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의 경우에는 고리타분한 지휘관때문에 수 많은 목숨이 무의미하게 사라졌습니다. 무능력의 극치로 알려진 파스샹달전투의 결과가 다를 수 있었다는군요.
무의미와 유의미의 사이, 파스샹달Passchendaele전투 (1917년)
이프레스Ypres 3차전 (파스샹달전투)는 지난 100년 동안 1차세계대전의 무모한 희생과 공포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다. 솜Somme이나 베르덩Verdun전투도 파스샹달전투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다. 영국과 영연방군은 고집불통의 지휘관 때문에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과 진흙에서 무의미한 전투를 벌였다.
역사가 AJP 테일러Talyor는 맹목적인 전쟁에서 가장 맹목적인 학살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역사가도 이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프레스 3차전을 이렇게 알고 흘려 버릴 수는 없다. 100년이 된 지금 이 전투를 되돌아보고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진흙과 멍청이의 전투가 아니었으며, 특히 1917년 9월 20일~10월 4일까지의 기간은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말이다.
프랑스군의 춘계공세 이전의 전선상황입니다.
파르샹달전투는 서부전선의 영국과 프랑스군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1917년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춘계공세(니벨공세Nivelle Offensive)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는데 4~5월에는 프랑스군이 명령불복종과 탈영을 일으킬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프랑스군이 투입한 생샤망St. Chamond전차입니다. 당시 전차로는 무척 빠른 시속 12km 속도에 75mm 포와 기관총 4정을 장착해 그림과 같은 대활약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아래 그림과 같이 주행중 주저 앉거나 노획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9m의 길이에 비해 궤도가 너무 짧아 험지를 돌파하는데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전차병은 절대로 타고 싶지 않은 전차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전차를 처음 본 순간에 패전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전차의 성능이 막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물자부족에 빈사상태인 독일과 달리 영프 연합국의 풍부한 물량을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엔주Aisne 2차전 후에 프랑스군의 대대적인 명령불복종이 일어났습니다. 지휘부는 48시간 안에 결정적인 승리를 장담하며 병사들을 몰아세웠지만 첫날에만 35,000명이 전사하자 분위기가 무척 험악해졌습니다. 27,000명이 탈영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정부는 급하게 페탕Petin에게 사태해결을 맡겼고 페탕은 자살공격중단과 군법회부의 당근과 채찍 방법으로 진압했습니다. 55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대부분 석방되었습니다.
아래는 솜전투 장면입니다. 명령불복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랑스군이 무의미한 작전중단, 더 나은 대우와 휴가를 요구하자 더글라스 헤이그Douglas Haig사령관의 영국원정군BEF가 나머지 공세를 이어가야 했다. 헤이그는 영국군을 북부 플랑드르Flanders에 집결시킨 후에 해안을 따라 루셀라레Roulers의 철로요충지로 진격하면서 영불해협에 큰 위협이 되고 있는 독일 U보트 기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런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31일, 휴버트 고프Hubert Gough가 지휘하는 영국 5군이 공세에 나섰다. 초기 공격은 전체전선에서 약 3km 정도를 전진하는 성공을 거뒀지만 고프의 우측에 있는 겔루벨Gheluvelt 평원의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 고지는 이프레스를 내려다보는 요충지였다.
독일예비대 아인그리프Eingrief사단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영국군을 밀어냈고 오후내내 격전이 벌어졌다. 1917년 독일의 방어전술이었다. 연합군의 포격이 쏟아지면 전방참호를 비우고 후방 안전한 곳에 머물다가 곧바로 반격에 나서 적을 몰아내고 참호를 되찾는 전술이었다. 7월 31일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반격전용 전력인 아인그라프사단은 1917년 봄의 아라스전투부터 도입되었습니다. 전선을 줄이고 동부전선 병력을 이동시켜 1917년에만 40개 사단을 편성했습니다. 이전의 돌격사단이나 구원사단과 혼동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헤이그의 기대와 달리 공세는 더 이상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영국군 전사자는 31,000명 이상이었고 오후부터 쏟아진 비가 며칠 동안 계속되는 이상기후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영국초급장교 AH 로버츠Roberts는 “끔찍한 날씨다. 올해 들어 최악이다. 포격 외에는 모든 것이 멈췄다”고 기록했다.
