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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8부) - 4/5차 십자군원정

by uesgi2003 2019. 8. 20.


4차 십자군원정(1198~1204)


3차 십자군원정에서 예루살렘과 성십자가를 되찾지 못했고 유럽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새 교황 이노첸시오Innocent 3세는 예루살렘 성좌Holy See로 선출된 후 8개월 만인 1198년 1월에 4차 십자군원정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공허했고 어떤 왕도 응답하지 않았다. 리차드와 필리프는 3차 원정에서 입은 손실과 국내문제에 발목을 잡혔고 신성로마제국은 하인리히Henry Hohenstaufen 6세가 1197년에 죽은 후에 혼란스러웠다. 

대신에 고위귀족층, 특히 1차 십자군원정에 참전했던 가문이 움직였다. 샹파뉴의 테오발드 3세Thibald III of Champagne와 블루아의 루이 1세Louis I of Blois가 1199년 11월 말에 참전을 선언했다. 몇 개월 후에 플랑드르의 보두엥 9세Baldwin IX of Flanders가 그 뒤를 따랐다. 세 백작은 각각 2명의 대리인을 시켜 베니스와 수송선문제를 협의했다. 



루이 1세의 인장



동로마제국의 황제까지 오른 보두앵 1세입니다. 역시 높은 자리에 가야 이렇게 뽀샵처리가 됩니다. 


1201년 4월, 도제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는 보병 20,000명, 기사 4,500명, 종자 9,000명과 군마를 85,000개 은화를 선불로 받고 수송해주기로 합의했다. 베니스는 50척의 갤리선을 전리품을 받고 갤리선 50척을 제공하기로 했다. 

자금과 협의 때문에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집트가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해졌다. 문제는 십자군의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엉뚱한 방향에 열기가 식어 33,500명 중에 겨우 13,000명이 베니스에 도착했다. 

설상가상으로 참전귀족들이 재산을 내놓았는데도 은화 51,000개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단돌로는 십자군원정을 돕고 시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차액인 은화 34,000개를 대출로 바꾸는 대신에 헝가리왕국의 문제거리인 자라Zara(현재의 자다르Zadar) 요구했다. 



당시로는 엄청난 고령인 86세에 도제에 오른 단돌로입니다. 심지어 실명까지 했는데도 베니스를 해양강대국으로 이끌었습니다. 


십자군은 자라가 교황보호령인 기독교도시인데도 어쩔 수 없이 이 조건에 동의했다. 이노첸시아교황은 분통을 터트렸다가 뉘늦은 사과를 받아들였다. 11월 24일에 자라가 함락되었지만 항해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자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비잔틴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Isaac II Angelos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가 또다시 십자군의 일탈을 부추기는 제안을 가져왔다. 이사키오스는 형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Alexios III Angelos에게 몰려난 상태였고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은화 200,000개, 1년간의 보급품, 그리스병사 10,000명 파병, 십자군기사 500명의 주둔비를 제시했다. 

베니스군이 거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1118년, 요안니스 2세 콤니누스John II Komnenos가 베니스와의 요역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위태로웠다. 그리고 1126년에는 베니스함대가 비잔틴제국의 영토를 약탈해 협정부활을 강요하는 사건도 있었다. 

1148년에는 비잔틴-베니스연합군이 노르만족의 코르푸를 포위했지만 분쟁이 생기자 베니스군이 비잔틴선박을 나포하고 이디오피아 노예를 왕좌에 앉혀 마누일Manuel 1세를 모욕했다. 작전을 위해 참았던 황제의 감정은 1170년에 불거졌다.

그는 베니스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제노바와 피사 거주구역을 허용했다. 베니스는 제노바 거주구역을 습격해 막대한 재산과 인명피해를 입혔다. 황제는 제국내의 모든 베니스인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20,000명의 베니스인이 체포되었다.


도제 비탈 2세 미키엘Vitale II Michiel은 갤리선 100척과 수송선 20척의 함대로 위협에 나섰다가 질병이 퍼져 큰 피해를 입고 되돌아갔다. 체포된 베니스인은 대부분 10년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황제는 전령을 보내 베니스를 꾸짖었다. 

