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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2부

by uesgi2003 2016. 6. 23.


1부에서도 설명했듯이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난감한 신성로마제국과 30년 전쟁입니다. 작정하고 커다란 지도 펼치고 사람 한 명과 사건 하나를 연결하면 모를까, 차라리 그냥 가볍게 흘러다는 것도 괜찮습니다. 


모리츠와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만 해도 몇 번을 엎치고 메칩니다.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배경 2부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소수의 의원과 외국인 군주의 지지를 받는 대다수 의원이 서로 반목하면서 내전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개신교도가 1552년에 승리를 거둬 파사우 협정Convention of Passau을 이끌어냈고 제국의회에서 후속조치를 다루기로 했다.


 

1531년 개신교 제후와 시민이 슈말칼덴에 모여 동맹Schmalkaldic League을 결의합니다.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원정 등으로 정신이 없는 사이에 1546년 선제공격을 하며 기세를 크게 올렸지만 카를 5세가 52,000명을 병력을 동원하고 개신교 제후와도 연합하여 전열을 붕괴시켰습니다.

포스터는 그 당시가 아니라 400주년을 기념하는 포스터입니다. 


 

결정적인 묄베르크전투입니다. 동맹의 리더 요한 프리드리히가 항복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협정에서 신교와 구교의 공존을 약속했다가 개신교도들에게 구교로 개종할 것을 압박하면서 다시 개신교 제후의 저항이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 앙리 2세가 개신교 편을 들었고 묄베르크전투에서 황제군에 섰던 작센선거후 모리츠Maurice가 군대를 이끌면서 황제군은 참패를 당해 파사우 협정을 맺고 개신교의 지위를 보장합니다.



모리츠(그림 참조)는 황제의 작센선거후 약속을 받아들여 슈말칼덴동맹에서 빠졌는데 황제가 신교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다가 동맹의 리더이자 장인인 작센 필리프공을 계속 감금하자 황제군을 대파하며 결국 장인을 구해냅니다.

모리츠는 (모리츠만큼이나 진영이 바뀐)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Albert Alcibiades와의 전투에서 겨우 30세의 나이로 전사합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 모인 제국의회(아래 그림 참조)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진행되었다. 지치고 쇠약해진 카를 5센느 동생 페르디난트Ferdinand(헝가리와 보헤미아왕)에게 일임하고 더 이상 간여하지 않았다.

개신교 제후는 파사우 협정에 앞서 영지의 구교회 재산을 몰수했고 더 이상 구교 성직자의 권위나 법을 존중하지 않아 새로운 불씨를 남겼다. 영주는 아직 건드리지 못한 교회의 재산을 계속 탐냈고 심지어 주교나 수도원장도 구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할 경우 내란은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파사우 협정은 많은 허점을 안고 있었다. 구교회는 빼앗긴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신교는 주교나 수도원장의 개종을 환영하며 개신교를 국교로 인정받고 싶었다. 구교는 교회령 유보Reservatum ecclesiasticum를 협정에 넣어 개종하는 주교와 수도원장은 다른 구교 성직자로 교체하게 만들었다.

협정 당시에는 양쪽이 모두 수용했지만 언제라도 분열될 소지가 많았다. 제국의회는 귀족과 선거후만 참석해 모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다른 계층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제국 국민 대부분이 믿는 개신교를 국교로 인정하지 않았고 종교자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귀족은 자신의 권리만 협의했기 때문에 독일국민은 협정문 어디에도 없었다.

 

파사우 협정 이전에 상당한 구교회 재산을 몰수한 데다가 교회령 유보 자체의 허점 때문에 독일북부는 개신교가 성직과 속세 모두를 장악했다. 원래 개신교인 교구에서는 개신교 주교를 선출해도 교회령 유보 위반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북부의 대형 주교직 8개가 개신교 주교로 바뀌었다. 실제 주교도 아니었다. 주교로 선출된 영주가 행정관Administrator라는 이름으로 영지의 종교와 내정을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영지의 시민은 개신교였기 때문에 이런 변화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주교직을 개신교가 장악한다면 제국의회의 구성도 바뀔 수 밖에 없고 개신교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반동이 있기 마련이다.

구교에서는 개신교 주교가 실제 주교가 아니기 때문에 주교 영지를 가질 수 없고 제국의회에 참석할 수도 없다고 반격했다.

 

신도의 반대, 이기적인 귀족과 종교이론의 충돌 속에서도 예수회는 세력을 늘려갔다. 구교는 무력과 신앙심을 앞세워 개신교에 대항했다. 주교와 수도원장은 시민에게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

쾰른 대주교가 결혼하고 개종하려다가 교회령 유보를 너무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어서 실패했고 스트라스부르크Strasburg에서는 개신교 주교를 선출했다가 바로 진압되었다. 마그데부르크의 개신교 주교는 제국의회에 입장하지도 못했다. 파사우 협정 후에 몰수된 수도원 4곳은 개신교에 불리한 판정이 내려졌다.  



예수회의 문장입니다. 1540년에 결성된 구교 수도회로 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회는 유럽 상인과 함께 진출했기 때문에 비교적 환영을 받았습니다. 



쾰른 대주교 헤르만Hermann은 개신교로 개종했다가 교황과 황제에게 소환되어 1546년에 파문당하고 은퇴했습니다. 그 후로 쾰른 대주교는 구교와 개신교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개신교 행정관과 개신교에게 넘어간 구교회 재산에 대한 분쟁이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구교측은 모든 것을 1552년 파사우 협정 당시로 돌려 놓고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신교측은 상황이 변했고 이미 한 세대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협정조항을 따지기 보다는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제국의회가 대다수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반영했다면 화해의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하면 구교도와 개신교도의 심각한 충돌은 없었다.



이쯤에서 독일 각 영주국의 위치와 종교에 대해 한 번 쯤은 봐두고 넘어가도록 하죠. 

 

바바리아Bavaria(지금의 바이에른)공 막시밀리안Maximilian(구교) 그리고 안할트Anhalt공 크리스티안Christian(개신교)이 등장하면서 독일은 급격한 내전상태로 빠져들었다. 작센Saxon공 요한 게오르크John George는 종교와 정치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막시밀리안은 구교측 속세 제후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뛰어난 행정관으로 오랜 기간 통치하면서 많은 자금을 축적하고 정예군대를 양성했다. 정치에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대단했다. 적에게서 바바리아공이 하는 일은 팔다리가 달려 있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의 계획이 일단 실행에 옮겨지면 저절로 풀려나간다는 칭찬이었다.



구교측 제후의 기둥이었던 막시밀리안입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예정입니다. 



개신교 제후동맹 결성을 이끈 크리스티안입니다. 역시 다음 이야기에 나오겠죠?



30년 전쟁 내내 종교와 경쟁국 사이에서 우유부단했던 요한 게오르크입니다. 30년 전쟁 설명에서 자주 등장할 겁니다. 



배경만 설명하다 보니 지루해서 30년 전쟁 당시의 스페인 테르시오 그림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아!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사족을 달면, 30년 전쟁은 순수하게 신교와 구교의 종교 충돌만은 아닙니다. 각 제후의 이익과 갈등도 큰 원인이었습니다. 진영을 계속 바꿨고 그래서 더 혼동의 카오스 (문화의 컬처 농담)로 빠져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