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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1부

by uesgi2003 2016. 6. 19.


너무 현대와 2차대전 이야기만 정리했기에 다른 시대로 눈을 돌려보자 싶어서 샤를마뉴와 프랑크 왕국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이름만으로도 범접해서는 안되는 신성로마제국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왕좌의 게임 배경은 어린이 동화 수준일 정도로 복잡한 인명, 지명과 사건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막막합니다. 하아~


신성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30년 전쟁(1618~1648)은 발발배경 자체가 크게 갈라지는데다가 학자의 시각에 따라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상당히 두터운 책 한권이 나오기 때문에 시도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때에는 용두사미로 적당히 감추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마무리된다면 동부전선, 일본전국시대와 함께 가장 괜찮은 참조자료가 되겠죠.


설명을 크게 줄이거나 추가해야 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발음오류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시의 경우, 지금 지명과 다르기도 하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카를 5세의 경우에는 샤를 5세부터 카를로스 5세까지 다양하게 부릅니다. 철자는 더 다양하죠. 



신성로마제국의 국장인데 무척 많은 문장이 있죠? 엄청난 가문이 얽혀있습니다. 



이 지도는 30년 전쟁 이전의 신성로마제국 영토입니다. 참 복잡하죠?

스페인은 영국원정 참패 후에 몰락 중이었지만 여전히 최대강국이었고,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상대했기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와 연합합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최절정기였고 모스크바공국(이후 러시아)이 국가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아직 유럽의 변방에 머무를 때입니다.

배경 1부 이야기는 이 지도보다 150년 전부터 시작되어 신성로마제국의 상황이 좀 더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류나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정중하게 지적해주시면 저도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하고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신성로마제국과 30년 전쟁을 건드렸는지... 몹시 후회하는 중입니다. 


이번 배경 이야기는 프랑크 왕국에서 갑자기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인물이 있었구나 정도로만 가볍게 넘기시면 됩니다. 



지금 심정입니다.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1부


16~17세기 독일은 상당히 불행한 나라였다. 독일은 통일국가를 이루지도 못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있기는 해도 독일에서만큼은 영국왕, 영주의회Diet, 총회General Assembly와 비슷했다.  

멘츠Mentz(마인츠), 트레비스Treves(트리어), 쾰른Cologne대주교 3명과 팔라틴Palatine(팔츠 또는 라인 궁중백)선거(), 작센Saxony선거후,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선거후와 보헤미아Bohemia 왕이 황제를 선출했다.



7인의 선거후입니다. 


황제는 명목으로는 로마황제의 후임이었지만 실제로는 샤를마뉴Charlemagne(또는 카롤루스Carolus Magnus)대제와 오토Otto the Great대제의 후임으로 서유럽 기독교 국가의 수장이었다. 



샤를대제는 서로마 붕괴 후 분열된 서유럽을 통일해 현대유럽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아헨의 EU 깃발과 잘 어울리는 동상입니다.

 

지기스문트Sigismund황제는 세계의 군주가 사망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시신을 당분간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선거후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하를 모든 기독교국가의 수장이자, 보호자이자, 감독관으로 선택하였습니다라는 찬사로 황위즉위를 알렸지만 실제 권력은 이런 표현과 거리가 멀었다.

샤를마뉴대제는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왕이었고 무력과 외교로 서유럽을 통일했었다. 그가 죽고 자손에게 제국을 세 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에도 독일왕은 황제가 되지 못했다. 독일왕 중 가장 유명한 하인리히1(매사냥꾼왕 헨리Henry the Fowler)도 황제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토대제 이후부터 독일왕은 교황에게 황제즉위를 당연한 권리로 요구했고 아헨Aachen이나 프랑크프루트Frankfort에서 즉위했다.



새장을 손보던 중에 왕위를 통보받은 하인리히입니다. 백설공주 식의 인생역전이 아니라, 원래 강력한 작센 가문 출신인 금수저였습니다. 매사냥을 워낙 좋아해서 저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입니다. 독일왕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하인리히 1세의 아들로 신성로마제국 초대황제에 오른 오토대제입니다. 

 

황제로 즉위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전국이 복종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공국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에는 황제가 아니라 이탈리아왕으로, 철관을 쓴 롬바르디아Lombardy왕의 권리로 요구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건립 이후 시간이 갈수록 황제의 권리는 크게 달라졌다.




성십자가True Cross의 못을 녹여 넣었다는 철관입니다. 신앙과 전설은 믿는 자의 몫입니다. 


15세기 법률책에는 이미 황제의 권리를 빼앗으라는 내용이 있었고 대공, 주교, 귀족이 황제 대신에 직접 권리를 행사하려고 했다. 황제의 이름이 가지는 권위는 매우 약했다. 중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봉건왕 수준이었다.

실제로 황제의 직신(황제 다음의 신하)은 독립영주였고 10세가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공처럼 자치권을 가졌다. 그들은 서로 제휴하고 전쟁을 벌였으며 다른 신하나 시민은 영주를 거쳐야만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신분계층구조입니다. 가장 위에 황제와 7 선거후가 있고 그 아래에 주요 대공이 있고... 그냥 그렇다고요.

