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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코사크의 역사 - 코사크의 기원

by uesgi2003 2016. 7. 12.


30년 전쟁 배경설명이 너무 지루해서 잠시 다른 주제를 병행해보자 싶었는데... 무수한 민족, 부족과 문화가 난무하는군요. 또 하나의 신성로마제국인데 어쨌든 당분간 30년 전쟁과 교차로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냥 미드 시즌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0년 전쟁은 시즌 1이 끝났는데 금방 시즌 2가 돌아온다는 것이 함정이지만요.


코사크의 역사 - 코사크의 기원


러시아 남부의 평야와 스텝은 유럽과 아시아가 주고 받으며 정복과 탈환의 연속이었다. 로마와 비잔틴도 이 지역은 건드리지 못했다. 기독교 문명이 전해지기 전의 스키타이Scythia 역사는 서로를 밀어내며 사냥터를 노리는 야만부족이라는 인식이 강하다.이곳을 차지한 승리자도 더 우월한 문명에 정복되거나 굴복했다. 워낙 많은 부족과 문명이 존재했다가 혼합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오랜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하려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시작된 동유럽 국경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굵직한 사건이 정기적으로 벌어지며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었다.

 

13세기, 아시아에서 시작된 타타르족의 침공은 러시아남부 스텝을 건너 유럽 깊숙한 곳까지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헝가리왕 벨라Bela 4세의 궁전에는 불가르를 비롯한 스텝 부족 피난민이 몰려들어 침략자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4에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몇 개월만에 루스Rus와 모스크바공국이 무너졌다. 심지어 야만족 스키타이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던 폴란드도 침략자에게 치욕적인 공물을 바쳐 위기를 모면했다. 유럽은 이제 사라센Saracen 이교도보다 더 심각한 적을 만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Frederick 2세 황제는 성지회복의 꿈을 버리고 기독교 영주들을 불러 모아 몽골군을 상대했다. 로마 교황은 성전을 호소했다. 성 루이Louis는 단독으로 야만인과 맞설 준비를 했다.


 

루이 9세는 7차와 8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해 성인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몽골과 교신한 것은 몽골을 상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7차 십자군 원정에서 몽골과 함께 이집트와 시리아를 공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자료는 은근히 오류가 많군요.

 

유럽인에게는 종말을 가져온 악마와 괴물같았던 몽골군이 갑자기 동쪽으로 물러나며 볼가강 부근의 비옥한 스텝에 거대한 국가를 세웠다.


 

1241년 헝가리 연합군을 궤멸시킨 바투 칸은 2대 대칸인 오고타이 칸이 사망하자 급하게 말을 돌려 귀국했고 서유럽은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바투 칸은 정복한 러시아 지역에 킵차크(금장)칸(한)국을 세웠습니다.

  

아시아에서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그 당시 역사가는 신의 손이 작용했다고 믿었다. 신의 분노를 기독교 교회, 신부와 신앙으로 잠재웠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었듯이 동양의 전제국가는 내부에서 와해되기 마련이었다.

노가이Nogai족이 킵차크 칸국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의 여파로 스텝의 고대 부족에 대한 지배가 무너졌고 독립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이었던 스키타이족은 칸국의 내분을 틈타 스텝의 오지를 회복하려고 했다.

스키타이족은 황무지 전투에 능해 러시아와 타타르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는 동맹인 동시에 호전적이고 유목습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협이 되었다.

 

강 주변을 떠돌며 해적질을 하거나 러시아와 타타르 카라반을 노렸다. 코사크Cossack족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러시아 역사에서 코사크족 기원만큼 불투명하고 해결하기 힘든 논쟁거리가 없다. 구분이 없는 스텝지역을 완전히 다른 인종과 부족이 유입되어 혼재하다가 대체되었기 때문에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코사크 문명의 특징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러시아어로 카사크Kasak, 영어로 코사크는 타타르어로 기수Horseman 또는 약탈자/방랑자Rover라는 뜻이다. 그들은 키에프 루스(Kievan Rus 키에프 대공국. 지도 참조) 기원이라는 주장이 가장 강하다. 키에프 루스는 9~13세기까지 키에프Kiev 중심의 중세왕국이었다. 키에프 루스는 우크라이나, 벨로러시아와 러시아의 역사이기도 하다.

원래 이교도였다가 867년에 블라디미르Vladimir대제가 동방정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국가로 개종했다. 동유럽 종교와 문화에 영향을 주다가 1240년대에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사라졌다.


 

19세기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는 국가정체성을 키에프 루스로 정하고 러시아와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1240년 패망이후 키에프 루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민족이나 국가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몽골 킵차크 칸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Commonwealth의 변방이 되었다. 그래서 키에프 루스와 현대 우크라이나 사이를 이어주는 코사크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코사크족이 키에프 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모스크바공국(러시아 이전의 왕국)도 후손자격이 충분히 있다. 코사크족이 동방정교이듯이 모스크바공국도 동방정교이고 많은 키에프 루스 피난민이 모스크바공국으로 이주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의 바람과 달리 코사크족이 키에프 루스의 순수혈통이라고 할 수 없다.

 

코사크족의 기원에 대해 또 다른 주장이 있다. 남부와 동부에서 이주한 체르케스Circassian족(사진 참조)이 슬라브족과 혼합하고 동방정교로 개종했다는 주장이다. 몽골과 투르크족이 슬라브 노예와 혼합되면서 새로운 반야만족을 만들어냈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주장을 받아들이던 코사크족은 혼혈이며 3개의 제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폴란드, 러시아, 오스만 영토에서 지배층을 피해 스텝으로 달아난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했다. 노예와 농노에게는 천국과 같았고 자유와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선택했다.

초기 코사크 사회는 이질적이고 독립을 갈구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주변 제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코사크 사회는 동질적으로 변했고 러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처음의 구성 배경(자유와 독립)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코사크 사회는 중세 러시아의 농노와 귀족과 같이 일종의 신분(카스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코사크족은 전투를 벌이고 국경을 순찰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특수 신분집단으로 변했다. 코사크 소년은 어릴 때부터 이 목적을 위해 훈련받았고 코사크 여성은 남성이 집을 떠나면 가정과 농사를 책임지도록 교육받았다.

 

오스만 투르크도 예니체리Janissary와 맘루크Mamluk라는 코사크와 비슷한 군사전용 신분이 있었다. 예니체리는 1700년대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코사크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신분으로 코사크족을 구분한다면 민족에 대해서는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코사크족은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소수만이 우크라이나인으로 생각한다.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동방정교가 국교이며 문화도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이 역대로 가졌던 직업(용병), 그 직업을 위한 관습이나 제도로 러시아인과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