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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소련전차병의 눈으로 본 T-34 (1부)

by uesgi2003 2016. 3. 3.


T-34를 오랜 동안 직접 경험한 참전용사의 인터뷰기록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내용이 많은데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많이 요약해서 필요한 부분만 정리해봤습니다.


엄한 독일전차팬이 몰려와서 엄한 소리 안했으면 좋겠군요. 팬심은 눈과 귀를 어둡게 하고 노인성 치매를 일찍 부릅니다. 

참고로 제 책상 옆에는 독일전차 모형만 3대가 있습니다. 

 


T-34를 상대로는 쓸모 없는 독일전차

 

참호에 틀어박힌 전차 5대를 부쉈다. 적은 3호와 4호전차였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T-34의 전면장갑을 뚫을 수 없었다

2차대전 전차장 알렉산드르 바실리에비치 보드나르 중위는 이렇게 자신있게 말했다. 물질도 중요하지만 믿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병사가 자신의 장비를 믿을수록 더 과감하고 단호한 행동을 한다. 반대로 불신과 포기는 패배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T-34에 대한 신뢰는 선전책동이나 환상의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의 다른 전차에 비해 경사장갑과 V-2 디젤엔진과 같이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전차장 부르쳅은 ‘T-34는 팬저나 타이거에 비해 장갑이 45mm로 얇았지만 경사장갑덕분에 90mm와 맞먹는 방어력이었다고 기억한다. ‘독일전차의 장갑판은 잘못 설계되어서 직각이었고 확실히 불리했다.’

50mm 이하의 독일 대전차와 전차포는 대부분의 경우 T-34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50mm PAK-38 대전차포의 텅스텐 심tungsten-cored탄과 60구경 50mm 3호전차포 조차도 실제로는 경사장갑을 튕겨나갔다.

NII-48(과학실험소 48)1942년 통계조사를 보면 모스크바 공장 1호와 2호에서 수리받은 T-34를 보면 전면부분에 맞은 109발 중 89%가 효과가 없었고 75mm 이상의 포탄이 치명적이었다. 독일군이 75mm를 사용하면서 1.2km 거리에서 T-34를 파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943년 쿠르스크전투까지도 독일군은 50mm 포를 상당수 사용했기 때문에 T-34에 대한 신뢰는 당연했다.


 

영국전차만이 T-34의 장갑에 비해 우위를 점했다. ‘영국전차의 포탑을 맞추더라도 파편이 튀지 않아서 전차장과 포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T-34 장갑은 파편이 많이 튀었기 때문에 전차병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영국 마틸다와 발렌타인 전차장갑은 니켈을 상당히 많이 함유(3~3.5%)했지만 소련의 45mm 장갑은 1~1.5%에 불과해 내구성이 무척 낮았다.

그리고 승무원도 (기본 장갑구조가 우수하다 보니) 전차보호를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베를린전투 직전에서야 판처차우스트Panzerfaust를 막기 위해 침대스프링을 덧대었고 위장무늬도 사용하지 않았다. 공장에서 나온 녹색 그대로 사용했고 참전병사 중에 위장무늬 T-34를 본 사람이 없었다.



위장무늬 T-34는 독일군이 노획한 전차로 알고 있습니다. 

 

디젤엔진도 신뢰성에 한 몫을 했다. 가솔린은 불붙기 쉬웠고 일단 불붙으면 진화하기 어려웠다. ‘논란이 뜨거워지자, 니콜라이 쿠체렌코는 횃불을 들고 공장 뒷마당의 가솔린 양동이에 불을 붙였다. 양동이는 터질 듯이 불이 붙었다. 다시 디젤 양동이에 불을 붙였는데 마치 물에 던진 것처럼 횃불이 꺼졌다…’

적은 가솔린엔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당한 약점이었다. 렌드리스 프로그램으로 지원된 전차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피탄되어 죽었다. 엔진은 가솔린이었고 장갑도 얇았다.’

한 번은 SU-76 자주포가 우리 대대에 배치된 적이 있었다. 가솔린엔진을 사용했는데 정말 라이터같았다전투에 나가자 마자 불타버렸다.’

독일군의 가솔린엔진과 연료통은 수 백 리터의 폭탄을 품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T-34 V2 디젤엔진입니다. 독일이 가솔린엔진을 고집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렇지만 통계를 보면 디젤엔진 전차도 가솔린엔진 전차보다 안전하지 않았다. 194210월에 수집된 데이터에서 디젤 T-34(23%)가 항공유 엔진의 T-70(19%)보다 더 많이 전소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쿠빙카Kubinka 엔지니어팀은 1943년에 흔한 오해와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독일군의 가솔린엔진은 우수한 설계와 자동소화장치 덕분에 라이터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디젤 양동이에는 기화된 연료가 없어서 불이 쉽게 붙지 않았지만 포탄의 강한 열에는 불이 붙었다. 전차 후면의 연료탱크에 포탄을 맞을 확률이 적었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보면 연료가 바닥난 상태여서 전소될 일이 적었을 뿐이었다.

반대로 독일전차의 낮은 소음은 확실한 장점이었다. ‘한 편으로는 가솔린엔진은 화재의 위험이 있었지만 조용했다! T-34는 엔진과 트랙소음으로 시끄러웠다.’ 초기에는 소음기도 없어서 12실린더 엔진의 배기음까지 겹쳐서 소음과 분진이 끔찍했다.



쿠빙카 전차박물관은 세계최대/최고의 전시품을 자랑합니다. 

 

설계가 잘된 전차는 피탄당해 파괴되어도 승무원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 T-34 차체 전면부의 운전병 해치는 들어가고 나오기 쉬웠다. 그리고 막대를 끼워 개폐상태를 조정할 수 있었고 길이 험하거나 전투 중에도 해치가 열리거나 닫히지 않았다. 운전병은 해치를 조금 열어 두곤 했다.

