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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코사크의 역사 - 코사크의 고향, 스텝

by uesgi2003 2016. 7. 15.


혹시나 싶어서 사족을 달면, 코사크족의 역사를 정리한다고 해서 그들을 미화시키거나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코사크족은 자유를 찾아 황야에 정착한 선조와 달리 용병전문 부족사회로 발전했고 처음의 절대적인 피해자에서 야만적인 가해자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의 굴곡진 역사는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서 러시아의 무력확장과 독재권력의 앞잡이로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코사크의 역사 - 코사크의 고향, 스텝


코사크족은 유라시아 스텝에서 태어나고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했다. 그렇기 때문에 코사크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스텝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유라시아 스텝은 우크라이나(오데사Odessa항구)에서 시작되어 남부와 동부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산맥북부, 카스피해 북부를 거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어진다. 스텝은 북부의 얼어붙은 숲과 남쪽의 카스피해와 흑해 그리고 코카서스의 사막과 산맥 사이에 있다.

스텝은 낮게 흐르는 구릉의 초원지대이며 거대한 강이 흐른다. 코사크의 고향인 서부 스텝은 다뉴브강 계곡부터 크림반도 주변의 흑해 연안 평원과 아랄Aral해를 지나 돈강 계곡과 크림반도 동쪽의 쿠반Kuban지역, 돈강의 남쪽, 코카서스 산맥 밑까지를 말한다.



아무래도 지도를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겁니다. 코사크족은 러시아의 비호 속에 만주까지 진출합니다. 전쟁이 있는 곳이면 코사크가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죠. 

 

서부 스텝은 거대한 문명이 만나는 지역으로 충돌하고 교류하며 코사크족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원래는 몽골족, 투르크어 계열의 민족, 슬라브어 계열의 민족의 경계였다가 몽골족이 와해되고 투르크족은 러시아 공국에 밀려나거나 오스만 투르크제국에 흡수되었다.

오스만은 모든 수니파 무슬림의 맹주가 되었고 모스크바의 차르는 동방정교의 수장이 자임한 데다가 13세기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대공국(로마가톨릭)이 서쪽에 등장하면서 수백 년에 걸친 종교갈등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튜톤기사단Teutonic Knights 영토를 국민대부분은 동방정교나 유대교인이었다. 폴란드 계열이 지배층을 장악하면서 폴란드어와 가톨릭을 전면에 내세웠고 서부스텝 깊숙이 침투해 1500년대 유럽최대 국가로 성장했다.

2014-2015년 우크라이나 내전은, 동방정교 코사크 계열이 가톨릭 폴란드 계열과 벌인 현대판 내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모스크바공국을 침공해 모스크바에 꼭두각시 차르를 세울 정도로 강력했지만 다른 왕국처럼 중앙집권이 아닌 미숙한 입헌군주제로 진화해 귀족영주의 세력이 너무 컸고 1655~67년의 대홍수The Deluge로 완전히 붕괴하게 됩니다. 



대홍수는 스웨덴의 침공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러시아의 공세 그리고 코사크족의 대반란도 포함됩니다. 코사크족의 대반란은 다음 이야기에서 정리할 예정이고 스웨덴의 대홍수는 좀 더 뒤로 미뤄질 겁니다. 

 

러시아,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투르크가 충돌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백지역이 생겨났고 여기에 노예와 농노가 모여들어 자치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에 코사크 사회도 만들어졌다.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어 혼재하면서 현대 코사크의 전통, 의복과 도구도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카스피해 북부 해안의 스텝에는 러시아 슬라브, 투르크와 몽골의 노가이가 1500년대부터 1백년 동안 스텝을 놓고 충돌했었다.

결국 노가이 칸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봉신국인 크림 칸국의 봉신국이 되었다가 1634년에 러시아에게 합병되었다.



러시아 일대를 호령했던 킵차크 칸국은 많은 칸국으로 와해되었고 노가이 칸국을 비롯한 군소 칸국은 오스만 투르크 또는 러시아로 흡수됩니다. 



노가이 전사들입니다. 

 

러시아는 노가이 칸국의 문화잔재를 없애려고 했고 코사크족이 노가이 문화를 대거 흡수하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중에는 나기카Nagyka라는 독특한 채찍이 있다. 이것만큼 코사크인의 생활 깊숙이 파고든 것도 없는데 심지어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다.

코사크 소년은 첫 번째 무기로 나기카를 선물받았고 손잡이로 말을 몰았다. 채찍은 깊은 상처를 내기 때문에 말에게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채찍은 코사크 사브르Sabre검과 비슷하게 동작해서 검술훈련에도 도움이 되었다.

