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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보헤미아 봉기 2부

by uesgi2003 2016. 8. 22.


이렇게 헷갈리고 재미없는 신성로마제국과 30년 전쟁을 과연 기다리는 분이 있을까 싶었는데 한 분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어차피 국내에 좀처럼 소개되지 않는 역사를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 제 서재를 열었기 때문에 이리 저리 딴 길로 새더라도 제대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코사크족의 역사도 끝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동안은 30년 전쟁에 치중할 생각입니다. 너무 지루하면 상대적으로 손쉬운 2차대전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성만 부르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할 때에 이사람도 김씨고 저사람도 이씨여서 헷갈려하는데, 30년 전쟁에서도 이 사람도 페르디난트고 저 사람도 프리드리히여서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최소한 보헤미아 봉기 1부는 다시 읽고 흐름을 떠올려야겠죠?


http://blog.daum.net/uesgi2003/1056


후회하고 있는 중인 30년 전쟁 -  보헤미아 봉기 2부


이렇게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혁명이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30명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예수회를 보헤미아에서 추방했다. 의회를 소집해서 징병으로 군대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지만 군자금이 필요했고 기존의 세금으로는 부족했다. 대출을 받는 동시에 각 도시가 부족액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도 귀족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도시는 당연히 거부했고 새로운 세금은 걷히지 않았고 징병과 모병은 지지부진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새로 선출된 지도자들과 뜻을 함께 한다고 말했지만 보헤미아의 봉기는 심각한 문제거리였다. 그는 불이 꺼지도록 도울 것이오라는 엉뚱한 말을 했다.

드레스덴보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도움이 컸다. 프리드리히 4세는 1610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5세는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영국 제임스 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국제무대에 등장했는데 보헤미아의 봉기를 격려했지만 당분간은 힘을 보태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보헤미아는 자력으로 전쟁을 치뤄야 했다. 페르디난트가 헝가리왕에 오르고 빈에 돌아오자 14,000명을 모은 후에 네덜란드에서 명성이 높았던 부쿠오이Bucquoi에게 맡겨 1618813일에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보헤미아의 두 구교 도시인 체스케부데요비체Budweis와 플젠Pilsen은 바로 군주편을 들었고 보헤미아는 체스케부데요비체 공격을 명령했다.

마티아스의 군대가 움직이자 보헤미아 지도자회는 의회에게 세금을 새로 징수하고 정규군 외에 대대적인 징병을 바로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의회는 징병에 대해 순순히 동의했지만 세금징수에 대해서는 일부러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토의자체가 무산되었다. 830, 보헤미아 귀족계급은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



표시지점이 플젠이고 체스케부데요비체는 남동쪽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헤미아가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 가문에 적대적인 왕가가 상당히 많았고 사부아Savoy공 카를로 에마누엘레Charles Emmanuel도 스페인과 전쟁 직전이었다. 그는 개신교동맹과 조약을 맺고 2,000명을 지원했다.

만스펠트의 에르네스트Ernest of Mansfeld가 지휘를 맡았는데 그는 스페인을 위해 복무하다가 개종하고 신교진영을 선택했다. 그는 용감하고 적극적이며 용병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용병의 약탈을 일부러 통제하지 않아 악명이 높았고 군지휘관이라기 보다는 탐험대장이 더 어울렸다.



15세기 후반기의 사부아공국 위치입니다. 18세기 후반기에는 사르데냐왕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만스펠트의 에르네스트입니다. 30년 전쟁 초반, 개신교동맹의 주역이었다가 1626년 말에 병사했습니다. 

 

만스펠트는 보헤미아에 도착하자 마자 플젠을 포위했고 진드리히 마티아스 트런Jindřich Matyáš Thurn은 부쿠오이를 막는데 주력했다. 보헤미아는 군자금을 모으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부자에게서 대출을 받아 작은 원정대 정도만 만들었다.

그래도 원정대가 주효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지원은 크지 않은 데다가 도착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고 신중한 막시밀리안은 좀처럼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도를 정하지 않던 슐레지아Silesia가 보헤미아 편을 들어 11월 초에 응원군을 보내자 부쿠오이는 체스케부데요비체로 후퇴했다.

1121, 플젠이 만스펠트에게 항복했고 추운 겨울이 닥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굶주린 군대는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했고 죄없는 농부가 용병의 약탈, 파괴와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다. 부쿠오이의 헝가리군이 가장 악랄했다.



