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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코사크의 역사 - 자포리자 코사크

by uesgi2003 2016. 7. 21.


코사크족 역사를 정리하다가 그들이 등장하는 마운드 앤 블레이드 게임에 다시 빠져서 며칠째 밤새우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신성로마제국과 30년 전쟁은 미궁 속으로 사라지겠군요. 


코사크족에 대한 책을 두 권 참조하다 보니 좀 갈팡질팡합니다. 한 권은 너무 축약되어 있고 다른 한 권은 너무 장황해서 두 자료 사이에서 제가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제 기원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코사크 전사의 이야기가 시작되어 정리하는 맛이 나는군요.


코사크의 역사 - 자포리자 코사크


코사크의 삶은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처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적에게서 교훈을 얻은 적자생존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의 로마가톨릭보다는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은 리투아니아대공과 폴란드왕이 연합했고 1569년 이후에는 대국회Grand Sejm(그림 참조)로 정부를 통일했다. 연방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을 합병했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국가였다.

연방은 대국회의 권한이 막강했고 군주를 선출했고 로마가톨릭이 국교인데도 동방정교와 유대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다.


 

코사크 영토는 워낙 먼 외곽에 있어서 연방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흑해를 통해 지중해와 오스만 투르크로 접근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였다. 드니에페르강 하류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봉신국인 크림 칸국이 노리고 있어서 연방의 위협이 되었다.

1571, 오스만과 크림 칸의 세력은 절정에 이르러 5월에는 모스크바를 불태웠고 제국군은 베네치아의 키프러스Cyprus를 점령하고 지중해 전역을 위협했다. 10월에 스페인-베네치아-교황 연합함대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군을 퀘멸시키면서 위협에서 벗어났다. 


 

오스만군은 251척 중 187척을 잃어 해군이 궤멸되었지만 제국자체가 무너질 정도의 피해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해군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정리해두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524

http://blog.daum.net/uesgi2003/526

http://blog.daum.net/uesgi2003/527

 

연방은 계속 증가하는 코사크족을 이용해 크림 칸과 오스만 제국에게서 드니에페르 평원을 방어하고 싶었다. 연방은 카니프Kaniv, 체르카시Cherkasy, 비니치아Vinnytsia, 크밀니크Khmilnyk, 브라츨라프Bratslav, 드니에페르와 부그강 요충지에 요새를 지었다.


 

제가 즐기는 Mount & Blade with fire & sword에서 지겹게 본 요새들이군요. 참 잘 만든 게임입니다. 이 지역에 코사크 국가지역입니다.

폴란드 지역을 합병하면 폴란드 후사르, 스웨덴 지역을 합병하면 스웨덴 라이터를 얻게 되는데 거의 무적기병이죠.

 

폴란드의 치솟는 곡물가격도 한 몫을 했다. 지역 귀족이 영지를 합병하면서 많은 농부가 이주했다. 귀족이 개종을 강요하면서 농부가 서쪽 스텝으로 달아나 새 요새 부근에 새로운 정착지를 마련했다.

정착지 수가 늘어나자 폴란드왕은 30년의 면세와 자유민 신분을 보장하는 대신에 크림 칸국에 대한 견제를 요구했다. 폴란드왕의 제안으로 처음에는 300명에 불과했던 코사크족은 8,000명까지 불어났다.

1578, 모스크바공국, 스웨덴과 오스만제국의 위협을 받은 스테판 바토리Stephen Bathory왕은 코사크족의 수를 크게 늘리고 지도자 선출과 자치권을 인정했다.


 

스테판 바토리는 연방의 마지막 절정기였습니다. 그는 차르 표트르 1세를 후계자로 받아들여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연방이라는 초강대국 건설을 꿈꾸다가 급사했습니다.


