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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중세해전 이야기 (10부) - 피사와 제노바의 분쟁

by uesgi2003 2019. 11. 16.

 

업데이트가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도 잊지 않고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시리즈도 너무 길어지고 있어서 적당한 순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중세해전 이야기 (10부) - 피사와 제노바의 분쟁

 

피사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해적이 피사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파티마왕조는 다른 도시도 약탈했고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사르데냐, 지도 참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12세기 기록을 보면 사라센이 1004년에 피사를 점령했다고 한다. 

이듬해에 피사군이 레조디Reggio를 보복공격한 것을 보면 부정확한 기록으로 보인다. 피사는 1011년에 다시 습격을 받았고 제노바와 피사는 공동의 적인 무자히드 압-알라 알-시클라비Mujahid ibn Abd-Allah al-Siqlabi를 상대로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부모에게서 태어난 무자히드는 무슬림궁전의 거세노예였다가 능력을 발휘해 계속 지위를 높여갔다. 내전이 벌어지자 토르토사Tortosa에 거점을 마련한 후에 이베리아 남동쪽 해안의 데니아Denia로 이동해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1014년경, 그는 발레아루스제도Balearic Islands(지도 참조)로 거점을 옮겨 해적왕으로 변신했다. 1015년, 그는 1,000기의 기마와 120척의 전선을 투입해 사르디니아를 약탈했다. 그해 여름에는 투스카니Tuscany와 리구리아Liguria 사이의 해안지역도 습격하면서 제노바와 피사에 경고를 울렸다. 

 

 

 

 

두 신흥도시국가는 사르디니아를 해적의 거점을 둘 수 없었다. 이탈리아 해안이 계속 습격당하면 두 도시의 운명은 뻔했다. 연합함대는 사르디니아로 향헸다. 상당한 규모로 알려진 연합군이 먼바다에 나타나자 무자히드의 함대는 그대로 달아났다.

그는 전력을 보충한 후에 다시 돌아와 사르디니아 거주민을 동원해 요새를 짓고 생매장했다. 

5월에 연합함대가 나타나 달아나려는 무자히드함대를 간발의 차이로 붙잡고 큰 피해를 입혔다. 살아남은 무슬림선박은 폭풍에 떠밀려 난파되었고 사르디니아주민은 표류하는 해적을 잡아죽였다.

무자히드는 살아남았지만 다시는 사르디니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두 도시는 더 이상 협력하지 않았다. 무슬림해적이 자취를 감추기도 전에 두 도시는 사르디니아를 두고 충돌했다. 사르디니아의 가축, 곡식, 귀금속과 소금은 너무 중요한 자원이어서 상대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제노바는 투스카니동맹도시를 끌여 들였지만 피사가 승리를 거두고 경쟁자를 물리쳤다. 안타깝게도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초반의 전투는 도시가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무장상선단 사이의 이익충돌로 보인다.

피사는 사르디니아를 손에 넣자 본격적으로 확장에 나섰다. 1034년, 함대를 보내 현재의 알제리 아나바Annaba인 보나Bona를 공격했다. 1030년에 당했던 습격에 대한 보복목적도 있었다. 

1063년 9월에는 팔레르모를 습격했다. 피사는 로제 드 오트빌Roger de Hauteville에게 노르만기사를 이끌고 합류할 것을 권유했지만 피사가 이익만 노린다고 거절당했다. 피사군은 습격을 단행해 항구의 쇠사슬을 끊고 대형 상선 5척을 불태우고 한척을 노획했다. 

강하구에 상륙해 도시의 남동쪽으로 따라 이동하면서 며칠 동안 약탈하고 그 돈으로 대성당을 지었다. 산타 마리아 아순타Santa Maria Assunta 대성당의 전면에는 팔레르모공격을 장식했고 지금도 정문 왼쪽에서 볼 수 있다. 

 

 

 

 

제노바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066년, 제노바함대가 아르노Arno강 하구에 나타나 피사를 위협했다.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두 도시의 상선대는 이후 20년 동안 서로를 공격했다. 

예를 들어 1072년에는 피사의 습격대가 제노바로 향했다가 폭풍을 만나 포르토피노Portofino로 피신했었고 1077년에는 제노바함대가 피사의 보호령인 바다Vada를 공격했다가 라팔로Rapallo가 보복공격당했다. 

이듬해에는 제노바함대가 다시 아르노하구에 들어섰다가 피사군에게 쫓겨났다. 두 도시는 1086년까지 계속 충돌하다가 교황의 중재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11세가 말, 두 도시는 교역로를 프로방스, 카탈루냐와 북아프리카까지 넓혔다. 심지어 1070~80년 동안 마그레브 지리드Zirids왕국과도 상업조약을 맺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살레르노Salerno에 이르는 기독교항구와의 교역에 힘을 얻어 베니스와 아말피가 독점하던 동쪽 교역권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슬림이 장악한 시실리가 동쪽 진출을 막고 있었고 무슬림과 우호관계였던 아말피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1087년에 노르만족이 시실리를 점령하면서 균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마디아가 걸림돌이었다. 

