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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1차대전 전차의 대차대조표

by uesgi2003 2017. 8. 1.


스필버그감독의 워호스 개봉할 때에 정리하고 싶었던 1차대전 전차를 이제야 정리합니다. 저는 왠지 현대식전차에는 정이 안가더군요. 아날로그 냄새가 물씬 풍기는 1~2차대전 당시의 전차가 좋습니다. 마치 중세시대 기사처럼 장갑을 어설프게 두른 모습이 더 멋집니다.


1차대전 전차의 대차대조표 


전차는 1914년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 1945년까지 지상에서 만큼은 충격과 공포의 무기였다. 굉음을 내며 전진하고, 포화를 퍼붓고, 장애물을 깔아 뭉개고, 병사를 짓이기는 현대 대량생산 전쟁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차가 전장을 지배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제 전차의 영광은 사라져가고 있다.  

전차는 처음부터 상당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설계할 때부터 기동성, 장갑과 화력의 우선순위를 놓고 고민했다. 경전차는 빠른 반면에 방어력이나 화력이 부족했다. 중전차는 강력한 무장에 비해 기동력이 처지고 전장에서 주저 앉기 쉬웠다.

장거리 포격과 근거리 보병도 상당한 위협이었다. 전차는 특히 시가전에서 취약했는데 건물 사이에 대전차포가 은폐해 있거나 보병이 수류탄, 흡착폭탄, 바주카, 화염방사기, 척탄통을 가지고 기다렸다.

들판도 지뢰, 대전차장애물, 공습 때문에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16년부터 1943/44년까지의 전차는 흑자였지만 그 후로는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항공기, 대전차포, 첨단 대전차미사일, 현대통신기술 개발도 주요 원인이지만 1945년 이후 전선과 후방을 구분할 수 없는 전장도 한 몫을 하고 있다.

1944년 노르망디Normandy전역에서 독일기갑부대가 연합군 공습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생각해보자. 베트남 정글에서 전차가 베트콩 게릴라에게 무기력했다는 것을 떠올려도 된다.

전차탄생 100년이 된 지금은 실용보다는 군사력의 상징에 불과할 수도 있다.


 

전차는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고민 끝에 탄생했다. 1차세계대전 당시 참호선을 돌파하지 못한 교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차를 개발했다. 이후 혁신을 거듭하며 화력과 기동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고정진지와 적전차를 상대했다. 전차는 소총과 기관총탄을 맞아가며 철조망을 뭉개고 참호를 건너갔다. 전선을 충격에 몰아 넣었다.

그렇지만 단점도 있었다. 많은 전차가 심지어 출발점에 모이기도 전에 고장났고 전투 중에는 늘 유지보수가 필요했다. 당시 기술을 생각하면 당연한 단점이었다. 다른 병력과의 협력도 문제였고 초기에는 전차숫자가 너무 적어서 판도를 바꾸지 못했다.

1916 9, 영국군이 처음으로 전차를 사용했는데 제169 보병여단에 투입한 한대가 전부였다. ‘전차는 공격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전차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계속 공격해야 한다라는 명령이 따라 붙었다.

 

1917 11 20, 영국은 캄브라이Cambrai전투에서 전차 348대를 대거 투입했지만 그 경우에도 작전의 한 무기에 불과했다. 3군 사령관 줄리안 빙Julian Byng은 보병, 야포, 항공기와 전차를 적절하게 사용해 독일군 방어선을 6km를 밀어내며 많은 포로도 잡았다.

잘 준비된 사전 집중포격이 작전성공의 열쇠였다. 전차는 영국군 보병의 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가 독일군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즉시 병력을 투입해 방어선을 틀어막고 영국군을 다시 밀어냈다.

캄브라이전투에서의 전차역할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었다.



독일군의 반격상황입니다. 양쪽 각각 약 45,000명의 병력을 잃었는데 연합군은 무려 348대의 전차를 투입하고도 지지부진했습니다. 이 중에서 179대를 잃었습니다.