코사크 복장이나 무기를 보면 타 민족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코사크 검 샤슈카Shashka는 원래 코카스 산맥의 체르카스인이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코사크족의 상징처럼 되었다. 코사크의 모자인 파파카Papakha는 아스트라한 칸국의 것이었다.



폴란드 기병에게 나기카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나기카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현대 코사크군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샤슈카 검무를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가끔 지식이 부족한 철부지들이 코사크족의 남성 전통춤 (무릎과 발목을 이용한 뜀뛰기)을 비웃는데... 남성의 힘과 패기를 자랑하는 멋진 춤입니다. 




이왕 코사크족 문화를 소개한 김에 배경음악을 소개하겠습니다. 영어로는 이런 문구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이샤는 체첸 등의 다른 민족을 말한다는군요. 


Oysya you oysya, 
You do not worry, 
I will not touch you, 
you do not worry

And even asked the Cossack 

Truth for the people. 
It will be true on the ground - 
will and freedom

 

코사크는 러시아가 자포리지아Zaporizhia(황야, 황야스텝)라고 부르는 환경에 정착했다. 드니에페르Dnieper강 급류 남쪽의 자포리지아는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급류 때문에 병력을 실어 나르기 힘든 오지였다.

현재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드니프로페트롭스크Dnipropetrovsk, 자포리지아와 키로보흐라드 오블라스츠Kirovohrad Oblasts 지역이다. 남쪽의 무슬림 크림반도와 북쪽의 기독교 왕국 사이에서 코사크족이 출현했고 번창했다.

 

코사크족은 스텝을 공동체 사회 소유로 두었고 가족은 일정부분의 토지와 산출물을 사용할 권리를 가졌다. 코사크족은 다양한 이유로 농업을 기피했다. 조상이 수탈을 피해 달아난 농노와 농부였고 인접지역의 투르크 부족과 적에게서 용병이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업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다. 코사크 사회는 남녀를 완전히 구분했고 남성이 용병으로 집을 비우면 여성이 밭과 과수원을 돌봤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은 그렇게 혐오하던 노동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그들은 주로 사냥을 했는데 식량과 털가죽뿐만 아니라 다음 전투를 위한 훈련을 겸했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가축을 몰았는데 어린 코사크 소년에게는 전사로 자라는 귀중한 훈련이 되었다.

코사크 남성의 경제력은 대부분 전쟁이었다. 차르가 코사크 군대를 소환할 때면 급여를 지불했고 평상시에는 개별 부족이 주변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전쟁은 약탈로 이어졌고 코사크족은 약탈로 한몫을 챙겼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서유럽은 코사크병사에 대해 주머니마다 약탈한 시계를 가득 채우고 수염이 무성한 전사로 기록했다.

 

스텝생활은 말이 필수였고 4,000년 전부터 말을 길들였다. 스텝을 거쳐간 모든 제국의 경제와 군사력은 곧 말이었다.

코사크족의 돈(Don, 말의 종. 사진 참조)은 작고 몸통이 굵은 종으로 지구력이 좋고 추위에 강하고 눈을 뒤져 풀을 찾을 정도로 자생력이 강하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코사크 기병의 전술과 승마술에 대해 가소롭게 생각했지만 돈의 강인함에는 감탄했다.

1812, 코사크 기병이 얼음이 떠 있는 강에 뛰어 들어 반대편의 프랑스군에게 달려들었는데 프랑스군은 흉내를 낼 수도 없는 장면이었다.



코사크족은 우리가 예상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강을 건넜군요. 그러니 추운겨울에도 건너편 적을 바로 공격할 수 있었을겁니다. 죽어나는 것은 말입니다만.


 

돈은 서부 스텝의 고대종을 몽골과 페르시아종과 교배시켜 나온 것으로 크기나 아름다움이 아닌 스텝에 최적화시켰다. 러시아군도 19세기에 유럽종은 퍼레이드나 의식용으로만 사용하고 돈을 실전용으로 사용했다.

코사크족은 몽골족의 장점인 기동력을 최대한 받아들였다. 몽골군처럼 평소에는 작은 단위로 정찰, 교전, 약탈, 파괴하다가 결전의 순간에는 순식간에 집결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폴란드 전역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는데 한겨울에 나폴레옹의 대육군의 전선을 축소시키고 광범위한 정찰로 정보를 수집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 후에 코사크기병 10,000기만 있었다면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