 

프슈코프를 포위하던 바토리가 이반 4세의 조약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코사크족의 확장은 양날의 검이었다. 코사크족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두 나라에 코사크 지역을 더해 3국 체제로 만들어서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고 했다. 당연히 두 나라의 지도자는 코사크족의 영토와 역할확장은 지원하면서도 자치권 확대는 반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톨릭 귀족이 국내의 동방정교를 억제하면서 동방정교의 수호자를 자처라는 코사크족과 종교갈등을 일으킨 데다가 새로운 영지를 찾아 드니에페르 평원까지 탐을 냈다. 연방의 왕은 영지와 그 지역의 거주민까지 모두 귀족의 소유로 인정하는 결정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정치, 종교와 경제갈등이 겹치면서 코사크족은 1591~1593년의 코신스키Kosinski 반란을 시작으로 연거푸 연방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크시슈토프 코신스키Krzysztof Kosinski는 지방의 루터파 귀족에 대항해 두 번의 반란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연방 남부로 반란이 확대되었다.




 

전력이 대폭 보강된 코사크족이 크림, 몰다비아 등의 오스만 제국영토를 계속 침범하자 오스만 제국은 연방을 위협하며 코사크족 단속을 요구합니다. 연방은 둥록 코사크군Rgistered Cossacks의 약탈을 금지시켜 큰 불씨를 남겼습니다.

1591, 등록 코사크군 대령이었던 코신스키는 지역 귀족에게 영지를 빼앗겼고 연대를 동원해 영지를 되찾고 아예 헤트만Hetman(코사크족 사령관 또는 족장)을 자임하며 연방에 대한 저항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받은 코신스키는 친 폴란드 진영과 15932월 피아테크Piatek에서 결전을 벌였다가 포로가 되었고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납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맹세를 깨고 자포리자Zaphorizia로 달아난 후에 모스크바 공국 차르에게 충성서약을 하고 친 폴란드 요새를 공격하다가 전사합니다. 술에 취해 결투를 벌이다가 죽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나머지 반란군은 충성서약 후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1594~96, 세베린 날리바이코Severyn Nalyvaiko의 반란이 이어졌다. 심각한 내전으로 드니에페르 계곡은 잿더미로 변했고 진압과정에서 많은 코사크족이 연방과 모스크바 공국의 중립지대인 자포리자 시치Sich(지도 참조)라는 남동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코사크족의 중앙무대는 이제 연방이 지배하는 드니에페르강 평원에서 자포리자 시치라는 황무지 스텝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자치권을 얻은 코사크족은 연방과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1625년까지 힘과 명성을 키웠다. 이렇게 해서 자포리자 코사크가 탄생했고 코사크족의 전설적인 무훈이 시작되었다.


 

자포리자 코사크족은 헤트만이라는 총사령관을 선출했는데 1918년 최초의 우크라이나공화국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독립 외교정책을 세우고 연방의 허락없이 적의 영토를 습격하고 조약을 체결했다.

코사크족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한 신성동맹Holy League에 동참했고 해군을 조직해 오스만 제국의 연안을 약탈했다.




코사크족의 대담한 해적질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77 에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1618, 헤트만 코나슈에비치-사하이다츠니Konashevych-Sahaidachny(사진 참조)1만 명의 코사크를 이끌고 연방을 지원해 모스크바 공국을 상대했다가 교틴Khotyn(또는 호틴Hotin)전투에서 연방을 위기에서 구했다.





 

15만 명의 오스만 투르크군을 상대로 절반에 불과한 연방-코사크 연합군은 전술적 승리를 차지합니다.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오스만 2세는 더 이상의 침공을 단념하고 교틴조약을 맺었고 연방은 오스만 제국의 국경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오스만 2세는 제국군의 핵심인 예니체리의 개혁을 단행하다가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죽었고 코나수에비치도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결국 죽고 맙니다.

 

이 정도로 세력이 확장된 코사크족 헤트만은 코사크 행정기구를 정착시키고 동방정교 키에프 루스 공국의 후예를 자처했다.


귀여운(?) 코사크족과 플라모델입니다. 플라모델은 동방정교 신부도 재현해두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