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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26) - 칸나에의 재현, 바그라티온 작전 (3)

by uesgi2003 2012. 7. 9.

 

독일군 3 전차군이 지키고 있던 중앙집단군의 북쪽 전선 그리고 3 벨로루시 전선군과 1 발트해 전선군의 공격은 어떻게 되었을까? 북쪽 전선에서는 비테브스크가 첫 번째 전략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2개 군의 협공으로 포위되었지만 히틀러의 바램과 달리 공격목표는 아니었다. 


독일 3 전차군의 라인하르트 장군은 중앙집단군의 왼쪽 전선에 집중되고 있는 러시아군 병력에 대해 최고사령부에 계속 경고를 보내면서 비테브스크 북쪽 지역의 수비를 강화시켰지만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거점 요새'를 고집했었다. 

중앙집단군의 부쉬(Busch) 원수는 라인하르트의 경고에 대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나?"라며 히틀러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베테랑 3 전차군이 어떻게든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부대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부대였다. 1/3 정도의 병력이 이미 다른 전선으로 보내졌고 강력한 포병전력도 절반도 남지 않았다. 예비병력은 14 보병사단과 공병대대 몇 개가 전부였다. 후방에는 201 지역방어사단과 몇 개의 지역방어대대만 있었는데도 최고사령부는 마치 이전과 같은 전력으로 간주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히틀러는 3 전차군의 전력 중 1/3이 넘는 4개 사단을 비테브스크 안에 고정시켜두었다. 라인하르트의 경고와 요청은 완전히 묵살되었다. 

러시아군은 비테브스크를 공격하지 않고 우회해서 중앙집단군의 전략자체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 


어떻게 207개 사단의 20개 군이 중앙집단군 전선 앞에 집결하는 것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러시아가 독일 내에 심어놓은 정보망이 제 역할을 다해주고 있었지만 독일은 그런 내부 정보망이 없었다. 독일군은 항공정찰, 탈영병과 포로, 지역정찰, 전화와 무선도청만으로도 그 동안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군의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군은 공격 며칠 전부터 전선을 따라 참호와 방어시설을 지어서 마치 중앙전선에서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음 결전의 장은 남부전선이 될 것이라고 독일군이 오판하게 만들었다. 공격명령은 고위장교들에게만 공격을 2일 앞두고서야 인편으로 전달되었고 전화, 전신, 무선은 거짓 명령만 내보냈다. 

그리고 전투기들이 대거 투입되어 독일 정찰기가 전선너머로 오지 못하게 미리 막았다. 24시간 내내 모든 전선에서 정찰기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지엽적인 정찰만으로는 러시아군의 의도를 알아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독일군 스스로 하늘이 내려준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6월 초에 인편으로 명령을 전달하던 러시아 정찰기가 격추되었고 작전에 대한 많은 정보가 그대로 손에 들어와 9 군단에 보내졌지만 기만정보로 간주하고 무시하고 말았다. 


 

당시 38살밖에 안된 3 벨로루시 전선군의 지휘관 이반 체르냐코브스키이는 최고사령부의 명령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먼저 10,000 문의 포문을 연다음 1,000대 이상의 폭격기로 폭격해 독일군 전선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지뢰밭을 열었다. 그 다음에 4개 군을 투입해 비테브스크 남쪽의 9 군단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의 진격로에 있던 299 보병사단은 바로 무너졌고, 체르냐코브스키이는 전차군단과 기병부대를 투입해 독일군 전선에 생긴 틈을 열어제치며 비테브스크를 그대로 지나치며 진격했다. 

 

그림 설명: 러시아군의 대표적인 대형화기 B-4 M1931 203mm 포입니다.

발사 후의 충격이 워낙 커서 뒤로 2~3m나 밀려나는데, 정확도가 상당히 의심되는 포였습니다. 자체 트랙터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자주포로 불리기도 합니다.

