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6부) - 1차 십자군원정

by uesgi2003 2019. 6. 21.



십자군원정은 책 3권 분량이 나오기 때문에 되도록 설명을 피하고 지중해 해군과 전투에 대해서만 집중하겠습니다. 1차 십자군원정까지 정리하다 보니 분량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좀 왔다 갔다 합니다. 다양한 국가와 사건을 연결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중세해전 이야기 (6부) - 1차 십자군원정


시실리왕국이 중앙 지중해를 차지하자 베네치아와 동맹인 콘스탄티노플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1135년, 노르만군이 제르바Jerba를 점령했는데도 해적활동이 줄어들지 않았고 베네치아상선이 4,000탈렌트를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배후가 시실리왕국이라고 밝혀지자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John II Komnenos황제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서교역로가 차단당한 비잔틴제국에게 좋은 구실이 생겼다. 1136년, 베네치아 사절이 신성로마제국을 찾아 대시실리동맹을 제안했지만 로제가 발빠르게 베네치아에게 유리한 교역조건을 제시해 무마시켰다. 

신성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모색하다가 1146년 1월에야 결실을 맺었다. 


시실리왕국에는 천만다행으로 2차 십자군원정이 벌어졌다. 1144년 12월, 무슬림이 에데사Edessa를 점령하자 유럽이 움직였다. 프랑스의 루이Louis 7세는 1145년 크리스마스에 십자군원정을 발표했고 1년 후에는 콘라트Conrad 3세가 교황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시실리 침공이 연기되었다. 

로제는 십자군원정을 이용해 두 제국에 선제대응하기로 했다. 비잔틴제국에게 십자군은 불청객이었다. 북쪽에서 십자군이 마구잡이로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서부의 병력을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였다. 

발칸반도 서쪽 해안과 펠로론네소스Peloponnesos가 비었고 로제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1147년 4월, 로제는 그리스본토의 아드리아해안에 대규모 해군을 투입했다. 게오르크가 지휘했다고 알려지는데, 시실리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손쉽게 코르푸를 점령하고 코린트Corinth해협을 약탈했다. 

비잔틴제국은 베네치아에게 매우 관대한 통상조건을 걸고 함대를 불러들여 코르푸를 탈환하려고 했다. 로제는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60척의 함대를 보내 다른 곳을 공격했다. 

게오르크는 금각만Golden Horn(지도 참조)까지 침투해 바실레우스Basileus의 황궁Blachernae Palace(그림 참조)에 불을 질렀다. 

코르푸는 잃었지만 별동대의 공격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비잔틴제국은 감히 시실리를 침공할 생각조차 품지 않았다. 

1151년, 해군총사령관 게오르크가 병에 걸려 죽었다. 로제는 마디야의 필리프Philip라는 무슬림개종인을 후임으로 임명했다가 1153년 배반혐의를 이유로 불태워 죽였다. 로제 자신도 1154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시실리왕국도 급격히 힘을 잃었다. 1156년, 로제의 아들 윌리암 1세(그림 참조)는 비잔틴제국이 브린디시를 포위하자 함대를 보내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무슬림의 반란까지 동시에 대처할 수 없었다. 

1159년, 마디야가 포위당하자 시실리왕국은 150척의 갤리함대를 보내 수비군을 구원하려고 했다. 함대가 패배하고 겨우 70척만 허둥지둥 도망쳐왔다. 마디야가 1160년 1월에 함락되면서 시실리왕국은 지중해 절반을 잃었다. 

사악왕the Bad라는 별명이 붙은 윌리암은 로제와 달리 이탈리아해양도시의 연합을 막지 못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베네치아와 비잔틴제국이 연합을 하고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1세가 1162년에 피사와 제노바를 끌어들여 시실리왕국을 침공하려고 하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두 도시국가의 분열로 더 큰 위기로 번지지 않았다. 



아들 윌리암 2세에 들어서 시실리왕국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윌리암 2세는 왕국의 금고와 해군력을 바닥냈다. 1174년, 윌리암 2세는 200척의 갤리함대를 투입해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다. 

‘도시 앞에서 5~6일 머무르는 동안... 상당히 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결국 무질서하게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윌리암은 1181년에 갤리선 184척, 군마수송선 45척과 보급선 40척을 투입해 발레아루스Balearic제도의 해적을 토벌하려고 했다. 