아래는 독일군이 영국군 마크 IV 전차를 회수하는 장면입니다. 독일군은 단 한대의 전차도 없었습니다. 


 

1918, 연합군과 독일군은 분명한 전력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3월에 A7V를 투입하기 시작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 전차를 노획해 사용했다. 독일산업은 대형 A7V 전차를 대량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춘계공세나 연합군 100일공세에서 전투판도를 바꾸지 못했다.



무려 18명이 탔고 33톤의 괴물 A7V입니다. 겨우 20대만 생산되었기 때문에 선전용 전차에 가까웠습니다. 독일군은 모처럼 가진 전차가 얼마나 귀중했던지 각 전차마다 이름을 붙였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차는 메피스토Mephisto입니다.


57mm 포탄은 최대 300발을 장착했다고 하니까 움직이는 동안에는 원없이 쏠 수 있었겠습니다. 실상은 아래 사진처럼 지리멸렬했습니다만.






독일은 2종의 전차를 기획하다가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슈투름판저바겐 오버쉴레지엔Sturmpanzerwagen Oberschlesien입니다. 과도한 A7V에 비해 좀 더 가볍고 혁신적입니다. 




반면에 거꾸로 120톤의 초중전차 K바겐Wagen을 기획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물자나 도로상황을 생각하면 황당한 시도였습니다.


길이 13m에 77mm포 4문을 장착한 역사상 최초의 초중전차였습니다.



모든 국가가 초중전차 설계하거나 실제 생산했습니다. 



연합군은 훨씬 많은 전차를 투입했다. 프랑스는 고유의 전차를 개발했고 1918년에는 75mm 포의 슈나이더 크휴소Schneider-Creusot(아래 첫번째 사진참조)37mm 포의 르노Renault 등을 3,000대 이상 생산했다. 11월에는 로렌Lorraine 방면 진격에 600대의 전차를 투입할 계획이었다.



최초의 현대식전차 르노 FT는 다양한 변형을 양산했고 전세계의 다양한 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는 1918년 뫼즈-아르곤Meuse-Argonne공세에서 미군에게도 전차를 지원했다. 4월 빌레 브흐또뉴Villers-Bretonneux에서는 독일 A7V가 영국 휘핏Whippet과 마크Mark IV와 세계최초의 전차전을 벌였다그런데도 연합군의 전술교리는 여전히 전차를 보병지원용으로만 국한시켰다.



일본군이 사용 중인 휘핏전차입니다. 




마크 IV 전차인데 보병들은 나중에 다 떨어졌을 것 같군요.


연합군 전차는 7 26일에 내려진 총공격 명령에 따라 대단한 활약을 했다. 8 8, 영국군 전차 430대 이상이 아미앵Amiens 부근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루덴도르프Ludendorff는 이날을 독일군 암흑의 날Black Day라고 불렀다.

참호돌파는 심각한 위협을 가져왔다. 적진 깊숙이 전진한 병력은 아군의 화력엄호를 받을 수 없었고 기동력이 부족해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전차는 이런 위협을 해결할 수 있었다.

포와 기관총을 장착한 전차는 적 진지를 격파하고 반격을 막을 수 있었다. 보병이 필요로 하는 지점에 정확하게 포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 전차는 많은 주목을 받았고 지휘관은 보병, 야포와 전차조합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다양한 유형과 목적의 전차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1차대전말 참모차장으로 힌덴부르크(참모총장)와 군사독재를 이끌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입니다. 힌덴부르크와의 불화로 종전과 함께 스웨덴으로 망명했습니다.

