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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차대전의 7대 전차전 - 쿠르스크

by uesgi2003 2018. 6. 7.


이미 제 온라인 서재에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2차대전의 7대 전차전 - 쿠르스크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전장이었기 때문에 전차가 주축이었다 독일군은 4,000대 이상의 기갑차량, 3,500,000명의 병력, 4,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투입했다. 

소련USSR은 5,000,000명의 병력(급히 끌어 모은 신병 포함), 10,000대이 항공기(대부분 낙후), 1~20,000대의 기갑차량(대부분이 낙후된 장갑차)로 맞섰다. 

소련의 전장은 전차전에 더없이 좋았다. 믿기 힘들 정도로 광활한 평야에서 대규모로 기동전을 펼칠 수 있었는데 북아프리카전선과 달리 모래나 살인적인 더위가 없었다. 



스탈린과 최고사령부는 이미 독일군침공에 대해 여러 곳에서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1939년에 히틀러와 10년짜리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서유럽이 두 나라의 분쟁을 유도하는 술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체제변화를 위해 적군Red Army 지휘관을 대거 숙청했기 때문에 대처할 방법도 없었다. 독일의 침공은 말그대로 충격적이었다. 독일군은 폴란드와 프랑스를 무너트린 전격전을 동부전선에서도 그대로 적용했고 소련은 버티지 못했다. 

소련군은 곳곳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기술적 우위가 압도적이었다. 수십만명이 전사하고 또 수십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몇 주 만에 독일군은 수백km를 전진했고 소련도 항복할 것처럼 보였다.


이후 전투양상의 예고편이 브로디Brody에서 벌어졌다. 원래는 폴란드영토였지만 1939년 나치-소련조약에 따라 소련에 합병되었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있다, 

독일군은 브로디에서 728대의 전차(273대는 1호와 2호전차, 100대는 37mm 주포의 3호와 t38형, 355대는 최신형 3호와 4호전차)와 수백대의 항공기를 투입했다. 적군은 3,000대 이상의 전차로 맞섰는데 그 중에 400대 정도만이 신형전차였다.

그 중에는 KV-1/KV-2와 T-34형이 있었는데 T-34는 2차대전 최고의 전차로 불리게 된다. 





브로디전투 한달 후에 벌어진 모질레프Mogilev전투인데 비슷한 상황이니까 참조삼아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러시아특유의 각색이 있습니다. 분문의 내용과 달리 브로디전차전에 투입된 전차가 훨씬 많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KV-1과 2형은 90mm/110mm의 두터운 장갑과 76mm/125mm의 강력한 주포를 자랑했지만 기동력이 너무 부족했고 측면과 후면장갑은 두텁지 않아서 독일군이 쉽지 않더라도 격파할 수 있었다. KV-2형은 포탑이 너무 높아서 쉬운 표적이 되었다. 

T-34는 모든 면에서 최초의 현대식전차였다. 제조하기 너무 쉬워서 소련은 대전기간 동안 무려 80,000대를 생산해냈다. 경사장갑덕분에 제대로 맞지 않으면 포탄을 튕겨냈기 때문에 방어력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넓은 궤도덕분에 진흙이나 눈밭에서도 주저 앉지 않았다. 76mm 주포는 대전초기 모든 독일군전차를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T-34를 처음 겪고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판터Panther를 개발할 때에 기본 디자인을 대거 적용했다. 



도로에 주저앉은 KV-2 전차 한대가 독일군 기갑사단 하나를 통채로 묶어두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1941년 6월 23~30일에 벌어진 브로디전투는 소련군의 참패였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무리한 반격에 나섰고 독일 1전차군에 상당히 피해를 입히고 궤멸되었다. 

T-34는 거의 무적이었고 독일군을 충격에 빠트렸다. 다행히 다른 대부분의 전차는 구식이어서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하늘을 지배한 독일공군은 소련군의 집결지와 보급창을 계속 폭격했다.

소련 8군은 거의 전멸했다. 800대의 전차가 파괴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버려졌다. 


2년 후,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독일군이 1941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는데 실패한 후에 미국이 참전했고 히틀러는 1942~43년 겨울에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서 참패를 당했다. 독일의 병력은 한계를 넘어섰고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독일산업과 석유공급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격으로 반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서쪽으로 돌출한 소련군의 거대한 방어선을 북과 남에서 협공해서 1941년처럼 포위해 섬멸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적군은 이제 더 이상 2년 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숫자는 물론이고 장비와 훈련 면에서 비교가 안되었다. 그리고 주코프Zhukov와 같이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 소련은 전쟁 초기에 동쪽으로 급히 옮긴 산업시설에서 독일과는 비교가 안되는 전쟁물자를 생산해냈다. 

그리고 독일군의 총공격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1943년 7월 5일, 750,000명의 병력, 2,500대의 기갑차량, 7,500문의 포, 2,000대의 항공기가 전진배치되었다. 반대편에는 1,500,000명의 병력, 5,000대의 기갑차량, 3,000대의 항공기와 10,000문의 포가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미리 120km 깊이의 3중 방어선을 구축해두었다. 방어선 사이에는 수백만개의 지뢰를 매설해 두었다. 