 

비테브스크 북쪽에서는 1 발트해 전선군이 3개 보병군과 1개 전차군단을 투입해 똑같이 도시를 지나 그대로 진격하면서 독일군 9 군단의 실렌시아 252 보병사단과 마주쳤다. 러시아군이 먼저 돌파하고 독일군이 반격을 했지만 엄청난 폭격과 전차공격 앞에서는 결국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9 군단은 비테브스크 후방 35km 지점까지 물러나 방어선을 다시 폈고 잠시나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9 군단을 추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었다. 비테브스크 후방에서 도시를 포위하면서 독일군 4개 사단이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요새 거점이 아니라 또다른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재앙을 예견한 라인하르트는 마지막 순간에 4 공군야전사단(Luftwaffe Field)을 도시 밖으로 빼내려고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6월 24일, 러시아군은 비테브스크를 지나 독일군 후방 깊숙히 진출했고 요새거점은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했다. 도시 안에 3개 사단이 갇히는 바람에 후방의 전선을 연결시킬 수도 없었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재앙을 히틀러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마지못해 "1개 사단은 도시에 그대로 남아 방어를 한다. 어떤 지휘관이 남을 것인지 내게 보고하기 바란다"는 광기를 부렸다. 

4개 사단으로도 방어할 수 없는 도시를 단 1개 사단만으로 방어하라니!

죽음의 틀 안에 들어갈 부대는 206 보병사단과 히터(Hitter) 장군으로 결정되었지만 탈출허가가 너무 늦게 떨어져서 탈출자체가 불가능했다. 6월 25일 오후 1시12분, 53 군단장 골비처(Gollwitzer)가 3 전차군에게 마지막 무선을 보냈다.

"상황이 극히 안좋음. 완전히 포위당했음. 4 공군야전사단은 전멸. 246 보병사단과 6 공군야전사단은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음. 비테브스크 방어시설에서 격전 중. 임무완수했음(요새거점에서의 전멸)을 보고함."

    

53 군단의 35,000명은 겨우 2일을 버티고 전멸해갔고 러시아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약 8,000명의 독일군이 포위망을 빠져나갔지만 곧바로 다시 포위되었다. 6월 27일 오전, 우리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고 모두 항복했다. 적은 20,000명이 죽고 10,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 중에는 53 군단장 골비처와 참모들도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압도적인 전력이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도시에서 포위되어 전멸직전에 탈출한 적도 많았지만 4개 사단이 단 2일 만에 완전히 전멸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림 설명: 집속탄을 준비하고 있는 러시아군입니다. 대표적인 지상공격기인 IL-2는 하늘의 전차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무장과 장갑을 자랑하고 있어서 독일군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운 비행기 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IL-2로 착각했는데, 다른 분의 지적대로 IL-DB3 폭격기가 맞습니다. 뒤에 회전포탑이 있군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전까지는 탈출하는 독일군의 머리 위에는 독일공군이 강력한 방어막을 펼쳐주었지만 이제는 러시아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로 가득했다. 프랑스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압도적인 공군력을 상대하기 위해 동부전선의 전투기는 남김없이 서유럽으로 보내졌고 중앙집단군이 보유한 공군전력은 전투기 40대가 전부였다. 7,000대나 되는 러시아군 비행기를 상대로 단 40대만이 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전선이 위급해지자 북부와 남부집단군의 전투기가 급히 투입되었지만 그래봐야 100대를 넘지 못했다. 

탈출하는 독일군은 폭격으로 모든 중화기를 잃었고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군의 전차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운이 좋은 몇 명만이 간신히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공군은 중앙집단군 전선의 중앙인 독일군 4 군에 대해서도 대단한 활약을 했다. 주코프 원수는 4 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러시아 4 공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러시아 공군은 후방 35km 정도까지 4 군의 방어체계, 특히 포대를 정밀하게 정찰해두었다. 

주코프의 2 벨로루시 전선군이 전진하는 동시에 지상폭격기가 나타나 독일군의 방어시설을 맹폭격했다. 융단폭격으로 지뢰밭과 철조망을 연다음, 기관포로 독일군 포대를 유린하고 후방의 다리를 모두 끊었다. 그리고는 하늘의 전차라는 별명의 IL-2와 같은 근접지원기가 나타나 독일군의 돌격포를 사냥했다.

1941-42년 독일공군의 수투카가 러시아군 전차와 포대를 하나씩 파괴해나갔던 것을 2년 후에 정확하게 되갚아주고 있었다.