다시 귀국해 극우정치인으로 히틀러를 가까이 했다가 히틀러는 혐오해 멀리했습니다. 다행히(?) 2차대전 발발 전에 세상을 떠나 조국독일의 두번째 참담한 몰락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차는 중요한 무기였지만 내구성, 화력과 속도 면에서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 영국의 경보병 박격포가 전차보다 더 정확하고 유연한 화력지원을 할 수 있었다. 전차는 항상 출력도 부족하고 무장과 장갑도 빈약하고 고장이 잘 났다. 그리고 전차병은 외부 보병은 고사하고 내부에서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발력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쟁물자 할당과 생산시설 때문에 충분한 숫자를 모으기도 힘들었다. 대전차 전술도 바로 개발되었다. 독일의 대전차 전술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전차는 다른 전차에도 취약했지만 지뢰, 저속탄 야포와 철갑탄 대전차총에도 취약했다. 독일 M-1918 마우저Mauser 대전차총이 대표적이었다.

포는 전장을 지배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더 많은 포가 투입되었고 구경은 더 커졌고 성능은 더 정교하고 강력해졌다. 대부분의 경우 야포로 전차를 막을 수 있었다.



오른쪽 끝의 총입니다. 100m 거리에서 22mm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2차대전에서도 엄청난 수의 대전차총이 사용되었습니다. 

 

전차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보병과 야포의 지원이 필요했다. 이 교훈은 의외로 계속 반복되었는데 영국군은 1941~42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영국은 캄브라이와 아미앵전투에서 제대로 된 저항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전차의 효과에 대해 과대평가했다. 그리고 두 전투에 투입된 전차는 대부분 며칠 안에 고장을 일으키거나 주저앉았다.

오스트레일리아군단 참모장 토마스 블레미Thomas Blamey 8 9, 전날의 전투 때문에 상당한 전차를 잃었고 당일에는 직격탄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했다. 8 11일에는 독일군의 거친 저항에 직면했고 전차가 거의 없어서 포격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전차는 갑작스럽게 개발된 무기였기 때문에 설계 당시부터 신뢰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전차를 투입한 전장은 이미 포탄구덩이 투성이어서 신뢰성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영국은 충분한 부품을 생산하지 못했고 1918년 가을에는 전차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다.

전차는 신속한 기동군이 아니라 보병지원용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전차사용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만약 1차대전이 1919년까지 계속 이어져서 충분한 전차를 생산하고 투입했다면 전차에 대한 반대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1차대전이 1918 11월에 종전되었기 때문에 전차의 취약점인 신뢰성, 느린 속도, 방어력, 화력, 통신수단부재, 험지돌파력 등은 숙제로 남았다.

 

대규모로 투입되어 전차의 효과를 입증했다고 하더라도 탄약과 연료보급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 영국전차는 1차대전 전차에 비해 크게 개선되지도 않았다.

전차 옹호론자는 대전차 기술에 대해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데 독일군도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전차포를 투입했을 것이고 전차의 손실을 그만큼 커졌을 것이다.




독일이 즐겨 사용한 77mm 포입니다. 

 

다음은 실제 전차병의 참전기록이다.

 

포로가 되었던 영국장교는 종전 후에 포로시절에 대해 보고서를 내야 했고 큐Kew 국립기록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는 서부전선에 투입된 마크 IV와 마크 V 지휘관의 기록도 있다.

 

1914~18 기간의 전차병은 보병보다 훨씬 긴 집중사격을 받았다. 소총탄이 전차를 두들기면 장갑판의 안쪽면에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철조각이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전차병은 보호장구를 입어야 했다(사진 참조). 1918, 독일군의 신형 13mm T-게베어Gewehr 대전차총의 철갑탄은 장갑을 뚫어 전차병을 죽였다. 전차는 포격에도 취약했다.

1918 9월과 10월에 미군 301중전차대대가 사용했던 마크 V의 배기통은 새빨갛게 달궈져서 650도까지 올라갔다. 마크 IV도 나을 것이 없었다. 엔진은 별도의 분리공간이 없어서 클래식 자동차의 후드 아래의 열기와 냄새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IVV 모두 1.2m 이상의 수직장애물을 올라탈 수 있었지만 그 후에는 아래로 내리꽂아서 전차병이 배기통이나 포미에 심하게 부딪쳤다.

