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병과 전사자의 적나라한 사진으로 설득력을 높이고 싶었지만 여러분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독일병사의 눈으로 본 D-Day (3부)
프랑스를 방어해서 본토를 지키는 보병일 뿐이었다.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콘크리트 잔해 뒤에 숨어 있고 적이 고폭탄으로 우리 주변을 박살내는 동안 남쪽에서 다시 전차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후의 순간에 전차 지원군이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순간에 대대적인 전차부대의 반격으로 미군을 다시 바다에 몰아넣는 상상을 했다. 그렇지만 3호돌격포 한대만 나타났다. 낮은 차체에 75mm 대전차포를 장착해 대전차용으로 유명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많은 셔먼을 부쉈는데 이번에는 한 대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뒤를 계속 돌아봤지만 더 이상 없었다. 전차장이 상황을 알아보려고 단독으로 출격한 것이었다.
우리 옆을 재빨리 지나쳐가더니 도로쪽에 몇 발을 발사했다. 충격과 폭발음이 들렸다. 판처슈렉 병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럴 힘이 없어서 콘크리트 뒤에 눕히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3호전차는 계속 포격하면서 서서히 후진했다. 전차장이 머리를 내밀고 빨리 올라타라고 손짓했다.
측면 장갑을 잡고 뒤에 올라탔는데 엔진배기구 때문에 엄청 뜨거웠다. 전차는 주변의 차량잔해를 밀어붙이며 남쪽으로 향했다. 도로에는 셔먼 3대가 주저 앉아 있었다. 두 대는 로켓탄에 맞았고 다른 한대도 불이 붙은 채로 서 있었다. 그 뒤에 다른 전차와 보병이 있었지만 길이 막혀 우리를 추격하지 못했다.
남동쪽으로 몇 km 이동해 숲속에 모여 있는 소수의 기갑부대와 합류했다.
돌격포 몇 대, 대형장갑차 몇 대 그리고 하노마그 보병 약간이 전부인 부대였다. 10대와 30명이 전부였던 기억이다. 차량은 나뭇가지로 심하게 위장했고 아무도 숲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끊임없이 연합군 전폭기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대공포가 아예 없었다. 장갑척탄병에게 들으니 사단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본대를 찾을 방법이 없어서 장갑척탄병부대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의무병에게서 각성제를 다시 받아 기운을 차리고 탄창과 수류탄도 받았다. 대부분 미군과 교전경험이 없는 어린 병사들이었다. 탄약상자 위에서 스프를 먹는 동안에도 썬더볼트는 머리 위를 오갔다.
무장친위대 보병 소대가 합류했다. 모두 17살 정도로 어렸는데 MG34와 MP40으로 중무장한 모습이 너무나도 안 어울렸다.
장갑차 2대가 정찰을 나가 미군포로를 잡아 심문하기로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숲 좌우측에서 폭발음이 들려 이대로 있다가는 고립된다는 걱정이 컸다.
전차장이 사단장의 명령이 있었다며 남쪽으로 2km 떨어진 방어진지로 가자고 했다. 남쪽길은 농장 트랙터나 다닐만한 흙길이었고 좌우가 높은 프랑스 보카쥬Bocage(사진 참조)였다. 보통 양쪽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추축군과 연합군 모두 고통스러워 했던 프랑스 교외 흙길입니다.
기세좋던 영국군이 비트만에게 일격을 당한 빌레보카쥬가 생각나죠.
장갑차가 선봉에 서고 그 뒤를 하노마그 탑승 보병과 도보의 무장친위대가, 뒤는 3대의 돌격포가 지켰다. 가장 마지막 전차는 후진으로 이동했다. 좁은 데다가 굽은 길이 많아서 걸어가는 속도였다. 전차병은 공중에서 길가의 잡목과 구분하지 못한다며 느린 속도가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다리장애덕분에 돌격포에 올라 나뭇가지 속에 몸을 숨겼다.
길은 점점 내려 앉아 돌격포 포탑 위가 주변과 비슷한 높이가 되었다. 은폐하기에 최적이었지만 외통수이기도 했다. 전차장은 차량이 한대라도 멈춘다면 그대로 뭉개고 지나가겠다고 경고했다. 미군 공수부대가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은 극에 달했다.
