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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9부) - 6/7/8차 십자군원정

by uesgi2003 2019. 8. 23.


6차 십자군원정 (1224~9)


5차 십자군원정의 참담한 실패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교황의 비난을 염려한 그는 함대제독을 수감하고 말타Malta영지를 몰수했다. 그리고 새로운 원정을 기획했다. 

1224년 3월, 프리드리히는 교황에게 원정을 약속하고 100척의 함대를 준비 중이라고 알렸다. 국내문제 때문에 약속한 1225년 6월 24일은을 흘려 보내고 파문의 위협에 못이겨 1227년 8월 15일에 직접 원정을 이끌겠다고 다시 맹세했다. 50척의 갈레아선과 100척의 수송선, 최소한 1,000명의 기사를 2년 동안 자신의 부담으로 성지에 주둔시키겠다고 맹세했다. 

황제는 예루살렘여왕 이사벨라Isabella 2세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는 실제로 1227년 9월에 원정길에 나섰지만 병에 걸려 되돌아왔고 대신에 튜턴기사단Teutonic Knights단장 헤르만 폰 잘차Herman von Salza에게 50척의 갤리선을, 림베르크의 헨리공Duke Henry of Limberg에게 수송함대를 맡겼다. 

교황 그레고리Gregory 9세는 인내심이 부족했고 재촉을 못이긴 프리드리히는 1228년 6월에 다시 원정길에 올랐다. 키푸러스에 들려 황제의 권위를 세운 후에 1228년 9월 초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약 70척의 선박을 이끌고 왔다고 한다. 이전 해에 보낸 함대와 합치면 상당한 전력이었다. 최소한 90척의 전투용 갤리선, 100척의 수송선, 총 190척의 대함대였다. 


프리드리히는 알 카밀이 당연히 협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5차 십자군원정에서 이미 두차례나 협상을 제안했었고 1226년 초에는 사절을 보내 형제이자 정적인 다마스쿠스 에미르를 상대하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그렇지만 1227년에 정적이 사라지자 신성로마제국과의 동맹은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프리드리히는 3차 십자군원정의 리차드처럼 병력을 이끌고 남진하고 함대는 해안선을 따라 엄호하게 했다. 야파에 도착하자 요새를 건설했다. 

갤리선은 100~150명의 수병이 노를 저었고 모두 전투병이었기 때문에 190척 함대의 해군만으로도 20,000명의 대병력이었다. 


알 카밀은 2월 18일에 10년의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해안으로 이어지는 베들레헴Bethlehem과 나자레스Nazareth도 내놓았다. 프리드리히는 3월 17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라인왕국의 왕관을 직접 머리에 얹었다. 

그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앞서 4차례나 실패했던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지만 이교도와 협상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교황을 여전히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교황군은 이탈리아 남부의 영지를 공격했다. 

예루살렘여왕 이사벨라 2세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에 라틴왕국의 귀족도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온갖 모욕을 겪으며 서둘러 아크레를 떠나 귀국했다. 




7차 십자군원정(1244~50)


1229년 프리드리히가 맺은 협정은 1244년 여름에 화레즘Khwarezmian 용병 때문에 무효가 되었다. 화레즘용병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노예전사부족으로 11세기 말에 투르크의 화레즘지역에 왕조를 세웠다. 

13세기 말, 징기스 칸Genghis Khan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몽골의 용병이 되었다. 베르케Berke 칸의 10,000명이 이집트 술탄에게 고용되어 1244년 7월 11일에 갑자기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예루살렘은 8월 23일에 함락되었고 성묘성당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기사수도단Military Orders과 다마스쿠스 연합군은 10월 17일에 가자Gaza에서 화레즘군과 일전을 벌였다가 소수의 기사만 살아남았다. 



당시 가장 신앙심이 강했던 프랑스의 루이Louis 9세는 아내가 중병 중인데도 원정을 호소하고 나섰다. 그는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성십자가의 일부 등 성유물을 받았기 때문에 원정준비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제노바와 마르세이유에게 44척의 대형 수송선건조를 부탁하고 2년에 걸쳐 키프러스에 막대한 군수품을 비축했다. 4년의 준비기간과 2,000,000 프랑스 금화가 들었다. 당시 왕실의 수입이 250,000에 불과했기 때문에 엄청난 투자였다. 



1248년 8얼 28일, 루이는 드디어 기함을 타고 출발해 9월 17일에 키프러스에 도착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섬에서 겨울을 보내며 병력을 모으고 전략을 결정했다. 이전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5차 십자군처럼 다미에타가 일차 목표물이 되었다. 자료에 따라 1,800척에 이르는 대함대였지만 홀수선이 깊어서 나일강에서는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수송선 32척이 2,800명의 기사와 군마를 수송하기로 했다. 

루이는 이듬해 6월 4일에 다미에타 하구에 도착했다. 이슬람 기마병이 해안선을 따라 정렬해 있었고 루이는 해안에 다가서지 못하고 바다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새벽에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기사는 갤리선이나 작은 선박을 타고 일반 전투병으로 참전해야 했다. 


이튿날 새벽 일부 선박이 뒤집혀 익사자가 생겼지만 십자군은 해변에 올라섰고 곧바로 2,000~6,000명에 이르는 이슬람군이 달려들었다. 

‘우리는 방패의 날카로운 끝을 모래에 박고 창을 땅에 고정시키고 적을 맞이했다. 적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최소한 300명 이상의 선원이 합류했다. 

