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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보헤미아 봉기 1부

by uesgi2003 2016. 7. 1.


보통 외국인은 우리를 부를 때에 성을 부르는데, 축구경기 중계에서는 이 선수도 김이고 저 선수도 김인 경우가 많아서 무척 혼란스러워합니다. 


30년 전쟁이 난해한 이유는 쉴새없이 바뀌는 국경선도 있지만 황제의 재위기간이 워낙 짧고 이 사람도 막시밀리안과 페르디난트, 저 사람도 막시밀리안과 페르디난트이기 때문입니다. 


왼쪽이 후손이고 오른쪽이 조상입니다. 




보헤미아 봉기 1부

 

17세기 초, 오스트리아 왕가의 독일영지는 카를로스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황제 루돌프Rudolph 2세는 오스트리아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왕이기도 했다. 형 막시밀리안은 티롤을, 사촌인 페르디난트는 슈타이어Styria, 케른텐Carinthia, 크란스카Carniola를 통치했다.

오스트리아왕가는 구교도인 반면에 티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은 개신교도라는 것이 문제였다. 통치자와 신민의 생각이 달랐고 유력한 귀족이 개신교를 지원했기 때문에 정치분쟁은 종교분쟁으로 직결되었다.

페르디난트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분쟁을 봉합했지만 루돌프는 확실히 무능력했다. 그는 정신병이 악화되어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루돌프는 정치와 군사에서는 무능력했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은 높았습니다. 궁정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가 그린 초상화입니다.

 

1606, 루돌프는 오스만투르크와 평화협정을 끝내고 국내문제를 강경처리하기로 했다.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동생 마티아스Mattias가 아니었다면 오스트리아왕가는 그대로 끝날 수도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에 맞서 15년 동안 벌인 전쟁을 끝내고 국경선을 확립한 지트바토로크 협정입니다.


 

형 루돌프의 명령과 달리 오스만투르크 등과 평화협정을 끝낸 마티아스는 오스트리아왕가의 후계자로 부상했고 형을 프라하성에 감금하고 보헤미아왕위를 받아냈습니다.

황제가 된 그는 개신교와의 화해를 모색하다가 오스트리아왕가의 반발을 산 데다가 병까지 들어 결국 동생 막시밀리안 3세에게 밀려 페르디난트 2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다음 해인 1619년에 죽었습니다.

 

2년 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마티스에게 넘어갔고 보헤미아, 모라비아와 슐레지아는 루돌프가 죽을 때까지 통치했다.

 

루돌프의 오판으로 개신교 귀족은 힘을 더 얻었다. 헝가리에서는 오스만투르크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마티아스가 지역 시민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에서도 약간의 충돌 후에 절충안을 내놓았다. 보헤미아 의회는 모든 시민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왕실허가증Royal Charter을 받아냈다.

양심의 자유가 종교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사고는 구속받지 않았지만 교회건축이나 예배는 지역영주의 결정을 달렸다. 영주의 결정이 관건이었다.



영국 찰스 2세가 발행한 왕실허가증입니다. 

 

봉건귀족 1,400명과 42개 도시가 왕실허가증을 받았고 왕실영지만 제외되었다. 개신교 지주는 왕의 결정과 상관없이 구교성당 건축을 막을 수 있게 되어 사실상 종교자유가 허용되었다.

루돌프는 왕실허가를 무효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 여파로 1611년에 마티아스가 보헤미아왕위에 올랐고 1612년에 루돌프가 죽으면서 다시 황위에 올랐다.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은 황실과 개신교귀족 사이를 분열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는 왕실허가증이 보헤미아에 전달되기 전에 헝가리, 모라비아, 오스트리아와 슐레지아가 우리 편이기 때문에 보헤미아, 바바리아와 주교영지 몇 군데만 바꾼다면 오스트리아왕가는 무기력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가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성직자를 개신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바리아가 무력을 동원하는 즉시 우리도 바바리아를 쳐서 도나우뵈르트를 빼앗고 주교직 2~3개를 확보해서 군자금을 마련한다. 성공하면 황제도 법을 따르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마티아스의 영지는 진정되어 크리스티안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 마티아스도 왕실허가를 무효화시키려고 시도했다.

브라우나우Braunau 수도원장, 프라하 대주교, 흐로프Klostergrab 개신교 땅에 교회가 세워졌고 구교는 사용하지 못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고 개신교 귀족은 이 지역은 왕의 영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교회를 허물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고 마티아스는 반대편 주장을 했다.

마티아스는 자신의 영지에서 왕실허가를 무력화시킬 묘안을 찾아냈다. 그는 구교신부를 개신교교회로 보내 개신교가 구교예배를 보게 만들었다. 개신교 귀족은 바로 반발하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연로했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다음 왕은 개신교도를 선택하기로 했다. 팔츠선거후와 작센선거후 중에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30년 전쟁이 시작된 보헤미아왕국입니다. 현재의 체코 지역입니다. 

 

1617년 보헤미아 의회가 갑자기 소집되었고 보헤미아왕은 선출직이 아니라는 설명이 있었다. 마티아스 선출 전에는 왕위를 상속해왔고 마티아스 선출은 혼란기의 특수한 경우로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이 설명을 거부하면 두 명의 왕을 모시게 될 수도 있다는 위협도 곁들여졌다.

결국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왕위상속을 인정하고 선출을 포기했다.

 

페르디난트는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에 비해 신앙심이 더 깊은 반면에 정치력은 부족했지만 두 사람 모두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두 사람은 구교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법을 이용했다.

페르디난트는 용감했지만 분명한 결정이 가능할 때를 빼고는 문제가 저절로 풀릴 때까지 방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도 왕실허가를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예수회는 왕실허가를 준 것은 죄악이지만 이미 발효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지키는 것은 죄악이 아니라는 조언을 했다.

그는 왕위즉위식에서 양 옆의 귀족에게 양심의 가책없이 보헤미아 왕관을 써서 기쁘오라고 말했다.

 

보헤미아의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의회는 왕위상속을 인정했고 왕의 영지에서는 구교행렬이 당당하게 진행되었다. 브라우나우 개신교는 교회에서 몰려났고 흐로프 신축교회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16173월에 개신교 영지의 대표가 모였고 자리를 비운 마티아스에게 청원하기로 했는데 모든 처리가 정당하며 대표모임은 불법이라는 마티아스의 통보가 먼저 도착했다.

 

슬라바타Slawata와 마르티니츠Martinitz, 두 섭정의 농간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개신교 모임은 두 섭정을 처리하고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하기로 했다.

523일 오전 30년 전쟁의 첫 날이 밝았다. 귀족과 추종자들이 무기를 들고 두 섭정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약간의 몸싸움 뒤에 두 사람을 창문으로 끌고 갔다. 마르티니츠는 고해성사를 간청했지만 신에게 고해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20m 아래로 던져지자 예수님, 마리아님!’을 외쳤고 사람들이 네놈의 마리아가 도와주나 보자라고 비웃었다. 그 후에 슬라바타와 비서를 던졌는데 놀랍게도 세 사람은 경상만 입고 기어서 현장을 피했다



20m 높이는 아닐 것 같은데... 원자료가 70피트라고 하니 그대로 인용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