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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6) - 칸나에의 재현, 바그라티온 작전 (1)

by uesgi2003 2012. 6. 28.

 

이번 주말에 비가 온다는 군요. 한꺼번에 너무 많이는 말고 매말랐던 저수지에 물이 절반 이상 찰 수 있을 정도는 왔으면 합니다.

다행히 가뭄은 어느 정도 해갈될 것 같은데, 세계경제와 국내경제가 너무 안좋아서 걱정입니다. 

백수인 저도 집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말썽이라 밤잠을 설칠 정도인데, 밤에 잠 못이루는 분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올해와 내년에 대학졸업하는 젊은이들 중 대부분은 직장도 못 구하고 88만원 세대로 전락하겠군요. 

자신의 잘못이 아닌, 지금의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것인데 어디에서 하소연도 못하고 억울할 겁니다. 


요즘은 명박이의 헛소리를 안들어서 좀 낫기는 한데... 아니 걔가 헛소리를 해도 요즘에는 워낙 안 좋은 뉴스가 많아서 귀에 들어오지도 않지만요... 걔가 뒤에서 몰래 저질러놓고 카펫 밑에 숨겨놓은 문제가 얼마나 많을 지 걱정입니다. 


청계천, 저도 처음에는 반반이었습니다. 외국처럼 도심에 멋진 공원이 생긴다는 것이 좋았으니까요. 그런데 뒤늦게야 밝혀졌죠? 걔가 그 지랄하는 바람에 가든파이브 부채가 2조원 가까이 밀려있고 도심 재개발의 재원이 모두 말라버렸다는 것이요. 서울시장 5년에 청계천만으로도 그 정도인데, 대통령 5년하며 4대강 파헤쳤으니 얼마나 대단할까요? 사실 앞으로 경제위기 극복할 재원을 모두 말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독일 중부집단군이 일시에 증발한 바그라티온(러시아 작전명) 전투는 워낙 유명해서 쿠르스크 전투처럼 건너 뛰려고 했는데, 제 블로그에 고수들만 오시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이어질 프러시아 전선 이야기와도 연결되지 않아서 계획을 바꿔 몇 편에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은 히틀러 단독의 삽질로 동부의 개별전선이 무너졌던 반면에, 중앙집단군 궤멸은 최고사령부 지휘관들도 오판하는 바람에 독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 동안 유능한 지휘관들을 거의 경질하고 말 잘 듣는 지휘관으로 교체한 것도 한 이유이기는 합니다만.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6) - 칸나에의 재현, 바그라티온 작전


1941년까지만 해도 눈부신 진격을 하던 중앙집단군이 단 3 년 만에 전사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독일 중앙집단군은 바바로사(러시아 침공작전) 작전의 핵심으로, 강력한 2개 전차군과 3개 보병군을 거느리고 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격했었다. 중앙집단군은 눈깜짝할 사이에 브레스트-리토브스크를 거쳐 민스크까지, 드니에페르 강을 건너 스몰렌스크까지 무인지경으로 달렸고, 여기에서 히틀러가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일으켰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기 위해 주력군을 키에프로 돌렸고 러시아의 가혹한 겨울이 시작되어서야 모스크바 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이미 진흙장군이 기승을 부릴 때였고시베리아 징집병으로 강력한 수비선이 처진 상태였다. 결국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진입로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1941년 겨울의 반전은 동부전선 전체의 결과를 바꿔놓았다. 독일군의 전략초점은 중앙에서 남부의 통신, 경제, 생산거점으로 옮겨졌고 히틀러는 지휘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석탄, 강철, 석유와 같은 전략자원 획득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도네츠쿠(Donet) 지역과 코카서스가 주요 전장터가 되었다. 히틀러는 여기에 동부전선 전체의 승부를 걸었었다. 


모스크바에서 물러난 중앙집단군은 독일 최고사령부에게는 일종의 '2등급 전선' 취급을 받았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모스크바를 남쪽에서 포위해 점령하기로 되어 있던 구데리안의 2 전차군은 1943년 8월까지 20개월 동안 오렐(Orel) 부근을 지키기만 했다. 스탈린도 볼가 강 일대를 탈환한 다음에는 남쪽 전선에서 독일군을 밀어내려고 했다. 

만슈타인 원수가 히틀러에게 "러시아의 다음 목표는 남부전선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증원이 필요합니다"라며 중앙집단군의 병력이라도 빼내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남부전선은 차례 차례 내주면서 히틀러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강철, 석탄, 니켈, 마그네슘뿐만 아니라 곡창지대도 모두 잃게 되었다. 

 

1944년 6월 지도를 보면 동부전선, 특히 남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크게 밀어붙여 오데사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의 북쪽 능선을 따라 콜로미야(Kolomyya)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급격하게 꺾여 코벨(Kovel) 북쪽의 페리페트 습지대까지 전선을 넓혔다. 이렇게 돌출된 러시아군의 남부전선은 중앙집단군의 배후를 크게 위협하는 모습이었다. 

봄부터 시작된 진흙장군 덕분에 죽음직전까지 몰렸던 독일군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그래봐야 1~2개월에 불과했고 최고사령부는 다음 전선이 어디가 될 것인지에 매달렸다. 

과연 스탈린의 여름작전은 어디에서 시작될 것인가? 그리고 그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참모들은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게 되고 대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그림 설명: 점선이 독일군이 예상했던 러시아군의 목표방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러시아군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이 정도의 원대한 전략 대신에 독일군에게서 배운, 적을 두들겨서 참호에 밀어넣고 전차로 전선을 두 동강낸 다음 배후를 끊고, 보병으로 각개격파하는 현대전의 정석을 펼피게 됩니다.