실제로 길가에 낙하산과 시체가 몇 구 있었고 나무 위에 걸린 시체도 있었다. 굽은 길을 돌자 길가 위에 미군 시체가 더 보였다. 모두 무릎을 꿇고 등뒤로 손이 묶인 채로 뒤에서 총에 맞은 것처럼 보였다. 전차병은 분명히 SS 소년병 짓이라고 말했다. 이 장면을 보면 미군도 우리를 포로로 잡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목표까지 몇 km만 남았을 때에 야보가 남서쪽에서 다시 나타났다. 워낙 위장이 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주기만을 기도했다. 처음에는 기도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6대 중 처음 2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머리 위를 날아갔지만 그 다음 두 대는 급강하하더니 캐노피의 조종사와 얼굴이 마주칠 정도로 낮게 지나갔다. 전차병이 소화기로 사격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썬더볼트 편대가 선회해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차례로 공격해왔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썬더볼트 날개 아래에서 흰색 연기를 뿜으며 로켓이 날아들었고 우리는 피할 곳이 없었다. 나는 각성제를 먹은 힘으로 전차에서 뛰어내려 길가에 엎드려 숨을 죽였다. 이번에는 이탈리아에서 본 적이 있었던 고폭탄이었다. 그들은 우리 뒤의 미군시체를 잘못 알고 산산조각냈다. 덕분에 학살의 증거는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우리 행렬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흙길은 순식간에 도살장으로 변했다. 로켓고폭탄이 돌격포에 떨어져 측면장갑을 찢어내고 위에 무성하게 덮여있던 위장을 날려버렸다. 돌격포 두 대가 엔진데크에 맞아 불을 뿜었다. 후진하던 마지막 전차는 상부에 맞았는데 로켓이 뚫고 들어갔을 것이다. 좌우로 충돌하더니 상부가 폭발로 날아갔다.
안에 타고 있던 전차병도 함께 치솟았고 잠시 후에 연기를 내며 철과 살조각이 사방에 떨어졌다. 로켓은 계속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좌우로 피신한 무장친위대 소년병을 쓸어버렸다. 절반 정도가 산산조각났고 내장이 터져 나가 안이 텅 빈 몸통이 불타고 있었다.
앞에 있던 소년병이 도살장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로켓공격을 받은 하노마그가 후진하기 시작했다. 불길에 휩싸인 하노마그는 뒤에 있던 소년병들을 궤도로 깔아뭉개다가 불타는 돌격포와 부딪친 후에야 멈췄다.
흙길은 화염, 조각난 신체, 부숴진 차량과 폭발하는 탄약으로 뒤덮였다. 목숨을 건진 소년병은 불길에 탄약이 터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한 명은 불길에 휩싸여 일어섰다가 벨트의 수류탄이 터지면서 팔다리가 잘려나갔다.
야보가 북쪽으로 기수를 돌렸고 잔해에 등을 맞은 나는 호흡이 고통스러웠다. 나는 24시간도 안되어서 해변 벙커에서, 두 번째 벙커라인에서 그리고 기갑부대 행렬에서 세 번의 공격을 당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좌절감을 느꼈고 차라리 항복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죽을 고생을 다 한 후에 항복하기보다는 일단 다음 방어선까지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은 병사가 하나 둘씩 나타났다.
부상병을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었다. 모르핀이나 붕대도 없었고 내 몸하나 가누기도 힘들어서 그들을 데리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명은 내장이 튀어 나왔는데도 의식을 잃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다른 병사가 머리에 총을 겨누더니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었다.
결국 목표로 했던 강력한 방어선에 도착했고 의무병의 진찰을 받아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진 것을 알았다. 부상병 후송마차에 올랐는데 눈과 귀가 멀고 손이나 발을 잃고 심한 화상으로 군복과 피부가 달라붙은 병사들 틈에 있으려니 죄책감이 들었다.
회복병동에서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부상병은 화기를 수리하는 노동을 했다. 힘들지 않고 오히려 고민을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6월 6일에 겪었던 충격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부상병은 연합군을 직접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다로 밀어 넣는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파리를 내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 예측이 정확했다.
7월에 재편성된 사단에 합류했다. 탄약을 수송하는 오펠 트럭 운전병이었는데 7월 말에 후방까지 침투한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끝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소총과 수류탄을 가지고 셔먼을 상대할 수 없어서 순순히 항복했다.
해변근처의 수용소로 옮겨졌는데 여러 국가의 포로 2,000명 정도가 있었고 병과는 매우 다양했다. 공군정비병까지 있었다. 미군은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우리끼리 수용소를 운용했다.
수용소에 있으면서 미군의 말도 안되는 물량공세를 더 확실하게 목격했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었고 보급품도 트럭이나 기차로 운송했고 연료는 무한정 사용했다. 지프나 트럭이 고장나면 수리하지 않고 공장에서 나온 신품을 바로 사용했다. 음식도 미국에서 만든 통조림을 먹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조국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륙직후라 독일군 포로도 비교적 제 모습이었습니다.
포로가 신입포로에게 질문하는 모습인데 분위기가 상당히 즐겁죠?
동부전선과 달리 서부전선 포로는 귀향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몽골부터 러시아인까지 다국적 의용군포로입니다.
망작 마이웨이의 소재가 된 사진 한장입니다. 일본인 또는 한국인이 독일군 포로로 잡힌 모습입니다.
왜 망작이냐고요? 폭탄에 맞아 공중 높이 떠도 사소한 찰과상이 전부였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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