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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십자군원정에 대한 Q&A

by uesgi2003 2021. 12. 20.

 

자세한 내용은 이미 여러 차례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레베카 리스트교수의 간단한 Q&A를 정리하겠습니다. 

 

십자군에 대한 궁금증 

십자군 원정은 왜 시작되었고 얼마나 많이 투입되었을까? 그리고 전사자 수는? 레베카 리스트Rebecca Rist교수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레딩Reading대학의 레베카 리스트교수는 유럽의 교황과 십자군원정The Papacy and Crusading in Europe, 1198-1245와 교황과 유대인Popes and Jews, 1095-1291 등의 전문역사서를 여러 권 집필했고 중세 기독교인의 중동원정 전문가다.

 



리스트는 인터넷에서 가장 흔하게 질문하는 5개의 궁금증을 정리해서 대답해주었다. 

Q: 1095~1204년, 십자군원정의 동기는? 
A: 매우 복잡한 질문이다. 역사가들은 종교, 정치, 사회, 경제 등의 다양한 동기를 주장해왔다. 분명한 동기 몇 가지를 설명하면, 12세기 교황청의 사면권remission of sins 인정이 전대사plenary indulgence(모든 죄를 취소)로 이어졌고 십자군원정의 동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죄를 씻고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십자군원정이 이런 영적 특혜를 보장했다. 
피카르디Picardy기사 로베르 드 클라리Robert de Clari와 같은 사람은 4차 십자군원정에 대해, 사면권 특혜 때문에 사람들이 합류했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을 구조하려는 종교 동기도 있었다. 교황은 동쪽의 비잔티움Byzantines제국을 돕자며 1차 원정을 외쳤다. 비잔티움 알렉시우스 콤니노스Alexius Comnenus황제는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의 공격을 받고 서유럽의 지원을 요청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도 한 몫을 했다. 2차 원정에서는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Bernard of Clairvaux 등이 유럽전역을 돌며 인파를 모았고 왕들에게 십자가를 들게 했다. 루이Louis 7세와 콘라드Conrad 3세가 호응했다. 

 


위대한 원정에 참가했던 가문과 선조의 영광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황제, 왕과 귀족은 원정에 참가해서 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신세대이며 선조와 다르다는 것을 알리기 좋은 수단이었다. 

모험심도 있었다. 1차 원정 당시에는 흉년이 심해서 기아가 번져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났다. 물론 원정에 대해 온갖 종류의 로맨스와 모험심도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개인은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다. 신앙심이 매우 깊거나 주군의 환심을 사고 싶거나 영지가 목적이었을 수 있다.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에 감동받았을 수 있다. 십자군 개개인은 여러 동기를 가졌고 모두 중요한 동기였다. 

Q: 얼마나 많은 십자군원정이?
A: 십자군을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도 의견이 크게 갈리고 있다. 내 경우에는 1095~1291년 기간 동안 8차례 근동Near East원정이 있었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1차 십자군(1095–99)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웠고, 북부의 십자군왕국인 에데사Edessa백국이 함락되자 2차 십자군(1147–50)이 원정에 나섰고, 3차 십자군(1189–92)은 예루살렘 탈환이 목적이었고 사자심왕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 덕분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4차 십자군(1202–04)은 성지Holy Land대신에 자라Zara와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를 약탈하며 악명을 남겼다. 5차 십자군(1217–21)은 이집트 다미에타Damietta를 공격했다가 실패했다. 6차 십자군(1228–29)은 교황령이 승인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Frederick 2세 황제가 파문을 당하며 억지로 나섰지만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술탄과 협상해 10년 동안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7차(1248–54)와 8차(1270)는 루이Louis 9세가 이집트와 튀니스를 공격했다. 

 

 

그렇지만 소규모 원정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된다. 소규모 원정군과 순례자가 동방으로 떠났다. 예를 들어 1236년 남작십자군Barons’ crusade이나 9차 십자군(1271–72)이라고 부르는 에드워드Edward 1세의 원정도 있었다. 

 


Q: 십자군원정의 결말은?
A: 1291년, 맘루크Mamluk왕조가 아크레Acre를 점령하면서 십자군원정이 완전히 끝났다. 

수십 년 동안, 아크레는 예루살렘왕국의 전략요충지였고 1291년에 맘루크술탄 칼릴Khalil에게 함락되었다. 이후 베이루트Beirut, 하이파Haifa, 티레Tyre, 토르토사Tortosa가 연달아 함락되며 십자군 국가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Q: 누가 승자인가?
A: 이미 알고 있듯이, 십자군 영지가 사라졌다. 1099년부터 이어진 십자군 국가의 요충지는 1291년에 무슬림에게 함락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슬림이 십자군전쟁에서 승전했고 기독교가 패전했다. 

그렇지만 십자군은 1095년 1차 원정부터 1291년 아크레 함락까지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개별 십자군원정도 많았고 1차 원정처럼 십자군이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다. 무슬림군은 5차 원정 당시에 다미에타를 점령해서 승리를 거뒀다. 

3차 십자군에서는 사자심왕 리차드가 아크레를 점령하고 기반을 다졌다는 면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다. 

십자군원정을 개별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정 전투나 공성전에서 십자군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무슬림이 승전했다. 

Q: 전체 십자군 규모는?
A: 기록만으로는 계산하기가 너무 어렵다. 중세 연대기작가는 전투와 전사자의 경우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도가 떨어졌다. 용선Charter기록과 같은 다른 증거가 훨씬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다. 어떤 원정은 엄청난 대군이었던 반면에 다른 원정은 훨씬 소규모였다. 참전규모나 전사자를 계산하려면 이런 요소를 모두 감안해야 한다. 

1095~1291년 기간 동안 100~900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존 로버트슨John Robertson은 20세기 초에 출간된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9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다른 역사가는 훨씬 적은 숫자를 주장했다. 원정에는 전투원뿐만 아니라 일반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합류했기 때문에 100만 명이 될 수도 있고 900만 명이 될 수도 있다. 

역사가는 정확한 숫자를 계산하기 힘들기 때문에 십자군 전체보다는 개별전투의 규모를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도 전사자 분석에 더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현대 역사가는 클레르몽Clermont에서 교황 우르바노Urban 2세의 연설을 듣고 1차 원정에 7~8만 명 정도가 나섰다고 분석한다. 중간에 더 많은 사람이 합류했겠지만 그 정도 규모로 보고 있다. 

 


1099년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700~3,000명을 학살했다고 분석한다. 나도 3,000명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군 전체규모에 대해서는, 100만 명은 너무 적은 것 같다. 나는 5~600만 명으로 생각한다. 

 

마무리는 살라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