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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6) - 칸나에의 재현, 바그라티온 작전 (2)

by uesgi2003 2012. 7. 1.

 

Paul Carrell의 Scorched Earth(초토화)는 동부전선의 상황을 지루하지 않게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제가 가장 권하는 책인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최대 전투인 바그라티온 작전에 와서는 기력을 다했는지 좀 어수선하게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만 해도 250만 명에, 독일군까지 합치면 3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전투여서 불과 몇 십 페이지로 정리하기 힘들었겠지만, 갑자기 남북으로 전장을 오가고 있어서 저도 정리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에는 Osprey 출판사 자료의 도움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Paul Carrell의 자료도, Osprey의 자료도 하나의 줄기에 불과합니다. 러시아군의 규모도, 독일군의 피해도 자료마다 다르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독일군은 전선수습만으로도 경황이 없어서 피해를 현장의 보고만으로 파악했을 것이고, 러시아군은 지도에 올려진 독일군 사단을 대충 계산해서 전과를 집계했을테니까 그 오차가 상당할 겁니다. 

 

Osprey 출판사의 자료에서도 동원된 병력이나 피해 파악이 안된다고 인정할 정도이니까 제 이야기도 그렇고 다른 자료도 그렇고 그것이 진리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바랍니다. 하다 못해 영문자료 조차도 벨로루시, 비엘로러시안, 화이트러시아로 용어가 통일되지 않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6) - 칸나에의 재현, 바그라티온 작전 (2)

 

 

히틀러는 새로운 방어 전략을 주장했다. 중요한 통신, 물류, 정치, 역사, 경제 중심지에는 최소한 1개 사단을 투입해 요새화하고 어떤 공격을 받아도 요새화된 거점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새화된 도시에 틀어박힌 1개 사단은 러시아군 10개 사단 이상의 공격을 막아내며 발목을 잡을 것이고 독일군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러시아군은 훨씬 많은 피해를 입으며 고전을 겪으면 전투는 장기전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1차 대전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전략으로, 중앙집단군 전선에서는 슬루츠크(Slutsk), 보브루이스크(Bobruysk), 모질레프(Mogilev), 오르샤(Orsha), 비테브스크(Vitebsk), 폴로츠크(Polotsk)가 요새화된 거점으로 선정되었고 비테브스크에만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그림 설명: 6월 24일~7월 10일 중앙집단군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격상황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많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잘 연결됩니다.

 

한 가지 문제만 없다면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러시아군이 기존의 전략전술을 그대로 고집해 도시 탈환에 최우선 목표를 두었을 경우에 효과적이겠지만, 만약 1~2개 사단 정도만 요새거점을 견제하도록 배치하고 그대로 통과한다면 오히려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을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포위망을 만들고 그 안에 뛰어든 꼴이 되고 만다. 

현대식 전술을 처음으로 도입한 독일군이 시대착오적인 참호전을 기획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의사결정이 집중된 반면에, 러시아군은 독일의 전격전을 구사하기 시작했고 히틀러못지 않은 고집불통의 스탈린은 일선 지휘관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44년 5월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1 벨로루시 전선군의 로코소브스키이(Rokossovskiy)는 고심 끝에 보브루이스크가 최우선 목표이며, 북쪽에서는 로가체프(Rogachev)에서 보브루이스크로, 남쪽에서는 보브루이스크와 슬루츠크 방향으로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술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모든 전력을 집중해 일직성으로 공격하는 이전의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고, 병력에 비해 작전지역이 너무 제한적이고 측면이 노출되어 적의 반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 집중공격 전술이 그대로 채택되었다면 히틀러의 요새거점이 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로코소브스키이는 이전과 다른 지휘관의 모습을 보였다. 


"스탈린은 내게 옆 방으로 가서 20분 동안 자신의 의견을 심사숙고한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지만, 다시 생각할거리도 없었다. 시간이 다 되자 나는 돌아와서 그대로 다시 이야기했다. 다시 20분 동안 옆 방으로 보내졌다. 이번에는 외무상 몰로토프와 스탈린의 측근인 말렌코프가 절대로 스탈린에게 맞서지 말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나는 내 의견이 틀린 것이 없으며 만약 스탈린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지휘관 자리를 내 놓은 다음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도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시 20분의 시간을 받았다. 3번째로 회의실에 가서야 스탈린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우에스기 왈: 스탈린이 상당히 고집불통인 것처럼 나오지만 예전같았으면 명령불복종으로 처형했을, 측근들이 보기에는 쓸데없이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전선의 상황이 상당히 좋아지면서 스탈린도 점차 유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군의 공격에 전선 곳곳이 순식간에 절단되었다. 24시간도 안되어서 3개 사단이 투입된 비테브스크 요새거점은 러시아군에게 협공에 무기력하게 외딴 섬으로 남겨졌고, 오르샤와 모질레프 방향으로 공격하는 러시아 2 벨로루시 전선군도 독일 4 군의 전선에 큰 구멍을 내며 예정대로 진격해나갔다. 