 

15세기 초만 하더라도 황제를 겸임한 독일왕권의 부흥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절대권력은 고사하고 독일인의 통일과 안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15세기 중반, 분열과 혼란을 막기 위해 영주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국민과 황제를 연결하기 보다는 봉건회의가 정규화된 것에 불과했다. 국민은 아예 참여할 수도 없었고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카운티 대표가 참석하는 영국의회보다는 유럽군주의 대표의회 형태였다. 참석자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의 감정을 대표하지도 않았다. 국내문제를 의회에서 경쟁자에게 드러내기 보다는 국내에서 알아서 처리했다.

작센선거후, 헤세방백Hesse Landgrave(황제가 다른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직접 임명한 귀족), 오스트리아대공은 자신의 궁전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고 군대를 양성하고 내정을 할 뿐, 다른 국가를 위해 출혈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한 군주가 악정을 거듭하면 비난은 할 수 있어도 강제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 군주가 강력하거나 든든한 배경이 있다면 전쟁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15세기 말~16세기 초에 약간의 개선이 있었다. 제국의 대공이 임명하는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이 설치되어 군주 간의 분쟁을 재판했다. 법원의 판정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독일을 3개 모임Collegium으로 나누었고 제국의회Imperial Diet에서 발언권을 가진 공과 도시가 각 모임에서 협력하고 군대를 모아 질서를 유지했다.

7명의 선거후가 첫 번째 모임을 구성했는데 황제를 선출할 때에만 모두 모였고 국정협의의 경우에는 보헤미아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두 번째 모임은 의회에 참석자격이 있는 귀족이 모였다. 세 번째 모임은 제국자유도시Free Imperial City가 참석해 평민의 목소리를 대변했지만 선거후와 귀족모임에 비해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100년 후의 제국대법원 모습입니다. 



황제가 대리인을 보내 직접 통치했던 독일 자유제국도시들의 문장입니다. 제국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작은 마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유도시에서 황제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입니다. 왼쪽이 기병, 오른쪽이 보병인데 겨우 보병 12명을 내놓는 마을이면 얼마나 작은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거후와 귀족은 제국의회와 대법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에 위기와 분열이 생길 경우 두 모임은 국민과 반목했고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영국은 왕이 상원의 구성을 조정하고 선거로 하원을 교체해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지만 독일은 하원이 없었고 황제가 영국왕처럼 상원을 조정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 실제 권력은 선거후와 귀족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개신교가 급격하게 힘을 얻으면서 제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이 변화를 강하게 요구한 반면에 의회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거후 모임은 3명의 성직선거후와 세속선거후가 균형을 맞췄다.

귀족모임은 38명의 고위성직자와 18명의 세속귀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성직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태였다. 영국은 헨리 8세가 교회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주교를 의회에서 몰아냈지만 제국은 그럴 힘이 없었다. 국민이 바라는 개신교를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독일국민의 90%가 개신교도로 개종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모처럼 막강한 권력을 지닌 카를 5세가 독일왕과 황제에 즉위했지만, 대부분의 공과 선거후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어렵게 봉합된 독일은 다시 분열되었다. 개신교 공과 선거후는 제국의회와 반대편에 섰다. 제국의회가 영국의회와 다르듯이 황제도 헨리 8세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1519년에 즉위한 카를Charles5세는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티롤Tyrol을 통치했다. 그는 스페인왕이었고 중남미의 모든 광산을 소유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왕을 몰아냈고 시실리와 사르디니아Sardinia도 소유했다. (프랑스왕과의 협정으로 나중에 포기한) 부르고뉴, 프랑슈 콩테Franche Comté(스위스 접경의 프랑스 영토)와 네덜란드의 17개 주도 가지고 있었다

유럽최강의 군주였던 그는 완강해야 할 곳에서는 유연했고 유연해야 할 곳에서는 완강했다. 그리고 독일에 큰 기여를 하지 않았다



카를 5세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영토입니다. 상당부분이 스페인의 영토였습니다. 

 

워낙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독일의회의 구성을 바꿀 수 있었다. 독일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외국인이었고 외국인의 사고로 움직였다. 어머니의 스페인 피가 흘렀고 스페인사람답게 구교(가톨릭)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루터를 처음 본 자리에서 저 사람은 절대로 나를 이교도(개신교)로 만들지 못하 것이오라고 말했다.



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스페인 입장에서는 역사상 최절정기를 이끈 카를 5세입니다. 왕위에 즉위했을 때부터 내전을 진압해야 했고 격무에 지쳐서 퇴임할 때까지 전쟁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프랑스와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신성로마제국을 지켰고 개신교를 상대로 구교를 방어했습니다. 그가 종교에 대해 실리를 취했다면 스페인어가 제1 외국어가 되었겠죠.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아래 지도 참조)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신성로마제국)에게 나누어주었고, 펠리페 2세 역시 영국과 개신교를 상대로 막대한 출혈을 거듭하면서 스페인의 국력이 바닥납니다. 



아들 펠리페 3세는 몇십 만 명의 모리스코(기독교로 개종하고 스페인에 정착한 무슬림)를 추방해서 스페인의 몰락을 자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