‘악천후 때문에 함대 대부분이 해안도시 부근에 좌초되었다. 큰 파도가 선박을 해변 위로 밀어붙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성당을 바치고 있는 윌리암 2세입니다. 선왕과 정반대인 선왕The Good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최소한 원정에서는 무능력했습니다. 후손을 남기지 않아 내분이 발생하고 시실리왕국이 몰락하게 됩니다. 


윌리암이 약 85,000명의 병력을 400척에 태워 비잔틴제국을 침공한 1185년 원정이 결정적이었다. 육군은 마케도니아 중부의 암피폴리스Amphipolis 부근에서 매복에 당해 전멸당했고(데메트리체스 전투Battle of Demetritzes. 그림 참조) 해군은 마르마라Marmara해에서 패전해 시실리로 황급하게 달아났다.

더구나 윌리암은 신성로마제국의 간섭을 막기 위해 숙모를 프리드리히의 후계자 앙리Henry와 결혼시키고 자신이 후계자없이 죽을 경우 숙모가 즉위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윌리암은 1189년에 후계자없이 급사했다. 1187년 7월에 하틴곶Horns of Hattin에서 예루살렘군이 전멸하자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노르만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눴다가 후위군이 먼저 격파당했고 전의를 잃은 본대는 협상을 제안했다가 기습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잠시 나왔던 하틴전투는, 라틴왕국연합군이 비슷한 전력의 살라딘군에게 전멸당한 전투입니다. 


윌리암의 생각없는 정략결혼은 시실리왕국을 붕괴시켰다. 사촌 레체의 탕크레드Tancred of Lecce가 신성로마제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실리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지지세력이 급격히 약해졌고 3차 십자군원정에서 사자와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Philip II Augustus군이 시실리왕국을 마구 통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191년 메시나에서는 빵 한덩어리 때문에 십자군과 시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왕실무기창과 함대가 불탔다. 왕국이 얼마나 무기력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탕크레드는 해군을 재건할 군자금이 남지 않았다. 리차드와 필리프가 무력으로 십자군원정금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1194년에 신성로마제국 앙리 4세가 피사오 제노바군과 힘께 왕위를 주장하며 남하할 때에는 저항할 병력이 아예 없었다. 

시실리왕국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노르만군이 무슬림을 몰아내고 중앙 지중해를 장악해 이후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었다. 이탈리아 서부의 해양도시, 특히 제노바와 피사가 지중해로 진출해 십자군원정을 가능하게 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그럴듯하게 등장하는 리차드 1세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래 전에 정리해둔 이야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베니스와 비잔틴의 대규모 해군은 우르바노Urban 2세의 1095년 11월 27일 십자군원정 요청에 화답하지 않았다. 1차 십자군원정은 기사, 보병과 농부가 고행에 나서고 제노바와 피사 등의 해양도시국가가 지원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노르만군이 남부이탈리아에 이어 시실리를 정복해 지중해를 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십자군원정에서 해군의 역할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초기 해군의 주력은 전투갤리선이 아니라 수송과 전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이단노선 갈레아선이었다. 팔레스타인해안을 장악하고 방어하는 동시에 십자군의 병참선 역할을 했다. 예루살렘왕국을 유혈점령한 후에는 순례자와 병력을 실어 날랐다. 십자군함대의 주력은 평범한 수송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일 갑판에 돛 1~2개를 단 배수량 35톤부터 3중 갑판에 돛이 여러 개인 배수량 800톤의 괴물급까지 다양한 수송선이 동원되었다. 가장 특수한 형태는 군마수송선이었다. 중세유럽군대의 핵심은 중장갑기병이었다. 군마전용의 대형수송선은 항구시설이 필요했다. 

비잔틴제국의 첼란디온Celandine과 같이 용골을 따라 12마리를 수용하는, 낮은 홀수선을 사용하다가 십자군원정에서는 40마리 정도를 수용하고 선미쪽에서 다리를 내려 하역하는 군마수송선을 사용했다. 

해전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차 십자군원정은 1095년 3월에 비잔틴제국 알렉시오스 1세 콤니누스Alexios I Komnenos가 우르바노Urban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이 원정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그림 참조). 비잔틴제국은 1071년 아르메니아Armenia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에게 참패를 당한 후에 소아시아Asia Minor를 급격히 잃고 있었다. 

