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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3부

by uesgi2003 2016. 6. 29.


다음 이야기부터 본격적인 30년 전쟁으로 들어갑니다만... 참조하고 있는 원서 자체가 혼란스러워서 갈피를 잡기 참 힘듭니다. 


계속 후회하는 중입니다.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3부


막시밀리안처럼 자제하며 집요한 사람이 훨씬 더 큰 위협이었다. 개신교는 그의 주장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정관 구역의 개신교 수천 명은 강제로 개종해야 되며 주변 지역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1552년 협정 당시와 달리 구교의 세력이 훨씬 공격적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귀족은 자신의 이익과도 부합되기 때문에 저항을 시작했다. 개신교가 이대로 쫓겨난다면 주교직과 교구를 작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다.

독일북부는 구교의 위험에서 안전했던 반면에, 구교의 심장에 박힌 쐐기와 같은 남부는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남부는 개신교의 최전선이었다. 한쪽은 구교의 바바리아,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밤베르크Bamberg였고 반대쪽은 구교의 라인Rhine, 모젤Moselle, 보름스Worms, 슈파이어Spires,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 슈바벤Swabia, 알사스Alsace, 프랑슈콩테Franche Comte였다.


 

아무래도 남부가 훨씬 적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북부는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는 루터교를 계속 유지했지만 팔츠Palatinate, 헤센-카셀Hesse Cassel, 바덴 두를라흐Baden-Durlach, 츠바이-브뤼켄Zwei-Brücken은 보다 엄격한 칼뱅주의Calvinism를 받아들였다.

독일의 칼뱅주의는 스코틀란드나 네덜란드와 달랐다. 귀족이 주도했기 때문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교리, 신념, 세력 모두 부족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협정에서 루터파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칼뱅주의는 루터파와 구교 모두에게 공격적이었다.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이 칼뱅파의 중심에 섰다. 팔츠선거후 프리드리히 4세(아래 그림)가 17세기 초의 칼뱅주의를 이끌어야 했지만 그는 주정뱅이에 무능력했고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게 내버려두었다.

크리스티안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 전략가였다. 이 계획이 막히면 곧바로 다른 계획을 준비했다. 그는 타고난 외교관으로 유럽의 주요 정치가와 직접 교신했다. 그는 영구적인 평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오스트리아 왕가(또는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를 없애지 않으면 반대로 개신교가 당한다고 생각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는 상대를 너무 얕잡아 보았다. 막시밀리안이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자금을 모으는 동안 크리스티안은 외교에 의존했다. 아무리 부패한 왕정이라도 다른 왕정으로 대체될 때까지는 집요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막시밀리안과 보수파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크리스티안이 원하는 정도로 개신교가 안전해 지려면 황제와 제국의회를 전복시켜야 했다. 제국전복에 성공한 다음에 일어날 독일의 무정부 상태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었다. 주교의 영지를 몰수하고 구교의 재산을 세속화한 다음에 대해서는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예전처럼 서로 반목하고 강자가 독식하는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었다.

 

1607, 남부 개신교에게 경보음이 울렸다. 개신교도가 절대다수인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 자유도시에서 수도원장이 연례 마르쿠스Markus 행렬을 진행하려고 했고 처음부터 돌과 진흙이 날아들었다.



제국대법원은 종교분쟁 이후에 유명무실해졌고 궁정재판소Imperial(Aulic) Council는 황제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궁정재판소는 합당한 재판없이 막시밀리안에게 도나우뵈르트 정리를 명령했고 그는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 점령한 후에 비용이 지불될 때까지 소유하겠다고 밝히고 개신교 교회를 구교에게 넘겼다.

파사우협정 위반이었지만 막시밀리안은 법집행이라고 강변했다.



구교와 신교 모두 축일 또는 장례 행렬을 가졌습니다. 




 

1607년 당시 제국대법원은 슈파이어에 있다가 1689년에 베츨라우어(바로 위 사진)로 옮겨진 후에 해산되었습니다. 영주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만든 대법원이었지만 판결까지 최대 수백 년이나 걸리기도 했습니다. 판결 하나에 내전이 벌어지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법을 빙자한 종교침탈은 심각한 반향을 일으켰다. 1608년 의회에서는 팔츠대표가 과세와 종교에 있어서 다수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원치 않으면 공동방어와 성직재산에 대한 어떤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1608514,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의 주도로 루터파와 칼뱅파가 모두 동의한 개신교연합Protestant Union이 구성되었다. 주로 남부의 귀족과 도시가 참여했으며 방어가 주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서로의 속마음은 상당히 달랐다.

 

구교연맹Catholic League도 막시밀리안의 주도 하에 뭉쳤다. 개신교연합에 위협을 느낀 주교와 수도원장 대부분이 참여했고 막시밀리안은 개신교연합과 다르게 행동을 통일시켰다. 구교연맹도 방어가 목적이었지만 상황이 허락하면 파사우협정 이후에 잃은 재산을 되찾기로 했다.

안할트는 다른 귀족과 상관없이 공세를 생각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왕가전복이 필연이라고 믿었고 손쉽게 구교를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구교연맹의 문장입니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개신교연합은 제대로 구성되지 못했다. 1609년 봄, 클레비스Cleves공이 죽었고 개신교인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선거후와 노이부르크Neuburg공의 아들이 후계자리를 주장했다. 황제에게 결정권한이 있다는 청원에 이어 구교군이 클레비스로 진군했다. 두 사람은 구교군에 공동대응을 하기로 했고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이 기회에 오랜 동안 계획했던 스페인과 동맹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암살당했고 미망인이 소규모 병력만 보내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합류시켰다.

 

두 사람의 주장을 조율하기 힘들었다. 노이부르크 아들은 나름 기발한 계획이라고 생각하고 선거후의 딸과 결혼할 수 있다고 말했다가 브란덴부르크선거후에게 얻어맞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욕을 당한 젊은이는 바로 개신교를 포기하고 스페인과 연합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거후는 루터파에서 칼뱅파로 바꾸었고 이전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독일국민은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바로 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3자 입장인 루터파는 양쪽 모두를 경계했다. 루터파 지도자인 작센선거후 요한 게오르크는 크리스타인이나 막시밀리안을 모두 같은 사람으로 취급했다. 가문의 전통, 제국과 오스트리아가문과의 인연을 끊지 못했고 반면에 개신교의 안전에 대해서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도 변화를 원했지만 최소한의 변화가 좋다고 판단했다. 1612, 그는 궁정재판소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구교와 신교의 수를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나우뵈르트의 경우처럼 시민의 권리가 봉쇄되는 처분을 막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요한 게오르크는 지도자 역량이 부족했다. 그는 폭음과 사냥에 몰두했고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실현할 힘이 없었다. 양쪽의 반대에 직면하자 그는 간단히 물러서서 방관했다.

1613, 제국의회가 소집되었지만 오히려 혼란만 일으켰고 이제 독일은 작은 불똥 하나만으로도 대폭발을 일으킬 정도까지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