갤리선이 모래 위로 올라오자 중무장한 백작과 기사가 해변으로 뛰어내려 우리 옆에 섰다.’

홀수선이 깊은 선박에 탔던 병력은 운이 나빴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적의 화살세례를 받았다 5,000명의 십자군 궁수가 반격에 나서 이슬람궁수를 쫓아냈다. 



십자군은 상륙에 성공했다. 십자군은 극소수를 잃은 반면에 이슬람군은 500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십자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다미에타에 입성했다. 5차 십자군이 1년 반 만에 공략한 도시를 7차 십자군은 겨우 하루 반 만에 공략했다. 

루이는 여전히 신중했다. 곧바로 나일강을 올라가지 않고 연례적인 범람을 기다렸다가 11월 20일에 카이로Cairo로 향했다. 십자군에게는 다행히도 술탄의 사망으로 이집트왕궁이 혼란에 빠졌다. 

술탄에 오른 파흐르 알딘Fakhr al-Din은 강 반대편에 전진기지를 펼쳤다. 루이는 투석기를 대거 투입해 도강하려고 했지만 무슬림군도 투석기로 그리스불을 쏘며 막았다. 


1250년 2월 8일, 루이는 동생 로베르Robert와 기사 600명을 아래로 몰래 내려보내 강을 건넜다. 로베르는 본대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무슬림본진으로 난입해 파흐르 알딘을 죽였다. 만약 그대로 멈췄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을텐데 무모하게 만수우라Mansourah로 부대를 몰았다. 

기사들은 좁은 거리에 분산되어 고립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마을 안에는 강력한 맘루크Mamluk 병사들이 대기 중이었다. 중앙아시아 노예에서 선발해 전쟁용으로 육성한 맘루크는 십자군기사를 전멸시켰고 로베르도 전사했다. 

루이는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길에 늘어진 보급로를 생각하면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2월 25일 새 술탄이 만수우라에 도착했고 50척의 갤리선을 투입해 보급로를 끊었다. 무슬림군은 온갖 군수품과 식량이 실린 보급선 150척을 노획하고 선원을 죽였다. 

‘굶주린 나머지 건강했던 사람도 뼈다귀로 변했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말, 당나귀, 노새와 소가 죽으면 잔치를 벌였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어서 아무 것이나 먹었다.’

4월 5일, 루이는 결국 다미에타로 철수를 결정했다. 부상병과 환자를 남은 배에 태워 천운에 맡긴 채로 보내고 나머지는 북쪽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무슬림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나아갔다. 간절한 소망과 달리 대부분의 배는 무슬림해군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7,000명 이상의 십자군이 죽고 20,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가 대부분 처형되었다. 루이를 포함한 고위층만 몸값용으로 살아남았다. 





8차 십자군 (1265~70)


1250년 5월 6일, 루이 9세는 800,000 금화를 물어주고 풀려났다.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물러나서 4년간 머무르며 야파와 아크레 등을 방어했다. 막대한 군자금은 자신이 부담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의 라틴왕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상태였다. 

십자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운 맘루크는 아이유브왕조를 무너트리고 맘루크왕조를 세웠다. 1260년에는 갈릴리 아인잘루트Ayn Jalut에서 무적의 몽골군을 격파했다. 10월 22일, 승전을 거둔 바이바르스Baybars는 이집트를 다른 지휘관에게 맡기고 몽골 일칸국Mongol Ilkhanate of Persia의 동맹인 라틴왕국으로 향했다. 

그는 라틴왕국의 항구를 하나씩 점령해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고 카에사레아와 아르수프를 연달아 무너트렸다. 당연히 유럽에는 경고가 울렸다. 


1266년 8월, 교황 클레멘시아Clement 4세는 십자군원정을 호소했고 이번에도 프랑스가 먼저 화답했다. 루이 9세는 1267년 3월 25일에 원정을 맹세하며 이전의 규모를 넘어서는 준비를 시작했다. 

1268년, 마르세이유, 제노바, 베니스 등 당시 최고의 해양도시와 대규모 운항계약을 맺었다. 제노바에서 임대한 코그Round Ship선은 길이 37.4m, 너비 10.04m로 엄청난 크기였고 100마리의 군마를 실을 수 있었다. 베니스는 훨씬 더 큰 수송선 15척을 약속했다. 4,000마리의 군마와 병력 10,000명을 실을 수 있는 규모였다. 

루이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정은 기대와 달리 재앙으로 변했다. 


원정준비와 실행이 크게 지연되면서 바이바르스가 야파를 점령하고 안티오크도 잿더미로 만들었다. 1270년 7월 2일, 루이는 팔레스타인으로 직행하지 않고 사르디니아Sardinia를 통해 튀니지로 향하는, 이해 못할 결정을 했다. 

시실리왕이자 동생인 샤를Charles of Anjou의 조언에 따라 튀니지통치자 아부 압달라Abu Abdallah를 압박해 맘루크 이집트를 함께 침공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8월 25일, 루이와 병사들은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을 못이기고 병에 걸려 죽었고 나머지는 시실리로 퇴각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원정을 끝냈다. 

2191년 5월 18일, 맘루크군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중요한 아크레를 점령했다. 한 달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라틴왕국은 티레, 베이루트와 시돈을 포기했고 모든 병력은 키프러스로 탈출했다. 



십자군원정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지만 제노바, 피사와 베니스 등의 해양국가는 지중해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