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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7부) - 2/3차 십자군원정

by uesgi2003 2019. 6. 29.


2차 십자군원정(1147~1148)

 

11441224, 이마드 알딘 장기Imad al-Din Zangi의 공병이 에데사의 성벽 일부를 무너트리면서 다시 대대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2일에 걸친 혈전 끝에 무슬림군은 에데사를 점령했고 기독교영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유럽은 즉시 대응에 나섰다. 교황 에우제니오 3Eugenius III가 원정에 나서면 면죄하겠다는 콴툼 프라이테케소레스Quantum praedecessores를 발표하고 당대 최고의 신학자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Bernard of Clairvaux가 십자군참여를 호소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Conrad 3세를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1127~1250년 동안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통치한 장기드왕조입니다. 이후 몽골계 일칸국과 살라딘의 아이유브왕조로 나뉘어졌습니다. 

장기는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던 중에 유럽계 노예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예가 술을 훔쳐 먹는 것을 보고 처벌하겠다고 위협한 후에 잠들었다가 암살당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렬한 호응과 달리 2차 원정은 처음부터 실패가 결정되어 있었다. 시실리의 로제Roger 2세는 대함대로 십자군을 성지까지 수송하겠다고 나섰지만 앙숙이었던 콘라트는 육로를 선택했다.

콘라트군은 11479월 초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프랑스군을 3주 동안 기다리며 셀주크군에게 대응할 여유를 주었다. 콘라트군은 도릴라리움Dorylaeum 부근에서 샐주크군의 매복에 당해 큰 피해를 입었고 니카이아Nicaea까지 궁기병에게 쫓겨 퇴각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무기력하게 귀국길에 올랐다.콘라트는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다.




그림과 달리 셀주크군이 1차 십자군원정에서 당한 패배를 복수한 도릴라리움 2차전입니다. 

 

프랑스군은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 루이는 104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바로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니카이아에 남아 있던 독일패잔병을 흡수한 후에 1148120, 소아시아 남부해안 안탈리아Antalya까지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아사직전에 올리고 끊임없이 무슬림군의 공격에 시달렸기 때문에 전력이 크게 줄어 있었다. 루이는 비잔틴제국이 마련한 배를 타고 안티오크로 갔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육로로 시리아로 이동했다.

건강을 회복한 콘라트는 안티오크의 루이와 합류했다. 독일과 프랑스 연합군만으로는 에데사를 회복할 수 없어서 아크레로 내려가 624일에 라틴왕국 영주들과 전쟁회의를 열었다.

 

십자군은 알레포Aleppo에미르Emir 누르 알딘 장기Nur al-Din Zangi(이마드 앗딘 장기의 아들)가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Damascus를 목표로 결정했다. 724, 십자군은 서쪽 과수원에서 공격하다가 3일 후에 갑자기 동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뜨거운 여름에 식수원을 포기하는 오판이었다.

장기군이 도착하자 십자군은 바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콘라트는 9월에 귀국했고 루이도 시실리해군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봄에 귀국했다. 십자군은 수천명을 잃고도 도시 하나 탈환하지 못했다.



에미르 또는 아미르는 이슬람의 고위직함입니다. 지역에 따라 왕족, 총독, 지휘관과 귀족 등 다양한 고위계층을 말합니다. 

그림은 수백년 후인 19C 아프가니스탄 아미르입니다. 

 

2차 십자군원정은 엉뚱한 곳인 이베리아Iberia반도(지도 참조)에서 결실을 맺었다. 1147519일에 다트마우스Dartmouth를 출발한 앵글로-노르만군이 폭풍을 만나 616일에 포르투갈 도우로Douro강 하구에 피신했다.

포르투갈의 아폰소 헨리케스Afonso Henriques왕은 무어Moor족을 리스본Lisbon에서 몰아내는 대신에 마음껏 약탈하고 인질을 잡아도 좋다고 제안했다.

71일에 공성전이 시작되었지만 1024일까지 함락시키지 못하면서 상당한 병력이 성지로 아예 출발하지도 못했다.