시실리해협 남쪽의 작은 반도에 있는 지리드 도시가 특히 문제였다. 에미르 타밈Tamim은 긷도교 해안도시를 자주 약탈했고 마디아를 끌어들여 서쪽 기독교국가의 해양교역로를 위협했다.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두 도시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기록에 따르면 교황의 축복과 함께 두 도시는 3개월 만에 1,000척을 모았다. 이슬람자료에서도 3~400척에 30,000명의 전투병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상당한 전력이었다. 무슬림에 우호적이었던 아말피도 합류했다. 반면에 시실리의 노르만군은 무슬림과 맺은 조약 때문에 합류하지 않았다. 

기독교연합함대는 시실리와 현재의 튀니지 걒봉Cape Bon 중간에 있는 판텔레리아Pantelleria에 집결해 무슬림수비대를 진압했다. 1087년 8월 6일, 함대가 마디아 밖에 정박했다. 때마침 에미르 타맘은 베두인족을 공격을 막기 위해 도시를 비운 상태였다. 

연합군은 자윌라Zawilah(지도 참조)에 안전하게 상륙하고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타밈이 급하게 돌아왔지만 병력 대부분이 죽고 해안의 함대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는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간청했다. 

 

 

 

 

3~80,000 금화를 지불하고 기독교포로를 모두 석방하고 기독교인을 공격하거나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밖에도 엄청난 약탈물로 원정비용을 채우고도 남았다. 피사군은 대성당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승전일의 성자에게 바치는 새 성당을 건축했다. 

원정의 최고성과는 지리드해군의 궤멸이었다. 이제 동쪽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렸다. 시기도 더없이 좋았다. 겨우 8년 후인 1095년에, 우르바노 2세Urban II가 십자군원정을 호소하면서 제노바와 피사는 지중해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듯이 두 도시는 십자군원정의 주역으로 참전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를 모두 손에 넣었다. 그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은 거주구역에서 무슬림상인의 후추, 염료, 귀금속, 진주 등을 사들여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두 도시 덕분에 서유럽이 상업주도권을 가져가면서 유럽경제는 부활하기 시작했다. 프로방스(지도 참조,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 일부지역)가 통로역할을 했다. 제노바는 툴루즈Toulouse에, 피사는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무슬림 상품을 공급했다. 모든 국가가 제노바와 피사를 통해 교역을 했다. 그들이 가져오는 진귀한 향료, 러그와 사치품이 중세 왕실을 채웠다. 

 

 

 

 

두 도시는 무슬림의 북아프리카 항구까지 진출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시장에서 두 도시 상인이 활동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튀니지와 알제리와도 교역조약을 맺어 마그레브왕조와의 교역을 늘렸다. 

두 도시의 상선은 지중해 운송의 표준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탈리아상선을 타고 이동했다. 

이탈리아 해양도시가 점차 강력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마요르카Majorca(발레아루스제도에서 가장 큰 섬)의 무슬림해적소탕이 다음 차례가 되었다. 

 

무슬림해적이 사르디니아를 습격한지 100년 후에도 발레아루스군도Balearic Islands는 해적의 본거지였다. 해적이 이제는 이탈리아해안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주요 시장인 스페인 카탈루냐아 프로방스를 약탈했다. 특히 피사는 자신의 교역로가 침범당하자 크게 분노했다. 

113년 부활절에 피사 대주교는 해적에 대한 응징을 호소했다. 주요가문이 열렬한 호응을 보였고 12명의 지도자를 선출해서 원정대를 편성했다. 로마를 넘어 숙적 루카Lucca에서도 지원병을 모집헸다. 제노바는 협조하지 않았다. 

 

 

 

 

약 300척의 배가 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선원만 해도 45,000명이 필요헸고 피사 전체의 인구보다 많았을 정도의 대함대였다. 피사는 이탈리아 전역의 목재를 사들였다. 선수를 밖으로 열어서 바로 상륙할 수 있는 군마전용수송선과 거대한 공성무기전용수송선도 제작했다. 

‘경이로운 피사인의 위업에 대한 마요르카서Liber Maiolichinus de gestis Pisanorum illustribus’라는 시집이 원정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13년 8월 6일, 함대가 피사를 떠나 사르디니아별동대를 합류시킨 후에 마요르카로 직행했다. 그렇지만 여름폭풍이 함대를 북쪽으로 밀어붙여 바르셀로나 62km 북동쪽의 카탈루냐 블라네스Blanes로 밀려났다. 

 

다행히도 바르셀로나백작 라몬 베렌게르Ramon Berenguer 3세는 피사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조약을 맺었다. 백작의 요청에 호응한 주변지역의 귀족이 병력과 선박을 이끌고 합류했다. 대신에 루카군은 폭풍에 질려 귀국했다. 

가을폭풍이 다시 몰려와 바르셀로나항구에서만 60척이 침몰했다. 나머지 함대는 항구에서 겨울을 보냈고 피사는 이듬해 6월에 50척을 증원했다. 