IV 105~125마력 다이믈러Daimler 또는 V 150마력 리카르도Ricardo 엔진은 27톤짜리 체구를 움직이기에 버거워서 주저앉기 일쑤였고 최고속도도 사람의 속보 정도에 불과했다.

 

두 모델의 탑승인원은 8명이었고 호치키스Hotchkiss 또는 루이스Lewis 기관총 6정을 장착한 여성형, 57mm 2문과 기관총 4정을 장착한 남성형이 있었다. 주포는 양쪽으로 돌출된 포대에 장착되었다.

전투 중 포연이 쌓여 기어변속을 담당하는 2명의 전차병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되었다. 아래의 기록은 너무 앞서 달리다가 포로가 된 전차병의 증언이다. 실제로 전차와 보병은 거의 따로 움직였고 보병보다 앞서다가 포로가 된 전차병은 극히 드물었다. 절대 다수의 전차는 보병보다 빨리 나가지 못했다.

 

프랑크 반스 애그뉴Frank Vans Agnew대위. 1917 11 23일 캄브라이부근 퐁뗀느 노트흐 담므Fontaine-Notre-Dame에서 포로가 됨.

17 11 20, 14대의 중대전차 중 4대를 지휘했고 마흑꾸왕Marcoing에서 적을 몰아낸 후에 보병에게 인계했다. 목표였던 철교를 무사히 점령했다. 연료와 탄약이 떨어져서 14대의 남은 것을 7대에 몰아주고 22일 저녁에 부흘롱Bourlon숲으로 향했다.

이 중에서 3대의 지휘를 맡았다. 오전 1시까지 이동하다가 내려앉은 도로에 정차했다. 새벽쯤, 부흘롱이 아니라 퐁뗀느 노트흐 담므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3일 오전 9 30분에 일렬로 출발했다. 달비Dalby중위의 전차가 선두에 섰다.

선두전차는 철갑 기관총탄의 집중사격을 받았고 기관총수 2명이 부상당했다. 연막탄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오전 10시에 퐁뗀느에 진입했는데 적을 마을에서 몰아내고 보병이 올때까지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3 30분까지 계속 전투를 벌였는데 루이스기관총이 완전히 멈췄고 6파운드 호치키스포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엔진의 오일펌프도 상태가 심각해져서 언제 멈춰도 놀라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다른 전차 한대가 위험해서 접근했는데 로Law중위의 전차였다. 라디에이터 누수가 심하다고 했다. 그에게 즉시 본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한 후에 그를 구원하기 위해 따라갈 생각이었다.

캄브라이 부근의 집 몇 채를 제외하고는 적을 모두 몰아냈는데도 지원보병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4시에 로와 나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연막도 없이 마을을 빠져나오자 적 포병관측에 바로 걸렸고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탄부터 거리를 좁히더니 삼탄은 우리를 바로 맞혔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음 탄에 우측 포대가 날아가 2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계속 날아온 포탄에 라디에이터가 터져 차내는 증기와 악취가 가득 찼다.

즉시 탈출을 명령했고 전차를 방기했다. 부상병을 안전하게 빼냈지만 독일방어선 후방 1km 지점까지 이동했을 때에 기관총탄이 쏟아졌다. 나는 왼쪽 팔꿈치에 한발을 맞았고 달비중위는 오른쪽 팔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30m 앞에 마을이 있어서 모두 달려가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마을에서 적을 거의 몰아냈기 때문에 다락에 올라가 붕대를 감고 아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아군은 오지 않고 적군이 먼저 나타났다. 나만 무장했기 때문에 항복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부상과 상관없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계속 전투를 벌여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9명 중에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나중에 중대장 헨셀Henshall소령에게서 보병이 퐁뗀느까지 진격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진격 도중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7대 전차 중에 한대만 본대로 복귀했다. 장교 9명 중에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해 포로가 되었다. 돌비중위와 승무원 7명은 절대로 비굴하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에도 영국군의 자존심을 지켰다.

 

전차의 실제 효과와는 상관없이. 참전국은 전차를 선전용으로 즐겨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