4차 십자군원정 당시 엔리코 단돌로는 90대 초반으로 비잔틴제국과 베니스의 갈등을 몸소 목격했기 때문에 알렉시오스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교황의 문책이 두려웠지만, 당시 십자군 지휘관이었던 몬테라토의 보니파치오Boniface of Montferrat후작의 부인이 알렉시오스의 여동생으로 십자군의 참여도 문제없었다. 


1203년 6월 24일, 300개의 투석기로 무장한 200척의 함대가 보스포러스만에 들어서 콘스탄티노플 반대편에 정박했다. 7월 6일, 십자군은 황금곶Golden Horn(지도 참조) 북쪽해안을 공격해 만입구를 사슬로 봉쇄하는 탑을 장악했다. 

‘배가 뭍에 오르자마자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왔다. 수송선은 기사가 바로 나올 수 있게 문과 다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십자군은 만을 봉쇄한 사슬을 잘라 나머지 베니스함대가 들어올 수 있게 해 항구에 있는 비잔틴함대를 노획했다. 육군은 북동쪽 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7월 17일, 십자군은 육지쪽 성벽을 공격하고 베니스함대는 바다쪽 성벽을 공격했다. 성벽의 높이가 9m나 되었지만 베니스가 공성무기를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쉽게 올라섰다. 



25개의 탑을 빼앗기자 비잔틴군이 밖으로 나와 베니스군을 밀어냈다. 십자군의 공격에 놀란 알렉시오스 3세는 밤에 달아났고 감옥에서 풀려난 이사키오스는 아들과 함께 공동황제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한 금액 중 절반만 지불할 수 있었고 세금을 강요당한 민심이 요동쳤다. 1204년 1월, 재무대신이 반란을 일으키고 알렉시오스 5세에 올랐다. 그리고 시민과 십자군 사이에 대대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십자군지휘관은 즉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부분의 십자군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27,000명의 베니스선원이 동원되었다. 


1204년 4월 9일, 첫 번째 공격은 병력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아 실패했다. 3일 후에 대대적인 공격으로 성문을 열고 3일 동안 약탈했다. 약탈물 3/4는 베니스군이 차지했다, 투표로 황제를 뽑아 제국의 1/4를 주고 나머지는 십자군과 베니스군이 차지하기로 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이 황제로 선발되었고 베니스가 제국의 알짜를 모두 차지해 지중해 최고의 해양세력이 되었다. 



5차 십자군원정(1213~21)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4차 십자군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원정을 호소하며 전선을 여러 곳으로 확대했다. 4차 십자군원정 훨씬 이전인 1199년 10월에는 발트해지역의 이교도에 대해 라트비아십자군Livonian Crusade을 선언했었다. 

1208년 1월 14일, 교황사절 카스텔로의 베드로Peter of Castelnau가 살해당하자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Cathar 이단에 대해 알비Albigensian십자군을 선포했다. 1212년 봄에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가 안달루시아의 무하히드왕조 정벌을 십자군으로 선포했다. 7얼 17일에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렇지만 실제 5차 십자군원정은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걸렸다. 1215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의 즉위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십자군참전을 받아냈고 1216년 7월 16일에 교황이 죽을 때까지 참전을 호소했다. 

5차원정이 예정된 1217년 여름이 되었는데도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지지기반이 약해서 큰 힘이 되지 못했다 헝가리의 언드리시 1세Andrew of Hungary,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6세, 키프러스의 위그Hugh 1세가 아크레에 모여 예루살렘왕 장 드 브리엔John of Brienne과 함께 12171~18년 겨울에 시리아를 몇 차례 공격했다. 

1218년 4월, 유럽함대가 도착하자 목표가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로 바뀌었다. 