700척의 함대가 다시 원정에 나섰다. 이비사Ibiza섬이 8월 10일에 항복했지만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함대는 바로 마요르카로 떠났지만 에미르 무바쉬르 술래이만은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 팔마Palma에 강력한 방어를 펼치고 이듬해 봄까지 원정대의 무기력한 공격을 막아냈다. 바르셀로나백작은 본국이 무슬림에게 공격당하자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큰 균열이 생겼다. 

피사군은 끝까지 남아 공격해 1115년 2월에 외곽방어선을 무너트렸고 4월 3일에는 성채를 하락시켰다. 무슬림방어군 수천 명을 학살했다. 해적이 프로방스에서 아라곤에 이르는 성당과 수도원에서 빼앗은 약탈품과 수천명의 기독교인도 되찾았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황제를 비롯해 찬사가 쏟아졌다. 그렇지만 피사의 유명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발레아루스제도의 해적을 크게 약화시켰지만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발레아루스제도를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원정대가 떠나자 마자 마그레브왕국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몇 년도 안 되어서 마요르카는 이슬람해적의 소굴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숙적 제노바와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1118년 9월, 교황 젤라시오 2세Gelasius II는 피사에게 코르시카Corsica(꼬혹스) 주교임명 우선권을 주면서 코르시카를 둘러싼 분쟁에 불을 붙였고 1133년까지 계속되었다. 

 

 

 

 

제노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1119년 5월, 16척의 제노바 갤리선이 코르시카 부근에서 화물을 가득 실은 피사상선을 나포했다. 8월 6일, 피사함대는 제노바 보호령인 포르토 베네레Porto Venere를 공격했다. 

다시 제노바는 1120년에 병력 22,000명과 80척의 갤리선으로 포르토 피사노를 위협했고 크게 놀란 피사는 제노바포로 전체와 코르시카를 넘겼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에 거꾸로 제노바가 겨우 22척의 갤리선만을 동원하자 피사가 간단하게 격파하고 6척을 나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양쪽에 우호적인 기록관이 과장된 내용을 남긴 것인데 두 도시가 분쟁을 이어갔고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제노바는 로마교황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막대한 금은을 교화측근에게 뿌려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1121년 1월 3일, 교황 갈리토스 2세Calixtus II는 피사의 특권을 교황권으로 회수했다. 

피사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제노바와의 분쟁은 그치지 않았다. 피사는 프랑스로 향하는 제노바상선대를 노획했고 제노바는 피사보호령을 습격해 시민을 노예로 끌고 갔다. 

피사는 다시 교황에게 간청해서 코르시카 주교임명권을 가져갔다. 제노바는 투스카게 대규모 병력을 보내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코르시카로 건너가 피사의 산타안젤로성Castel Sant’ Angelo을 습격했다. 

두 도시의 분쟁은 1130년 8월에 교황 이노첸시오Innocent 2세가 중재하면서 잠잠해졌다가 1133년 3월에 정식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끝났다. 두 도시는 코르시카는 나누어 가졌다. 이후 발생하는 분쟁에 대해서는 두 도시의 대표 8명이 협의하도록 되었다. 

이노첸시오 2세는 강력한 해양도시를 동원해 자신의 숙적인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를 지지하는 시실리의 노르만왕국 정복을 지원했다. 

 

피사는 1135년과 1137년에 대규모 함대를 투입했다가 시실리왕과 별도의 조약을 맺었다. 제노바는 시실리왕국과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다. 

제노바는 1127년~1138년 기간동안 프로방스와 카탈루냐와 교역관계를 강화시켜 마르세이유와 바르셀로나 등에 대한 특권을 얻어냈다. 2차 십자군(1146~8)에서는 알메리아와 토르토사 포위에 참여해서 이베리아반도의 동쪽해안까지 영향력을 확장했다. 피사는 숙적 루카와 분쟁 중이어서 견제할 여유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ederick I Barbarossa황제는 두 도시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1162년 4월 6일, 황제는 피사에게 나폴리 등의 도시, 시실리왕국의 국고 1/3, 제국내를 오가는 모든 상선의 면세를 약속했다. 제노바에게도 피사만큼은 아니어도 근사한 제안을 했다. 

그렇지만 곧바로 콘스탄티노플의 피사 거주구역이 제노바 거주구약을 공격해 300명을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다. 두 도시는 다시 분쟁에 돌입했다. 제노바는 즉시 피사상선단을 공격해 6척을 불태우고 카프라이아Capraia섬의 피사요새도 습격했다. 

피사는 함대를 보내 제노바 소유의 코르시카 북쪽영역을 약탈해 62명의 제노바인을 죽이고 막대한 약탈품을 챙겼다. 

1162년 8월, 황제는 투린에서 강제 휴전을 명령했지만 사르디니아Sardinia를 둘러싼 분쟁이 다시 벌어졌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붉은 수염)은 이탈리아왕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원정을 6번이나 나섰습니다. 3차 십자군원정에 나섰다가 살레프에서 익사하면서 기독교진영에게는 재앙을, 이슬람진영에게는 천운을 안겨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