 

이베리아반도 지중해쪽에서는 제노바군이 카스티야Castile의 알폰소Alfonso 7세와 바르셀로나Barcelona의 라몬 베렝게르Ramon Berenguer 백작을 도와 알메리아Almeria를 공략하고 있었다.

포르투갈과는 달리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다. 1146년에 미노르카Minorca와 알메리아Almeria를 약탈하면서 알메리아와 토르토사Tortosa를 공략해주는 대신에 점령지의 1/3과 교역세면제를 받아냈다.

알폰소는 10,000개의 금화를 군자금으로 지원했다.

 

1147년 여름, 제노바는 6명의 콘술Consul과 함께 갤리선 63척과 지원선 163척을 파견했다. 무어족은 소규모함대로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12,000명의 제노바군이 1017일까지 무어족은 결국 알메리아를 포기했다.

전리품과 점령지를 충분히 받아낸 제노바군은 바르셀로나로 가서 겨울을 보내고 1148629일에 토르토사로 출발했다. 연합군은 협곡을 바위와 흙으로 메우고 망고넬Mangonel(그림 참조)과 공성탑으로 성벽을 공격해 1230일에 점령했다.

제노바군은 다시 전리품과 점령지를 받아내고 귀국했다.



 

3차 십자군원정(1187-92)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Yusuf ibn Ayyub11877얼 초에 갈릴리Galilee 서쪽 해변의 티베리아스Tiberias를 공격하면서 3차 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당시 예루살렘왕이었던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은 라틴왕국의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하틴곶Horns of Hattin으로 향했다.

30,000명의 무슬림군은 갈증에 지친 라틴왕국군 20,000명을 이중으로 포위해 전멸시키고 왕과 성십자가True Cross를 손에 넣었다.

그는 3개월 후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무슬림 사이에 정의와 신념이라는 뜻의 살라딘Salah al-Din으로 불렸다.



워낙 멋진 인물이어서 큰 그림으로 대접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제대로 묘사된 살라딘입니다. 

 

당연히 살라딘의 승리는 순조롭지 않았다. 당시 이집트 술탄이었던 그는 장기드Zangid왕조를 통합해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을 통일하려고 했지만 해양력이 문제였다. 보두엥3가 아스칼론Ascalon8개월이나 포위한 끝에 11538월에 점령해 이집트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보두엥의 동생 아모리Amalric(이후 아모리 1세로 즉위)는 이집트를 여러번 위협하다가 1169년 여름에는 비잔틴함대와 함께 다미에타Damietta를 공격했다

살라딘은 조카를 보내 격퇴시켰지만 아모리는 다시 1174년에 시실리왕 윌리암 2세의 도움을 받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공격했다. 병력과 공성무기를 실은 250척의 대함대였다고 한다.

 

살라딘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아모리가 병에 걸려 급사해 위기를 모면했다. 시실리함대는 라틴왕국군이 나타나지 않자 알렉산드리아 부근에서 살라딘의 구원군에게 쫓겨났다. 1177, 살라딘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함대를 편성했다. 라비아의 목재와 기독교유대인을 동원해 갤리션 60척과 수송선 20척을 건조했다.

1182년 말 또는 1183년 초, 트란스요르단Transjordan영주 르노 드 샤티옹Reynaud of Châtillon은 갤리선 5척을 건조해 홍해Red Sea의 이집트와 사우디 해안과 무슬림순례자를 습격했다. 살라딘의 동생, 이집트총독은 급히 함대를 홍해로 보내 이들을 내쫓았다. 살라딘은 르노가 성지인 메카Mecca를 노린 것으로 보고 후환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11839, 살라딘은 갈릴리와 트란스요르단을 침공해 케락Kerak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안정도 시급했기 때문에 1185년에 휴전했다.

르노는 트란스요르단을 지나는 무슬림 대상을 공격해 살라딘을 다시 전쟁으로 끌어들였고 살라딘은 11877얼에 하틴곶에서 르노와 라틴왕국에게 철저하게 복수했다. 그는 몇주만에 아크레, 베이루트, 시돈, 하이파, 아르수프, 야파와 아스칼론을 점령했다.