트런은 1629년 패전 후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추방되었습니다. 다시 스웨덴군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다 포로가 되었고 1633년에 병사했습니다. 

 

보헤미안 지도자들은 프리드리히 5세의 즉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유부단한 프리드리히는 황제 편을 들어 바바리아, 멘츠, 작센과의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말하고는 다른 한편에서는 사부아공에게 독일 내 오스트리아가문 영지를 함께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9월에 모인 신교동맹은 보헤미아의 움직임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은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조금도 알려주지 않았다.

반대로 사부아공은 마치 오스트리아 영지를 이미 장악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16188, 그는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왕위즉위에 동의했고 16192월에는 보헤미아를 자신이 통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에게는 알사스와 슈바벤을 주겠다고 했다.

세상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반가운 소리였고 보수적이고 온화한 보헤미아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소리였다.

 

신교동맹의 도움은 보헤미아에게 오히려 해가 되었고 다른 왕가와 영주의 도움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더 많은 병력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국내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영국의 제임스왕은 다른 국가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다가 스페인의 움직임에 자극 받아 보헤미아와 황제 사이를 중재하기 시작했다.

 

1619320, 두 번째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마티아스가 죽었다. 페르디난트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보헤미아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네덜란드에서 군자금 지원이 있었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군자금과 무기지원을 해준 덕분에 트런과 만스펠트가 전장에 나설 수 있었다.

만스펠트는 부쿠오이를 견제했고 트런은 보헤미아와 상관없는 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별 어려움 없이 모라비아를 뒤흔든 후에 65일에는 빈 성벽까지 도착했다. 빈에 갇힌 페르디난트는 겨우 300명의 수비대 밖에 없었고 최대한 지원병을 끌어 모았다.

트런은 성안의 동조자가 성문을 열여 줄 것으로 기대하고 오스트리아 귀족과 협상을 벌이느라 귀중한 시간을 흘려 보냈다. 오스트리아 고지대와 저지대의 영지는 대부분 개신교도였고 마티아스의 사망 후에 페르디난트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저지대는 보헤미아와 연합하라고 빈에 사절을 보낼 정도였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안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오스트리아 영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고 보헤미아와의 연합에 서명하지 않았다. 압박수위는 점차 강해져서 그를 폐위시키고 자식을 개신교도로 키우겠다는 협박까지 나왔다.

바로 이 순간에 궁정에는 트럼펫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트런이 방심한 사이에 기병연대가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페르디난트를 호위했다. 저지대 사절단은 처벌을 피해 슬그머니 사라졌다.

기병연대가 합류했다고 해도 트런의 병력이 압도적이었지만 그는 군량과 공성무기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성안의 호응을 계속 기다리다가 결국 보헤미아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동안 보헤미아의 사정이 크게 변했다. 부쿠오이가 포위망을 풀고 만스펠트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황위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중용하고 개신교동맹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개신교동맹은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위기에서 벗어난 페르디난트는 더 이상 빈에서 실갱이를 벌이지 않고 새황제가 선출되는 프랑크프루트로 달려가기로 했다. 독일 개신교도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만약 그가 프랑크푸르크로 가서 왕관을 머리에 쓴다면 마티아스보다도 더 강력한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작센의 게오르그는 1612년에 그랬던 것처럼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헤미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선출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세 명의 개신교 선거후가 지지한다면 페르디난트의 선출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북쪽의 루터파와 남쪽의 칼뱅파가 공동전선을 펴는 엄청난 효과도 있었다.

 

그렇지만 프리드리히는 의견이 달랐고 게오르그는 분통을 터트리며 페르디난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프리드리히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1619828, 페르디난트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2세로 불렸다.



2일 전에는 프라하Prague에서 다른 선거가 있었는데 페르디난트를 폐위시킨 보헤미아가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선출했다. 왕위에 대해 프리드리히 측근의 의견은 찬반으로 갈렸다. 개신교 동맹과 고문은 반대입장이었고 그의 가족도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반대로 아내 엘리자베스는 왕위를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고민하던 프리드리히는 왕위가 신의 뜻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가 웅장한 성을 나서자 어머니는 몹시 슬퍼하며 아들이 팔츠를 보헤미아로 가져가는구나라고 말했다.

114,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서 왕위에 올랐고 보헤미아 봉기는 이렇게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