1차 원정은 당연히 비잔틴영토를 통과할 수 밖에 없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의 환대를 떠나 보스포러스Bosporus해협을 건너자마자 고난을 겪었다. 물은 식량보다 더 귀했고 주변은 빈틈을 노리는 적으로 가득 찼다. 

교황의 부름에 움직인 십자군 부대 3개 중 하나만 간신히 소아시아를 통과했다. 



군중십자군People’s Crusade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부대는 피에르 레르미트Peter the Hermit가 이끄는 약 40,000명의 민병이었다. 1096년 여름에 여러 대열로 나뉘어 중앙유럽을 통과했다.

플롱하임의 에미히Emich of Flonheim 등이 이끄는 대열은 라인란트Rhineland에서 유대인에게 잔인한 광기를 부리다가 헝가리에서 와해되었다. 피에르 레르미트의 15,000명은 니카이아Nicaea 근처까지 갔다가 셀주크군에게 전멸당했다. 



1101년 십자군으로 부르는 세 번째 부대는 첫 번째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고 생 질의 레몽Raymond of St Gilles, 베르망두아의 위그Hugh of Vermandois, 블루아의 스티븐Stephen of Blois과 같은 베테랑이 지휘했지만 마찬가지로 각개 진군하다가 아나톨리아Anatolia의 셀주크연합군에게 포위당해 전멸했다. 

그나마 성공했던 두 번째 부대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1097년 봄에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넌 40,000~75,000명의 십자군 중에 겨우 15,000명이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얼마 유지하지 못했다. 



낯선 기온과 지형을 약 2,000km 행군하며 전투를 벌이고 식량과 물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심각한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서유럽을 각각 출발한 대열은 콘스탄티노플까지 비교적 어려움없이 도착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과 볼로뉴의 보두앵Baldwin of Boulogne은 로렌느Lorraine에서 독일남부와 헝가리를 거쳐 행군한 반면에 생 질의 레몽은 이탈리아북부와 달마시아Dalmatia를 거쳐 비잔틴제국에 들어갔다, 다른 대열은 배를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직접 제국에 도착했다.

이들은 보스포러스 동쪽제방에 집결했는데 뜨거운 여름태양 아래에서 셀주크군이 초토화시킨 아나톨리아평원을 건너야했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의 첫번째 통치자가 된 고드프루아입니다. 1100년에 사망했는데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크레를 공격 중에 화살을 맞았다는 기록도 있고 독살당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내분에 따른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형 고드프루아가 죽자 뒤를 이어 2대 예루살렘왕위에 오른 보두앵 1세입니다. 그도 1118년에 식중독으로 죽었고 조카 보두앵 2세가 3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콘스탄티노플 남쪽 125km 지점의 니케이아(셀주크 술탄 킬리즈 아르슬란Kilij Arslan의 수도)에서 첫 번째 난관을 만났다. 1097년 5월 6일에 포위하고 6월 19일에 함락시켰는데 도시의 서쪽 성벽을 비잔틴해군이 무너트린 덕분이었다. 

보에몽Bohemond과 로베르 커토즈Robert Curthose가 선두에 서고 나머지 절반은 뒤에 떨어져서 진군을 재개했다. 7월 1일, 니케아이 남동쪽 90km의 도릴라이움Dorylaeum에서 셀주크연합군이 보에몽의 선두부대를 기습했다. 

‘투르크군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단창을 던지거나 엄청난 거리에서 화살을 쏘아댔다.’

몇 시간 후에 나머지 병력이 도착해 셀주크 궁병을 밀어냈지만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4,000명이 죽었고 화살을 피하지 못한 동물이 대부분 죽었다. 



1차 십자군원정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던 보에몽 1세(시실리왕국의 기스카르의 아들)입니다. 다른 지도자와 달리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안티오크에 남아 비잔틴제국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시키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참패를 당한 후에 안티오크를 비잔틴제국에게 헌납하고 1111년에 사망했습니다. 아들 보에몽 2세가 뒤를 이었습니다. 


안티오크Antioch까지 남은 1,100km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토로스산맥Taurus Mountains의 매복을 피해 우회한 십자군은 행군만으로도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갈증과 탈진을 이기지 못한 남녀 500명이 단 하루에 영혼이 되었다. 말외에도 당나귀, 낙타, 노새, 소 등이 갈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거친 음식으로 굶주리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군마가 거의 죽어서 기사들이 보병신세가 되었고 염소, 양과 개에게 짐을 실었다.’