고프는 8월 16일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지만 희망이 없는 작전이었다. 전장은 진흙탕이 보급이 중단되었고 보병은 진흙 위에 놓은 깔판을 따라 위험하게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탈진했다.
재공세 시작 직후의 랑게마르크Langemarck전투 결과는 참담했다. 15,000명을 잃었는데도 전략요충지는 고사하고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
참호도 물이 차서 부상자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익사하거나 쥐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시체때문에 쥐가 엄청났다고 합니다.
고프는 랑게마르크 실패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8월 내내 소규모 공격을 직접 지시했다. 죄없는 보병은 독일의 벙커와 참호를 하나씩 점령하고 진흙 위로 야포와 탄약을 옮기느라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충분한 사전준비와 측면지원 없이 대대병력이 무작정 앞으로 뛰어 나갔고 지휘관은 도박에 가까운 기대만으로 병사의 목숨을 걸었다.
종군기자 필립 깁스Philip Gibbs는 랑게마르크전투를 지켜본 후에 오만한 참모작전 때문에 병사들만 희생당했으며 고프의 5군은 비효율의 극치라고 비꼬았다.
메인 참호는 이렇게 쾌적(?)합니다만... 깨알같이 찬조출연한 쥐입니다.
참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렇죠.
플랑드르에서 대규모 돌파한다는 헤이그의 계획은 원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8월 말, 헤이그도 어쩔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 그는 영국 2군 지휘관 허버트 플러머Herbert Plumer에게 겔루벨 평원 공격지휘를 넘겼다.
독일 수비선 깊숙이 돌파하려던 고프와 달리, 플러머는 매우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전선을 다지며 조금씩 전진하는 전술을 선호했다. 압도적인 화력과 철저한 사전준비와 함께 한 번에 1.5km 이상은 전진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모든 야포를 동원하고 3주 동안 공격준비를 했다. 재공세는 1917년 9월 20일로 결정되었다.
이프레스 3차전에서 결정적인 장면이 시작되었다. 메닌 로드Menin Road전투는 7월과 8월의 진흙탕 학살극과 완전히 달랐다. 더운 날씨가 이어져서 진흙이 굳었고 오스트레일리아 2개 사단이 독일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나머지 공격도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7월 31일 공세보다 2배나 많은 화력을 등에 엎은 영국군은 공포에 질려 전의를 상실한 독일군을 밀어냈다. 7 오스트레일리아대대의 알렉산더 홀리호크Alexander Hollyhoke중위는 “포화, 먼지와 연기가 벽을 만들었다… 곳곳에서 포화나 총상을 입은 독일군 시체가 보였다. 겁에 질린 포로가 무리를 지어 나오기 시작했고 포화구덩이에서 엎드려 있다가 후방으로 보내졌다”고 기록했다.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던 독일의 방어전술은 거꾸로 독이 되었다. 고프의 7/8월 공세는 병력을 최대한 빨리 전진시키려 했지만 플러머는 목표거리를 제한해서 병력의 탈진을 막고 좌우 병력이 서로를 응원할 수 있게 했다.
독일군은 아인그라프사단 3개를 바로 투입했다가 오히려 함정이 빠졌다. 전장 위에 떠있던 정찰기가 주는 정보에 따라 독일사단의 집결지와 접근경로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아인그라프사단이 포격을 맞아가며 접근해도 영국군은 이미 참호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반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플러머의 공세는 시작에 불과했다. 6일 후, 폴리곤Polygon숲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고 메닌 로드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다시 한번,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아군의 포격엄호를 받으며 전진해 계획대로 목표물을 점령했다. 그리고는 독일의 반격을 기다렸다.
이제는 반대로 독일군이 포화와 기관총탄에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무의미하게 쓰러져갔다. “집채만한 흙, 금속조각과 바위가 사방에서 솟아 올랐다”는 독일연대기록이 남아 있다. “투명거인의 주먹이 잔인하게 모든 것을 두들기고 납작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살아 남은 병사는 엄청난 화염벽을 피할 구석을 찾았다. 모두 공포에 정신이 나가 숨쉬는 것도 잊었다.”