이들을 막을 병력은 '펠트헤른할렌' 기갑척탄병사단이 전부였지만, 정상적인 전력이 아니었다. 포병 연대와 전차 대대는 독일에서 아직 오지 않았고 충원병력은 노르웨이에서 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나마도 전투를 해보지 못한 신병들이었다. 

펠트헤른할렌 사단에게 모질레프의 동쪽 구멍을 막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보고를 받은 군단장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확하게 어느 구멍을 말하는거야? 전선 자체가 모두 구멍인데? 펠트헤른할렌 사단은 베레지노(Berezino)에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드니에페르 전선이 완전히 무너져도 버틸 수가 있지. 드니에페르는 이미 버틸 수가 없다고."


군단장 마르티네크(Martinek)의 예상은 적중했다. 펠트헤른할렌 사단이 베레지나에 있었다면 18 기갑척탄병사단과 함께 무너지는 전선을 어느 정도는 지탱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림 설명: 39 군단장 로베르트 마르티네크입니다. 러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신이 누군가를 없애려고 한다면, 눈부터 멀게 만들지"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했다고 합니다. 

그는 후방의 방어선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습을 받아 전사합니다. 


오히려 전방으로, 드니에페르 강까지 전진하라는, 무의미한 정반대의 명령이 떨어졌다. 마치 홍수에 자갈 한 개를 던져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그들은 운좋게도 드니에페르 강을 건너 모질레프까지 전진했고 러시아군 전차부대에게 반격하는 동안, "펠트헤른할렌 사단은 모질레프를 방어하는 12 보병사단과 함께 서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완전히 지옥 그 자체였다. 도로 위에는 부서진 차량과 무작정 후방으로 달아나는 패잔병으로 가득차 있었고 러시아군 전차가 곳곳에서 출몰했다. 


 

러시아 1 벨로루시 전선군이 중앙집단군의 우측 전선을 공격했다. 러시아 65 군의 바토프(Batov) 장군은 독일 9 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500m 넓이의 습지대를 가로질러 보브루이스크를 공격했다. 연막 속에서 공병이 투입되어 습지대에 나무를 깔아 전차부대가 지나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병들은 스키와 같은 장치를 달고 건넜다. 

 

그림 설명: 개전초부터 마구잡이 전투를 벌였던 러시아군이니 만큼 전선의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능력만큼은 독일군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사진과 같은 식으로 도강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방식의 스캔을 알아봐야겠습니다. 화질이 상당히 안좋아지는군요.

 

41 전차군단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41 전차군단은 이름만 전차군단으로 실제로는 36 기계화보병사단을 빼고는 2개 보병사단이 전력의 전부였기 때문에 보브루이스크 근처에 있던 20 전차사단을 모질레프-보브루이스크 반격에 동원했어야 했는데 9군은 망설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림 설명: 버려진 4호 전차를 러시아군 장교가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선에서 어떠한 경우라도 전차를 버리는 행위는 즉결처형감이었지만 이미 4호전차(아무리 증가장갑과 고성능포탄으로 보강되었다고 해도)는 더이상 러시아군의 최신식 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4호 전차는 모든 면이 직각이어서 어디를 맞아도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이거 전차는 엄청난 중장갑과 장포신으로 단점을 보강할 수 있었지만 4호 전차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보브루이스크 다리 건너편에는 마침 헤센 20 전차사단의 21 전차연대가 자리잡고 있었고 100 대 정도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어서 어느 방향으로던 밀려드는 러시아군을 상대할 수 있었는데 아무런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2 대대의 슐제(Schulze) 소령이 독단적으로 보브루이스크 북쪽의 러시아 48 군의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지만 군 사령부에서 정반대의 명령이 떨어졌다. 보브루이스크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9 군 사령부는 북-남 고속도로로 밀려드는 바토프의 돈(Don) 전차 군단이 가장 심각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지만, 이미 공격에 나선 슐제의 전차들을 남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결국 위기를 봉합할 강력한 전차부대가 북과 남 어느 쪽에도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슐제 소령은 "우리가 이렇게 오가는 동안에, 러시아놈들은 보병사단을 박살냈다. 9 군의 남쪽 전선으로 이동하는 동안 마주친 것이라고는 도망치는 아군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중앙집단군이 동원할 수 있는 전차전력은 2개 대대와 몇 대의 돌격포가 전부였고,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전과를 올려도 14개 러시아 군과 6개 독립 전차군단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9 군의 요르단 장군이 경질되고 보르만 장군이 지휘권을 받았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6월 29일, 요새거점인 보브루이스크가 함락되었다. 20 전차사단의 기갑척탄병과 전차부대가 밤에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로를 척탄병이 열었고 몇 대의 전차와 돌격포가 그 뒤를 따랐다. 20 전차사단이 탈출에 성공하면서 전선이 잠시 연결되었지만 후방에는 5,000명이 남겨졌다. 베레지나 강을 수비하던 100,000명 중에서 겨우 30,000명 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병사가 강에 빠져 죽었는지, 숲에서 파르티잔에게 사냥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독일 9 군에 대한 로코소브스키이의 공격은 대성공을 거뒀다. 보브루이스크를 탈환하는데 8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겨우 4일 밖에 안 걸릴 정도로 독일군은 무기력하게 파괴당했다. 


3편이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