십자군의 전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원정시작 당시에는 약 7,000명의 기사가 있었고 기사 한 명이 최소한 3마리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총 20,000마리 이상의 군마 중에 겨우 1,000마리만 살아 남았다. 

겨우 20%의 기사만 말을 탔는데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에는 200명만 말을 타고 있었다. 나머지 기사는 당나귀나 노새를 타고 전투를 벌였다. 

육로를 통한 행군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10월 21일, 겨우 30,000명이 안티오크에 도착해 사기를 올렸지만 안티오크는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주변은 식량을 구하는 병사들 때문에 황폐해졌고 성안에 갇힌 적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80km 멀리까지 식량을 찾아 나섰다. 

‘굶주린 사람들이 밭에서 자라고 있는 콩줄기까지 먹어치웠다. 천민은 동물가죽과 분뇨 속의 씨앗을 뒤져 먹었다.’

마침내 항로로 증원병력과 보급품이 도착했다. 우르반 2세는 추기경 2명을 보내 제노바의 원정참여를 독려했고 제노바가 1097년 7월에 보낸 12척이 11월 20일에 도착했다. 제노바함대는 보급품, 600명의 병력과 25명의 기사를 실어왔다. 


이듬해 봄에는 영국, 베니스와 피사함대가 보급품을 싣고 왔다. 안티오크는 6월 3일에 함락되었고 보에몽은 6월 28일, 무슬림구원군에 대승을 거뒀다. 안티오크영주가 된 보에몽은 제노바에게 교역세를 면제하고 전용거주지역을 허가하는 특혜를 주었다. 대신에 제노바는 노르만 이탈리아영지와 보급로를 열어주었다. 

안티오크공성전을 시작으로 이탈리아북부의 해군은 십자군원정의 핵심전력이 되었다. 십자군은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안티오크에서 해안을 따라 남진했다. 제노바, 영국과 베네치아함대는 키푸러스Cyprus, 로도스Rhodes와 에게해 섬에서 군수품을 수송했다. 

1099년 2월의 아르카Arqah 포위는 실패로 끝났지만 약 30척의 영국함대가 큰 도움이 되었다. 


예루살렘함락은 제노바해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99년 6월 17일, 굴리엘모Guglielmo와 프리모 엠브리아코Primo Embriaco 형제의 배 2척이 영국선박 4척과 함께 자파Jaffa에 정박해 있었다. 당시 십자군은 공성무기가 부족해서 예루살렘을 공략하지 못했고 굶주려가던 상태였다. 항구는 파티마Fatimid함대에 봉쇄되어 절망적인 상태였다.  

엠브리아코형제는 배를 해체해 공성무기를 만들었고 십자군은 7월 15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십자군은 허울좋은 성지회복 명목으로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고 무시하던 무슬림은 정 반대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에 놀라울 정도의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아주 잘 재현되었습니다. 


1차 십자군이 엄청난 고난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무한한 신앙심도 있었지만 무슬림진영의 불화도 한몫을 했다. 예루살렘은 적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성지이기 때문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보에몽의 안티오크, 보두앵의 에데사Edessa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서 서로를 도와주지 못했다. 라틴왕국이 생존하려면 유럽의 끊임없는 지원이 필요했고 육로보다는 해로확보가 관건이었다. 

피사Pisa의 토스카Tuscan도시국가가 가장 먼저 대규모함대를 파견했다. 다고베르트Daimbert대주교가 직접 이끄는 함대였다. 

‘그는 3단노서, 드로몬과 쾌속선을 이끌었는데 그 수가 900척에 달했다. 그리고 시리아로 향했다.’



십자군원정 최초로 세워진 에데사백국입니다. 1098년 보두앵 1세를 거쳐 1150년 조슬랭 2세에 이르러 셀주크군에게 멸망되었습니다. 무슬림왕조의 분쟁도 그렇지만 십자군이 세운 백국 또는 공국 사이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일부 기록과 달리 피사의 베르바르도는 과장을 걷어내고 120척이라고 기록했다. 그렇더라도 대단한 규모이고 조직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다고베르트는 우르반 2세가 십자군원정을 발표할 당시에 함께 있었고 그 직후에 바로 원정준비에 나섰다. 