9월이 되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항구와 시리아해안 대부분을 장악했다. 트리폴리와 티레만 남았다. 118710, 티레의 대주교가 서유럽으로 건너가 위기를 알렸고 교황 그레고리Gregory 8세가 3차 십자군원정을 호소했다.

 

이번에도 왕이 먼저 움직였다. 시실리왕 윌리암 2세는 1188년 여름에 갤리선 60척을 파견했다.

누구나 기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왕의 도움으로 안티오크와 트리폴리를 지켰다. 티레를 구원했고 시민을 굶주림과 칼에서 지켜냈다.’

시실리군은 살라딘이 트리폴리와 티레를 공격하지 못하게 막아내고 살라딘군을 따라 북진했다. 살라딘군이 마라클레아Maraclea를 지날 때에는 아예 해안에 함대를 나란히 늘어놓고 화살과 돌을 쏘며 길목을 차단했다. 살라딘은 거대한 방패벽을 설치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시실리군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ederick I Barbarossa,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아우구스투스Philip II Augustus, 영국의 리차드 1세 라이온하트Richard I Lionheart가 군대를 움직였다.



신성로마제국황제가 제대로 도착했다면 살라딘의 신화가 조기에 끝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얕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 주장도 있고 뜨겁게 달궈진 갑옷을 입고 물에 빠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문제는 병참과 수송이었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수만 명의 병력을 육로로 이동시키다가 1190710일에 셀레프Seleph(현재의 Göksu)에서 익사했고 극소수만 성지에 도착했다.

필리프와 리차드는 해로를 선택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선 당시의 해상이동은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막대한 군자금이 들었고 모든 동산에 십일조Saladin Tithe를 부과했다. 두 사람은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함께 출발했다가 필리프는 제노바에서 기사 650명과 종자 1,300명과 함께 빌린 배를 탔고 리차드는 마르세이유Marseilles로 가서 10척의 수송선과 20척의 무장갤리선을 빌렸다.

필리프는 916일에 메시나Messina에 도착했고 리차드도 몇 주 후에 대환영을 받으며 들어섰다. 리차드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모은 갤리선 108척은 이미 시실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실리에서 겨울을 보내며 시실리왕 탕그레드Tancred에게서 군자금을 뜯어냈다. 리차드는 심지어 전설의 엑스캘리버라며 갤리선 15척과 대형수송선 4척과 강제로 교환했다.

필리프는 1191320일에 성지로 향했고 리차드는 3주 후에 시실리의 조안나Joanna여왕(사망한 윌리암 2세의 미망인)까지 데리고 갔다. 리차드의 함대는 200척 이상으로 불어났다.

필리프는 420일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십자군은 군량을 가득 실은 대함대라고 기록했지만 살라딘군은 겨우 수송선 6척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리차드는 필리프와 달리 야심만만했다. 그는 로도스섬으로 향했다가 폭풍으로 25척이 방향을 잃었는데 약혼녀와 조안나여왕이 탄 배가 키프러스Cyprus 남쪽 해변으로 흘러갔다. 키프러스 통치자 이삭 콤네우스Isaac Komnenos는 비잔틴제국의 왕가였지만 살라딘과 동맹관계였기 때문에 십자군이 반갑지 않았다. 두 여성은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배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들은 리차드는 즉시 키프러스로 향해 두 여성을 포함한 포로를 모두 구출했다. 리차드는 방문한 기 드 뤼지냥에게 병력을 맡기고 이삭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반대방향으로 섬을 일주하면서 성과 마을을 점령했다.

이삭은 딸이 사로잡히자 항복했고 키프러스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리차드는 6월 중순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1188년 여름에 포로가 되었다가 살라딘의 자비로 풀려난 기는 11898월 말에 소수의 병력만으로 아크레를 포위했었는데 순례자가 밀려들면서 병력이 크게 불어났다. 50척의 피사함대도 합류했다.

살라딘이 병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피사함대가 지중해의 동맥역할을 하며 병력과 군수품을 실어날랐고 덴마크와 프리슬란트Frisian함대가 9월에 십자군 12,000명을 데리고 도착했다.