1218년 5월 29일, 십자군함대가 다미에타 부근에 도착해 나일강 서쪽 강변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다미에타는 서쪽에 나일강이 있었고 동쪽에 만잘라호수라는 천혜의 장벽이 있었고 3중 성벽이 단단했기 때문에 육군만으로는 공략하기 힘들었다. 

강물을 따라 방어탑이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었고 무거운 쇠사슬이 길을 막고 있어서 해상공격도 쉽지 않았다. 십자군은 전체함대가 다미에타로 진입할 수 있도록 우선 쇠사슬 방어탑부터 점령하기로 했다. 

6월 24일, 탑 반대편에 진영을 차린 후에 배 두척을 묶어 큰 사다리를 놓고 세 번째 선박의 돛대에는 작은 성채를 올렸다. 2개의 사다리는 무너져 내려 많은 십자군이 떨어져 죽었고 성채선박은 그리스 불에 쫓겨 달아났다. 


8월 24일, 재공격으로 쇠사슬 방어탑을 점령했다. 술탄 알 아딜al-Adil은 8월 31일에 병사하고 아들 알카밀al-Kamil이 바로 대응에 나섰다. 진흙으로 방벽을 세우고 대형 말뚝을 박은 배를 침몰시켜 강을 막았다. 

수송로를 잃은 십자군은 지중해와 나일강 서쪽 강변 사이를 흐르는 수로를 깊게 파고 배를 견인해 띄워 위기를 수습했다. 

이집트군은 십자군진영을 몇 차례 공격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자 공격과 수비 모두 고통스러워졌다. 11월 말, 나일강이 범람해 십자군진영이 물에 잠겼다.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지경이었다. 십자군과 다미에타에 전염병이 번졌다. 


1219년 2월, 알 카밀은 정치문제로 급히 카이로로 돌아갔고 십자군은 이제 동쪽 강변까지 진출해 부교를 설치했다. 여름에는 배 38척을 동원해 두 번째 부교를 놓았다. 

그렇지만 도시를 함락시키기에는 병력이 모자랐다. 9월이 되자 다미에타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알 카밀은 예루살렘왕국을 거의 대부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성십자가도 내놓았다. 

교황대리의 완강한 반대로 휴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1219년 11월 5일, 사체가 널린 다미에타가 드디어 함락되었다. 부근에 있던 이집트군은 나일강 60km 상류로 퇴각했다. 



십자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지도부의 분열과 반목으로 다미에타에 20개월이나 머물렀다. 브리엔의 장과 알바노의 펠라기우스가 반목의 초점이었고 나머지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장은 마음대로 총사령관직을 내려 놓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고 프랑스와 영국의 새로운 병력이 도착했다. 

1220년 11월 22일에 신성로마제국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늦어도 다음 항해시기에 병력을 보내겠다고 맹세했다. 펠라기우스가 총사령관을 맡아 신성로마제국군을 기다렸다. 

1221년 5월, 첫 번째 제국군이 도착했다. 갤리선 40척의 함대도 보냈지만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극을 막지 못했다. 




1221년 7월 7일, 교황의 재촉을 받은 장이 병력을 이끌고 돌아왔고 십자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사 1,200명, 궁수 4,000명, 정확하지 않은 수의 보병의 막대한 전력이었다. 630척의 각종 선박이 뒤를 따랐다고 하는데 상당한 과장으로 보인다. 

십자군은 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수우라Mansourah 북쪽에 머물렀다. 십자군이 워낙 오랫동안 다미에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강력한 요새를 구축할 수 있었고 다마스쿠스 에미르가 병력을 이끌고 합류한 상태였다. 

알 카밀은 십자군의 기세에 눌려 다시 한 번 이전의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는데 실제로는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8월이 되면 나일강의 연례적인 범람시기였다. 그는 십자군 몰래 함대 일부를 나일강에 진입시켜 퇴로를 차단했다. 


예상대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강변을 위협하자 알 카밀은 수위를 조절하는 수문을 열었다. 8월 29일, 함정에 빠진 십자군은 허리까지 불어난 물 속에서 휴전을 애원했다. 알 카밀은 9월 8일에 다미에타를 탈환하고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