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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황제군의 승리

by uesgi2003 2016. 8. 23.


지루한 배경설명을 끝내고 본격적인 대결로 들어서니 그럭 저럭 재미있어지는군요. 아무래도 전설적인 지휘관과 전투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으로 바꾸었습니다. 



재미를 붙이는 30년 전쟁 -  황제군의 승리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은 반대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황은 그 귀족이 미궁 속에 발을 들여 놓았군요. 그는 한 계절만 왕위에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예수회는 여름 작전이 끝나면 프리드리히가 끝날 것으로 확신했다.

보헤미아 봉기는 자체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지만 귀족이 다른 영지를 차지하게 되면 다른 영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그때까지 잘 지탱해온 기초를 무너트리고 말았다.

 

막시밀리안은 새 황제와 만난 자리에서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실수를 기회로 이용해 대의와익 모두를 노렸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프리드리히의 권리를 자신에게 줄 것과 전쟁비용을 모두 지불받을 때까지 고지대Upper 오스트리아를 담보로 가지고 있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적당한 용어가 없어서 고지대 오스트리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위가 Upper, 아래가 저지대 Lower 오스트리아입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던 페르디난트는 전후사정을 가릴 여유가 없었고 막시밀리안을 동원해 공세에 나섰다. 막시밀리안은 우선 독일 개신교를 무력화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보헤미아는 그 다음 문제였다. 페르디난트는 헝가리의 20%만 소유했고 나머지는 오스만 투르크와 트란실바니아의 개신교 귀족인 베슬렌 가블러Bethlen Gabor가 통치하고 있었다.

가블러는 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까지 넘보고 있었다. 111, 그의 군대는 보헤미아와 동맹을 맺고 빈의 성벽 주변을 약탈했다. 트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병력으로는 빈을 점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기독교 문명에 대한 모욕으로 이슬람 반달 깃발을 남겨두었다.



독특한 머리모양의 가블러입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원을 받아 그는 헝가리 왕위에 오릅니다. 


 

독일 개신교도는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통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뉘렘베르크Nuremberg의 개신교동맹 회의에서도 프리드리히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분열한 동맹을 건드리지 않고 작센 선거후와 독일북부 영주를 처리하기로 했다.

요한 게오르그는 경쟁자 프리드리히의 세력확대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무기력했던 프리드리히가 황제와 맞먹는 지위가 되었고 이미 가지고 있던 팔츠에 보헤미아까지 합병한다면 제국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이 될 뿐만 아니라 황제선거에서도 두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게오르그는 프리드리히 다음의 2인자로 전락할 판이었다.

 

때마침 구교의 움직임이 게오르그를 도와주었다. 16203월의 구교연합 회의에서 개신교 행정관이나 북부귀족이 황제에게 충성한다면 무력으로 영지를 회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도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5월에는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있던 스피놀라Spinola에게 페르디난트를 구원하라고 명령했고 스페인의 진군에 놀란 개신교동맹은 63일에 Ulm 조약을 맺고 구교연합에 대해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막시밀리안은 이제 보헤미아로 진군하며 개신교동맹을 공격할 생각이었고 동맹도 공격을 받으면 방어할 생각이었다.

 

왈롱 틸리Walloon Tilly가 막시밀리안군을 이끌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난 지휘관으로 623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고 820일에는 고지대 오스트리아가 페르디난트에게 무조건 충성을 맹세했다. 저지대 오스트리아는 이미 복종을 맹세한 후였다. 게오르그는 황제의 이름을 빌어 비우첸Bautzen을 포위했고 스피놀라는 라인강을 따라 진군하다가 8월 말에는 멘츠에 도착했다.


 

암브로기오 스피놀라Ambrogio Spinola는 제노바 출신으로 30년 동안 스페인을 위해 전장에서 살았던 당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630, 전장에서 병사했는데 죽어가면서도 명예와 명성을 되뇌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그의 문장입니다.


 


동맹군도 스페인군에 맞서기 위해 출전했지만 전략전술에 이견이 많았고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스피놀라는 도시를 하나씩 점령하며 라인강 왼쪽 강변에 있는 팔츠를 위협했다. 동맹군은 무기력하게 보름스Worms로 퇴각한 후에 황제군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보름스의 위치입니다. 이제 독일이 주 전장이 되기 때문에 주요 도시 위치를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이제 막시밀리안이 보헤미아를 공격할 차례가 되었다. 그는 부쿠오이와 전선을 연결했고 프리드리히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아들이었는데 아들은 라인의 루퍼트공Prince Rupert으로 영국내전에서 왕당파를 이끌며 전사에 이름을 남겼다.



전설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루퍼트공입니다. 실제로 예술가로 설명된 자료가 많은데 아래는 그의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아들 루퍼트를 어릴 때부터 전선에 대동하고 다녔는데 조기교육 덕분인지 대단한 지휘관으로 성장했습니다. 영국내전과 루퍼트공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384 그는 과학과 미술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보헤미아는 프리드리히의 세력보다는 개인적인 친분과 영향력 때문에 왕으로 선택했었다. 그를 선택하면 유럽전역의 개신교 영주에게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는데 실제로는 외부의 도움이 거의 없었고 황제군이 보헤미아로 몰려드는데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측근도 열정이나 재능이 없었다. 안할트의 크리스티안은 용감한 지휘관이었지만 확신이나 사기를 올리지 못했다. 다른 지휘관은 적보다 자신의 대우에 더 관심이 많았다. 대대적인 징병을 벌여도 많은 농민이 거부하거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탈영했다. 남은 병사도 굶주림을 못이기고 폭동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프리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영국사절과 식사를 하는 동안 황제군이 들이닥쳤고 그는 독일북부를 통해 헤이그Hague까지 달아났다.

보헤미아 귀족정은 이렇게 무너졌고 틸리는 지도자들이 달아날 수 있게 일부러 시간을 끌며 배려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적대감에 사로잡혀 달아나지 않았고 처형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독일과 구교 귀족이 들어와 교회를 구교로 개종시켰다. 왕실허가가 아직 무효화되지 않았는데도 도시와 왕실영지의 개신교 교회는 정복자의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이었다.

루터파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프라하 점령 후에 20명의 귀족을 처형하고 있습니다. 

 

페르디난트와 막시밀리안은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프리드리히가 범법자였기 때문에 반드시 붙잡아서 처벌해야 했다. 그대로 둘 경우 되돌아와서 또 소요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전쟁비용도 큰 문제였다. 페르디난트는 막시밀리안에게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었고 고지대 오스트리아를 담보로 둔 상태였다. 막시밀리안에게 팔츠 일부를 넘긴다면 전쟁비용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선거후 지위도 그에게 넘긴다면 구교체계를 보다 강화시킬 수 있었다.

1620122, 프리드리히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영지와 지위를 몰수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분쟁을 가져왔다. 페르디난트는 황제로 선출될 때에 어떤 누구도 정당한 재판없이 추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유죄가 워낙 분명하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세상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독일은 프리드리히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개신교 국가가 구교에 합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