그렇게 벌어진 쿠르스크전투 그리고 그 일부인 프로호로프카Prokhorovka전투에서 현재까지 가장 규모가 큰 전차전이 벌어졌다. 


독일군은 최신형 중전차인 판터와 타이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판터는 T-34를 모방해 경사장잡과 넓은 궤도를 장착했고 고속의 75mm 주포로 당시의 모든 소련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 

초기형 판터는 상당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다른 독일전차와 같이 고급기술에 집착해 제조와 수리에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쿠르스크에 투입하기 위해 너무 서둘러서 구동체계가 쉽게 고장났다. 히틀러는 판터를 기다리느라 작전개시를 계속 미루었는데 판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사가 사이에서는 판터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타이거는 한 마디로 괴물이었다. 60톤의 무게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졌고 막대한 기름을 소비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는 변속기가 계속 고장을 일으켰다. 판터처럼 과도한 기술집약체로 생산이 어려웠다. 

대신에 장포신 88mm는 당대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했고 안전한 원거리에서 적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근거리까지 좁혀 들지 않으면 격파할 방법이 없었다. 일부 타이거는 3.2km 거리에서 적 전차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극히 드문 전과였다. 


독일은 페르디난트Ferdinand도 배치했다. 75mm 장포신에 200mm의 두터운 장갑으로 움직이는 요새라고 할 수 있었지만 기관총을 장착하지 않아서 보병의 근거리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3호와 4호전차였다. 

SS 라이브스탄다르테Leibstandarte SS 아돌프 히틀러, SS 다스 라이히Das Reich, SS 토텐코프Totenkopf가 2 SS 전차군단에 속했고 대부분의 판터와 타이거를 보유해 동부전선 최정예부대였다. 

라이브스탄다르테와 다스 라이히가 돌출부 남부의 프로호로프카에서 소련 5 근위전차군Guards Tank Amy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세계최대 전차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쿠르스크전투에서 소련군이 가장 두려워한 페르디난트전차입니다. 원래 대전차전과 대참호전 전용으로 개발한 전차여서 원거리에서는 무적이었지만 근거리 보병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말도 안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7월 5일.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이미 독일의 정확한 공격시작 시간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포격에 앞서 먼저 포격을 퍼부었다. 집결지에 모여 있던 병력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남과 북에서 소련군의 거친 저항을 뚫고 전진했다. 프란츠 슈타우데거Franz Staudegger는 단독으로 22대의 T-34를 격파하고 최고의 영예인 기사십자상을 받았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벌이며 포로는 허용하지 않았다. 

전차를 근접지원하던 독일공군은 소련전투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으며 극한까지 몰렸다. 소련은 일류신Ilyushin IL-2 슈트루모빅Sturmovik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하늘의 전차로, 독일은 학살자로 불렀을 정도로 쿠르스크에서 독일군 기갑부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탈린그라드패전은 독일군의 승리가 멈춘 전투였고 쿠르스크패전은 독일군의 패배가 시작된 전투라고 부릅니다.

천재전략가 만슈타인은 중전차투입없이 조속한 개시를 주장했지만 히틀러 특유의 집착으로 소련군이 만반의 준비를 끝난 후에 무모한 돌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북쪽전선에서는 국방군기갑부대가 이틀째부터 교착상태였지만 남부전선에서는 여전히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소련군에게 경계경보를 울렸다. 소련군은 이때부터 남과 북에 모두 예비병력을 쏟아 부었다. 북쪽전선에서는 이제 희망이 사라졌고 남쪽전선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1943년 7월 12일, 2 SS 전차군단과 5 근위전차군이 프로호로프카에서 격돌했다. SS부대가 소련의 반격을 뚫고 전진한다면 후방까지 무난하게 돌파할 수 있었다. 


마을 양쪽으로 10km 펼쳐진 공간에서 소련전차 800대와 독일전차 400대가 충돌했다. 병사들은 발 아래의 땅을 울리는 진동을 느꼈을 정도였다. 독일군은 소련군전차를 차례로 격파했지만 소련군전차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모두 다 막지는 못했다. 

소련군은 타이거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 받아서 포탑 등을 망가트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마치 중세시대 기병전처럼 양측의 전차가 서로 엉켜서 난전을 벌였다. 독일군전차가 소수만 남아 전장을 지배했고 5 근위대전차군은 완전히 사라졌고 7,000명이 죽었다. 



독일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뒀지만 더 이상 전진할 여력이 없었던 반면에 소련군은 후방에 있던 예비병력을 계속 투입했다. 독일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차전은 이렇게 끝났고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이제는 소련군이 1943년 중반부터 종전까지 독일에게서 배운 전격전을 벌였고 히틀러는 단 한 뼘의 땅도 내주지 말라는 정신병적 집착을 보여 독일군은 차례로 포위당해 전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