갤리선이 주축이어서 해군만 15,000명이 필요했는데 피사의 모든 남성을 동언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함대는 항로에 있던 레프카다Lefkada와 케팔로니아Cephalonia섬을 약탈해 인력을 보충했고 비잔틴제국은 급히 함대를 보내 막으려했다. 다고르베트는 비잔틴해군을 따돌리고 1099년 9월에 안티오크 부근에 도착했다. 두 번째 피사함대 50척이 로도스에서 베네치아해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불분명하다. 

피사해군은 바로 보에몽에 합류해 비잔틴항구인 라타키아Latakia를 봉쇄했다가 기독교도시를 공격한다는 비난을 받고 물러섰다. 


다고르베트는 보에몽과 보두앵을 따라 12월 21일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다고르베트는 총대주교직을 받아냈다. 성묘수호자Holy Sepulchre 고드프루아는 팔레스타인해안방어에 반드시 피사해군이 필요했다. 

1100년, 다고르베르함대 대부분이 귀국했지만 남은 병력이 1101년 4월 아르수프, 6월 카이사레아를 함락시켰다. 피사해군은 1104년 봄에도 고드프루아의 뒤를 이은 보두앵을 도와 아크레와 주바일을 봉쇄했다. 1107년에는 시돈Sidon을, 1109년에는 트리폴리 포위에도 참가했다. 

‘다고르베트 원정 이후 100년도 안되어서 피사는 안티오크, 트리폴리, 라타키아, 티레, 아크레, 야파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베네치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카스테요Castello주교 엔리코 콘타리니Enrico Contarini 등이 이끄는 200척이 1100년 6월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후에 7월 18일, 고드프루아가 죽기 직전에 야파에 들어섰다. 

고드프루아는 트리폴리를 제외하고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정복한 도시의 1/3을 할애하고 해군작전 기간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 베네치아해군은 8월 20일에 하이파Haifa를 공략해 화답했다. 


제노바해군에 대해서는 원정에 참가한 기록자덕분에 매우 자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 굴리엘모 엠프리아코Guglielmo Embriaco는 1100년 가을에 26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도착해 보에몽이 약속한 안티오크를 요구했다. 

보에몽은 몇 주 전에 다니슈멘트 투르크Danishmend Turk군에게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조카이자 섭정인 탕크레드가 훨씬 후한 조건을 제시하며 제노바해군의 도움을 요청했다. 제노바해군은 마스트에 공성탑을 세워 독보적인 솜씨를 자랑했다. 엠브리아코함대는 1101년 가을에 제노바로 귀국했지만 다른 함대가 1102년과 1104년에도 주바일Jubayl과 아크레 등을 공략했다.

보두앵은 제노바해군의 기여를 인정해 아크레와 아르수프의 교역수입 1/3을 영원히 할애하고 심지어 한 구역의 사법권도 인정했다. 비잔틴해군을 붙잡아두기 위해 매년 상당한 금화, 예루살렘과 야파의 특정 구역, 제노바해군의 도움으로 함락시킨 도시의 1/3, 제노바인의 인권과 재산권 보장을 약속했다. 이 약속이 계속되도록 성묘Holy Sepulchre 성가대에 황금으로 새겨 넣었다. 


1109년 6월, 트리폴리를 함락시킨 후에 다시 베이루트Beirut를 포위해 간단하게 함락시켰다. 제노바해군은 라틴(예루살렘)왕국 초기의 해안도시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노르웨이의 시구르드Sigurd가 1110년 여름에 60척을 이끌고 도착해 시돈Sidon공략을 도와주었지만 십자군원정의 핵심전력은 북부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들이었고 1122년 8월의 베네치아함대가 결정적이었다. 

도제Doge 도메니코 미키엘Domenico Michiel함대는 이집트 파티미드함대에 대승을 거둬 지중해에서 무슬림해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티레항을 포위한 후에 1125년 가을에 리알토Rialto제도로 돌아왔다. 베네치아함대의 활약덕분에 라틴왕국은 30년 동안 무사할 수 있었다. 



도메니코 미키엘입니다. 도제는 베네치아공화국 최고의 지도자로 네덜란드공화국의 통령과 같은 의미입니다. 공화국이니 왕이 없었고 도제를 선출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라틴왕국에서 받은 특권으로 거의 모든 도시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고 성지를 오갈 때마다 비잔틴제국의 영지를 약탈해 황제에게서 지중해동부의 교역권을 얻어냈다. 자연스럽게 서유럽이 크게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상업기지는 긴 중동 파이프의 수도꼭지와 같아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향료, 약재와 염료가 유럽대륙에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