이렇게 해서 폴리곤숲과 조네베케Zonnebecke 부근의 독일군 요충지를 다시 1km 정도 파고 들었다.
독일군은 불신,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한 참모장교는 “정말로 참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국인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겠다. 최근 며칠은 우리를 이 지경까지 내몰았다”고 기록했다.
최고사령부의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도 마찬가지였다. 9월 30일, 그는 참모에게 좁은 지역에 포격, 연막과 기관총을 집중시키는 최근의 영국군공격 전술을 상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의 최전방 수비대는 궤멸되었고 반격도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어전술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종심방어Defence-in-depth가 여전히 효과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루데도르프는 전방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10월 4일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했다. 추세를 바꿔서 주도권을 되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궁지에 몰린 독일군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처방이었다. 플러머는 10월 4일에 세번째 공세로 브루상데Broodseinde전투를 시작했는데 최고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루덴도르프의 반격이 시작되기 10분 전에, 플러머의 사단병력이 포격에 만신창이가 된 독일방어선으로 뛰어 들었다.
조네베케와 브루상데를 점령했고 엄청난 수의 독일군 포로를 붙잡았다. 독일사단기록에는 “베르덩과 솜이 이보다 공포스러웠던가? 플랑드가 전부 뒤흔들리고 불바다로 변했다”라고 되어있다. 독일방어선은 붕괴하기 직전처럼 보였다.
브루상데는 이프레스 3차전 중 결정적인 전투였다. 플러머는 단 2주만에 독일군에게 결정타 3방을 먹여 파스샹달 고지 바로 앞까지 전진했고 헤이그의 공세를 구원하는 동시에 독일군이 굳게 믿고 있던 방어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대포, 보병, 전차와 항공기를 적시적소에 동원해 험지에 틀어박힌 강력한 적을 몰아내는 용병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10월에 들어서자 플러머가 누렸던 하늘의 도움(기후)도 끝이 났다. 이후 며칠동안 폭우가 쏟아져 전장은 다시 물이 가득 찬 포탄구덩이, 안개와 짙은 구름으로 변했다. 반대로 독일군에는 너무나도 귀중한 휴식을 안겨준 구원자였다.
헤이그는 계속 공격하라고 압박했지만 플러머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독일군 붕괴가 눈앞이라고 믿는 헤이그는 플러머를 몰아 붙였고 10월 9일과 12일에 파스샹달 방면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당연히 두 공격 모두 실패했다. 물과 진흙으로 뒤덮인 전장을 건너도 독일군 참호 앞의 철조망에 막혔다. 2주의 준비 끝에 10월 중순, 캐나다군이 선봉에 섰고 1917년 11월 6일에 마침내 파스샹달을 점령했다.
며칠 후에 모든 작전이 취소되고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1차대전은 참호전이라 포격강도는 2차대전보다 더 강했습니다. 폭격이 거의 없던 시절인데도, 파스샹달의 전투전과 후의 모습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모두 포탄구덩이입니다.
헤이그는 1917년 공세로, 이프레스 돌출부를 뚫고 영불해협 해안의 주요 항구를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플러머가 지휘권을 잡고 다르게 시작했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만들어 졌을 것이다.
초반부터 메닌 로드, 폴리곤숲, 브루상데를 돌파했다면 독일군은 벨기에 서부를 포기하고 후방의 더 안전한 지역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플러머와 제 2군이 9월 20일~10월 4일에 거둔 전과는 단 한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가 찰스 빈Charles Bean은 브루상데전투가 엄청난 결정타였는데도 당시 참전했던 지휘관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이프레스 3차전은 진흙과 무의미한 죽음으로 훨씬 유명하지만 제대로 된 지휘관과 올바른 작전계획에 따라 영국군 그리고 영연방(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군)을 투입하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목표를 달성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파스샹달전투에 대한 흔한 오해는 이제 접어두고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면에 대해서도 조명을 비출 때가 되었다.
캐나다영화 파스샹달의 주요 전투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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