운전병은 한 뼘 정도 해치를 열어두었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고 전차장 해치를 통해 탁한 내부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었다.’

운전병은 생존가능성이 가장 큰 위치였다. 차체 하부는 지면이 보호를 해주었고 전면은 경사장갑이었기 때문에 포탑에 있는 승무원이 치명상을 입었다. 초기의 통계를 봐도 차체 81%, 포탑 19%로 차체피탄이 압도적이었지만 전면피탄의 89%는 효과가 없었던 반면에 포탑은 37mm 대공포탄에도 쉽게 관통되었다. 더구나 지면이 고르지 않아 차체의 1/3이 평소에도 가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운전병은 의외로 안전한 위치였다.



T-34/85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전쟁추모관이 더 적절한 이름이겠죠.


전쟁을 기념한다는 말도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던데... 국립국어원의 설명입니다. 


'6.25/임진왜란을/살인사건을' 등과 같은 목적어에 대한 서술어로 '기념하다'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기념(-되다/-하다)'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의 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기념(-되다/-하다)' '결혼 기념/출판 기념/광복절 기념(행사)/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운전병 해치에 대해 모든 참전용사가 편리했다고 입을 모았지만 초기형의 포탑해치에 대해서는 파이Pirozhok라고 부르며 몹시 싫어했다.

무겁고 열기 힘들었다. 꽉 끼어 있으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너무 불편하고 너무 무거웠다.’

T-34의 전신인 BT-7은 미키마우스라는 별명처럼 포수와 장전수용 해치가 각각 있었지만 T-3476mm 포를 장착했고 연료탱크도 전투실에 있었다. 수리를 위해 해치를 하나로 합쳐 크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부상병 구조에도 큰 해치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전투경험과 승무원의 불만을 토대로 1942년 가을 우랄공장 생산품부터 다시 미키 마우스 해치로 바꿨고 포탑도 6각형으로 변경했다.

피탄되었을 때에 해치가 잠기는 것을 막으려고 해치를 바지 허리띠로 묶었다. 마찬가지로 전차장 큐폴라의 걸쇠 스프링도 빼서 부상자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게 했다.


 

전차가 이동 중이거나 전투 중일 때에는 두 사람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먼저 전차장은 전투를 지휘하는 동시에 초기형 T34/76의 포수도 맡았다. 그 다음으로 운전병이 큰 역할을 했다.

유능한 운전병이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운전병이자 수리병인 그리고리이 이바노비치 크류콥은 나보다 10살이나 많았는데 전쟁 전에는 자동차 운전수였고 레닌그라드 부근에서 전투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전차를 아주 잘 알았고 그 덕분에 초기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T-34는 비교적 복잡해서 경험과 힘이 필요했다. 초기 T-34 4단 트랜스미션에서 기어를 바꾸려면 상당히 힘이 들었다. ‘한 손으로 기어 레버를 바꿀 수 없어서 무릎으로 밀어야 했다.’



문돌이라 그림만 봐서는 잘 모르겠군요.

 

194011월에 T-34KV 전차의 트랜스미션을 유성형planetary transmission(그림 참조)으로 바꿔서 속도도 높이고 운전도 쉽게 해야 한다는 공식문서가 나왔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전초반 운전병은 4단 미션을 잘 다루어야 했다.



운전병이 1단 대신 4단으로, 2단 대신 3단으로 기어를 넣게 되면 기어박스가 고장났다. 눈을 감고도 기어를 변경할 수 있을 정도로 숙달되어야 했다.’

4단 미션은 내구성과 안정성이 크게 부족해서 고장이 잦았다. 쿠빙카 엔지니어는 국산, 노획, 렌드리스 장비를 테스트한 보고서에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국산 트랜스미션은 현대전차에 전혀 맞지 않으며 연합군이나 적 전차에 비해 몇 년은 뒤처져 있다.’

194265일에 발간된 다른 보고서를 바탕으로, 1943년 초부터 우랄지역으로 이전한 하르콥 공장에서 상시연결 기어-Permanenr clutching gear-wheels5단 미션을 설계했고 전차운전이 쉬워져서 통신병이 더 이상 기어변속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T-34가 누렸던 경사장갑도 그 힘을 잃어갔지만 대신에 기동성이 개선되면서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경사장갑과 디젤엔진 외에 속도라는 장점을 얻었다. 전차병은 장갑은 허접하지만 속도는 더 빠르다라는 말을 했다. ‘장갑은 단단하고 속도는 더 빠르다라는 군가(동영상 참조)를 바꾼 것이다



초반만 해도 전차병은 독일전차를 상대로 확신을 가지고 달려들었지만 팬더와 타이거가 투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두 전차는 은폐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장포신으로 소련군 전차를 상대했다.

우리의 76mm 포는 500m 거리까지 좁혀야 두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텅스텐 심의 76mm 탄도 500m 내에서 90mm를 관통할 수 있었지만 타이거의 전면장갑은 102mm였다.



대형포탑으로 85mm를 장착하고 승무원이 5명으로 늘면서 전투력이 훨씬 막강해졌습니다. 


T-34/85가 등장하면서 1km 밖에서 두 전차를 상대했고 구형 4호전차는 1.3km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T-34/85 한 대가 킹타이거 3대를 상대한 산도미에시Sandomierz 전투는 다음에 계속 하도록 하죠.


독일군은 노획한 T-34를 재미있는 용도로 전용했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T-34 그림입니다. 엄청난 고화질이니까 저처럼 크게 출력해서 걸어둬도 괜찮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