그나마 부족한 전차전력을 중앙집단군에게서 빼내 남부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보내고, 각 사단을 꼼짝도 못하는 거점 요새화 명령을 내려 350,000명이 증발하는 독일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8개월 동안 히틀러는 스탈린이 남부전선에서 결정타를 날리려고 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해왔다. 러시아군의 규모나 능력을 애써 무시해오던 그가 이번에는 반대로 러시아군이 정교하고 거대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히틀러는 스탈린이 이번에도 남쪽에서 승부를 걸 것으로 믿었다. 러시아군이 프리페트 습지대와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에 얇게 펼쳐진 남부전선을 관통해 중앙집단군의 배후로 돌아 중앙집단군을 포위하는 동시에 비스툴라 강을 건너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aw)까지 한 번에 노릴 것이라는 것이다. 

러시아군이 남부전선에 보유한 7개 군으로 겨우 500km 떨어진 발트해까지 전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히틀러의 판단에 요들(Jodl)이나 호이징거(Heusinger)까지도 의견을 같이 했다. 6월 10일 이후에도 중앙집단군 전면에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도 최고사령부의 예상이나 대응은 바뀌지 않았다. 

최고사령부는 전선 전체에서 빼낼 수 있는 예비병력뿐만 아니라 8개 전차사단과 2개 기갑척탄병사단 전력의 4 전차군단까지 모두 갈리시아(Galicia)에 집결시키고 예상되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북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새로 맡은 모델(Model) 원수는 이 정도 예비병력이면 스탈린이 어떤 병력을 동원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귀중한 전차부대를 모두 빼앗긴 중부집단군은 거의 알몸으로 러시아군 앞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힘으로 전면공격하는 이전의 투박한 작전을 그러나 독일군 선배에게서 배운대로 정교한 방식으로 펼치기로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중앙집단군의 34개 사단을 대상으로 200개 사단(250만명), 6,000대의 전차와 돌격포, 45,000문의 대포와 박격포, 7,000대의 비행기를 투입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미 중앙집단군의 배후에는 그 수를 알 수 없는 엄청난 파르티잔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 정규군이 공격을 하기 전인 6월 19-20일 양일간 파르티잔이 10,500건의 폭발테러를 감행해 드리에페르 강에서 민스크에 이르는 모든 철로와 통신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리고 전방과 후방을 오가는 모든 수송대를 공격해 24시간 동안 어떤 물자나 병력도 이동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중앙집단군이 사용하던 216량의 기차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그림 설명: 러시아군의 귀중한 정보원인 파르티잔입니다. 우리에게는 빨치산으로 익숙한 이름입니다. 개전초기에 우호적이었던 현지 토착민을 워낙 잔인하게 학살해서 독일군 스스로가 자초한 또 다른 적입니다. 테러를 당할 때마다 더 잔인하게 진압했고 당연히 더 많은, 더 투쟁적인 파르티잔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립된 지역에서 마구잡이식 활동을 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바그라티온 작전에서는 정규군과 합작해 놀라운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히틀러와 최고사령부는 이 정도로 러시아군의 의도와 병력이동을 모르고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제공권이 완전히 러시아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나마 러시아군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던 항공전력은 더 급한 본토방어와 프랑스 방어를 위해 대거 차출되었기 때문에 항공정찰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독일군 후방의 수 많은 파르티잔을 통해 병력이나 물자 이동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에 우크라이나를 잃은 독일군에게는 더 이상 우호적인 토착민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쿠르스크 작전부터 서서히 드러났던 러시아의 기만전술은 상당한 경지에 올랐고 남부전선에 위장공격을 가해 히틀러가 자신의 예상을 믿게 만들었다. 

최고사령부가 러시아의 의도를 미리 알았을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개전초기의 지리멸렬하던 러시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독일군의 전술을 몸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압도적인 전력을 집중시켜 포격과 폭격으로 적의 전선을 약화시킨 후에 전차를 투입해 양쪽에서 적의 배후를 끊고 (Pincer Attack) 보병으로 구멍난 전선을 더욱 확대시켜 적을 포위해 협공하는 현대전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다. 


그림 설명: 뭘해도 연출된 느낌이 들고 촌스러운 러시아 장교들의 모습입니다. 나름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근위군 장교들이 '자! 사진 찍습니다' 장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러시아군의 통신보안 수준이 정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한 정보가 독일군에게 감청되었겠지만, 독일군은 이것을 기만전술로 받아들였거나 양 방면에 모두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감청정보를 바탕으로 항공정찰이나 무력정찰로 분명한 물증을 찾아내야 하지만 이 당시는 이미 제공권이 모두 러시아군에게 넘어가 있었고 연대급 병력을 동원한 무력정찰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스탈린은 기념일과 겹쳐 전과를 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7일 혁명기념일에 키에프를 탈환했듯이 독일의 바바로사 작전 개시기념일인 1944년 6월 22일에 중앙집단군 말살작전인 바그라티온을 시작했다. 

러시아 1 발트해 전선군과 3 벨로루시 전선군이 비테부스크(Vitebsk) 양 방면으로 독일 3 전차군을 공격했다. 24시간 후에는 독일 4 군의 모든 전선을 공격했고 24일에는 1 벨로루시 전선군을 풀어 독일 9 군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이 중앙집단군의 모든 전선을 공격하는데도 히틀러와 최고사령부는 이것이 러시아군의 주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전체 전선이 엄청난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던 23일에도 남부의 갈리시아 방면으로의 작전을 감추기 위한 위장공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격 2일째가 되어서야 히틀러는 자신이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오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중앙집단군을 전멸로 몰아 넣은 결정적인 오판은 바로 거점 요새화(Fortified Localities)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