리에서, 이에야스를 공격하던 노부시게가 전사한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돌격했던 노부시게는 탈진해 땅에 주저 앉았고, 그를 알아본 니시오 니자에몬이 투구를 벗기고 목을 벴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지휘관을 잃어 사기가 크게 떨어진데다가, 동군의 이이 나오타카와 도도 다카토라의 대군까지 몰려들자 오사카 군은 성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히데요리는 성 문에서 얼마 나서지도 못하고 다시 성 안으로 쫓겨들어갔다.
오후 4시에 이에야스의 사촌인 미즈노 가쓰시게가 오사카 사쿠라 문에 깃발을 꽂는다.
모처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림은 좀 과장이 있는데, 먼저 히데요리가 나이에 비해 너무 늙었고, 반면에 노부시게는 너무 젊습니다. 그리고 블랑기 포의 크기도 지나치게 큽니다.
노부시게는 깃발로 동전 6개의 육문전을 사용했는데 이건 죽은 사람이 황천을 건널 때에 사용하는 노잣돈이라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입니다.
6월 5일 오전, 오사카 성 전체에 붙은 불을 피해있던 히데요리는, 이에야스에게서 어떤 제안도 받지 못하자 모든 것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에야스가 자결을 요구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요도기미 그리고 30 여명의 무장과 시녀들과 함께 자결한다.
동군은 오사카 군의 패잔병을 추격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오사카 성은 불타버렸고 포로로 잡혀 처형된 조소카베 모리치카를 제외한 모든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자결했다. 교토에서 후시미에 이르는 길에는 1,000 개의 목이 효수되었고, 히데요리의 아들 구니마쓰 (당시 8살)도 처형당했다.
도묘지 전투에서 오사카 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던 이에야스의 6번째 아들 도쿠가와 다다테루는 고야산으로 추방되어 91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여담으로 야베 도라노스케라는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은 세력이 대단했었는데, 원정길을 배웅하는 사람들때문에 합류가 늦어져 활약할 기회를 놓친데다가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전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자 20일 동안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사카 전투를 그린 엄청난 크기의 그림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오사카 성에서 봤었는데, 가끔씩 오사카 성에서 관련 국보급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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