살라딘은 103150척의 함대로 십자군증원을 막으려 했고 콘라드가 티레에서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끌고와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양측이 부딪치자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러펴졌고 서로에게 무기를 발사했다. 우리군은 신의 가호를 바라며 힘껏 노를 저어 선수를 적선에게 돌진시켰다. 바로 전투가 벌어졌다.

노가 엉키고 백병전이 일어났다. 우리군은 적선에게 견인줄을 던져 끌어당겼고 그리스불로 가갑판에 불을 질렀다.

그리스불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고 푸르스름한 화염을 뿜으며 목재와 철을 태웠다. 물로도 안꺼지고 모래를 부어야 했다. 식초를 부으면 불길이 줄어들었다. 해전에서 이보다 무서운 무기가 있을까?‘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살라딘함대는 아크레로 피신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살라딘은 다시 25척의 함대를 투입해 포위망을 뚫고 아크레에 군수품을 보급했고 십자군선박으로 위장해 400자루의 곡식을 반입시키기도 했다.

929일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15척의 함대가 포위망을 뚫었지만 12월 말에는 태풍으로 보급선 7척이 침몰했다. 리차드는 11916월 초에 에미르 7, 병사 800명과 보급품을 가득 실은 대형선박을 공격해 좌초시켰다.

십자군함대가 대승을 거두지 못했었도 살라딘함대의 전력은 출혈이 계속되었고 무엇보다 도시에 보급을 해야 하는 살라딘에게 손해가 막심했다. 전령을 잠수시켜 도시에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지경까지 몰렸다.

살라딘은 아크레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팔레스타인 남부해안의 주요 항구의 성채가 십자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부수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사정도 급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 아크레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1190925, 피사군은 공성탑과 긴 사다리를 만들어 가죽으로 씌운 후에 외곽 탑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무슬림군은 그리스불로 피사군의 공성무기를 불태웠다.

119168, 리차드가 도착하자 십자군진영은 기세를 크게 올리며 돌파구를 마련했다. 리차드는 필리프와 함께 투석기로 성벽을 두들기는 동시에 성벽 여러 곳에 터널을 팠다. 7월 초가 되자 저주받은 탑Cursed Tower 옆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큰 구멍이 생겼고 무슬림군은 12일에 항복했다.

살라딘의 핵심전력 이집트함대는 아크레의 내부항에 정박해 있었다. 조금씩 포위망에 갇힌 선박은 70척까지 불어났다. 십자군은 함대를 고스란히 손에 넣어 해군전력을 크게 늘렸고 살라딘은 지중해를 다시 잃었다.’




이 자료에서는 필리프가 계획대로 귀국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리차드와 공적을 두고 원수지간으로 벌어졌다고 합니다. 필리프군이 아크레 성벽에 깃발을 세우자, 리차드가 격노해서 깃발을 뽑아 던졌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앙주제국(영국과 프랑스 연합)과 프랑스왕국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왕과의 관계가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필리프는 먼저 귀국해 리차드의 동생 존과 신성로마제국황제와 결탁해 리차드의 귀국길을 막았고 리차드는 우회하던 중에 포로가 되어 어마어마한 몸값을 치루고 석방되었습니다. 

 

필리프는 목표를 달성하자 귀국했지만 리차드는 곧바로 십자군함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야파를 탈환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로 했다. 15,000명의 십자군이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822, 가장 외곽은 보병, 중앙은 기병, 해안쪽은 보병과 수송대의 3열이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수프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살라딘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야파와 아스칼론을 탈환했다.

그렇지만 리차드는 살라딘의 견제를 받으며 내륙에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랐다. 살라딘도 아스칼론 상실은 이집트 본국에게 큰 위협이었다.



 

119292, 두 사람은 기독교인이 성묘에 참배할 수 있다는 휴전을 맺었다. 리차드는 109일에 귀국길에 올랐다가 레오폴트Leopold 5세의 포로가 되었다.

리차드가 키프러스와 아크레를 점령하고 살라딘함대를 노획한 덕분에 라틴왕국은 이후 100년을 버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