 

6월 24일, 중앙집단군의 부쉬 원수가 경질되었다. 비록 만슈타인과 같은 천재는 아니었지만 훌륭한 지휘관이던 그는 히틀러의 광적인 요새거점 전략을 충실히 따른 후, 참담한 실패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미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북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지휘하고 있던 방어전문가 발터 모델(Walter Model)이 중앙집단군까지 맡으면서 사실상 동부전선을 거의 책임지게 되었다. 만슈타인이 동부전선의 지휘를 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는 귀기울이지 않던 히틀러가 동부전선이 붕괴되어서야 지휘권을 통일한 것이다. 

 

그림 설명: Osprey 출판사의 캠페인 시리즈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바그라티온 작전과 같이 엄청난 규모의 전투는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라가기 힘든데, 이 출판사는 한 눈에 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입체지도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그림은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며 클릭하면 큰 지도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친절한 우에스기가 최대한 번역해두었습니다. Carrell은 5 전차군이 민스크 방향의 고속도로로 진격한 것으로 설명했는데 Osprey는 2 전차군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르제프, 오렐, 레닌그라드 등에서 위기를 막은 모델도 이번 위기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강력한 공군은 서유럽으로 떠났고, 최소한의 예비병력도 없고, 러시아군 전차를 막을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그는 여유가 있는 양쪽 집단군에서 지원군을 뽑아내고, 도시나 전략거점에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6월 27일, 오르샤(Orsha)가 러시아군의 손에 들어갔고, 러시아 5 근위전차군이 베레지나 강 상류에서 보리소프(Borisov)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모델은 코벨(Kovel)에서 급하게 부른 5 전차사단을 민스크 북쪽에 전개해서 러시아군의 침투를 막고, 이제 막 조착한 12 전차사단과 4 전차사단을 민스크 남쪽의 스톨브치(Stolbtsy) 지역에 전개시켜 4 군이 베리지나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2 군은 돌격포 여단과 함께 9 군 방향으로 전진해서 전선을 연결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러시아군의 기세는 이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7월 3일, 중앙집단군 사령부이자 벨로루시의 수도인 민스크를 러시아군이 탈환했다. 1941년 전격전에서 가장 처음으로 점령한 대도시인 민스크를 3년 만에 내준 것이다. 민스크 탈환과 함께 모스크바에서는 축포가 울렸다. 

독일군에게는 민스크 상실보다, 4 군과 9 군의 많은 병력이 민스크 남동쪽에 포위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모델은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구해내기 위해 민스크 후방 멀리, 바라노비치-몰로데츠노 앞에 새 수비선을 만드는 동시에 북부집단군과 북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에서 빼내온 병력으로 러시아군을 막아섰다. 광활한 숲을 통과하는 도로, 습지대 사이의 길, 도강 지점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새로운 지원군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민스크에서 탈출하는 4 군과 9 군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모델은 3개 전차사단을 우선투입하고 보병사단 3개를 추가로 투입했다.

 

그림 설명: 민스크 주변의 독일군 수비선과 러시아군 공격 지도입니다. 

자료가 부대 명칭을 서로 다르게 해서 약간의 혼선이 있습니다.  

 

민스크 북쪽에 있던 5 전차사단은 북부집단군의 지원군이 오는 철로와 고속도로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2 전차사단은 민스크 남동쪽에서 러시아 1 근위전차군단의 선봉대에게 반격을 가했고 4 전차사단과 28 엽병사단은 바라노비치로 후퇴할 수 있는 유일한 도로를 방어했다. 170 보병사단은 몰로데츠노 방면으로 전진하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주코프는 이미 르제프와 오렐에서 모델을 겪어봤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비의 명장으로 알려진 모델과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유명한 주코프가 바라노비치에서 다시 한 번 결전을 펼치게 되었다. 주코프는 바토프 장군의 65 군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놈들에게 쉴 틈을 주지 마시오. 계속 공격해서 바라노비치의 철로를 점령하시오."

주코프가 발을 구르고 있는 동안 바토프는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는 사령부에서 면도를 하고 구두를 닦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에 건물 밖에서 거친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주코프가 직접 온 것이었다. 바토프가 달려나갔을 때에는 이미 주코프가 현관 밖에 서 있었다.

"면도를 했다니! 화장이라도 하고 있었나?"

"왜 바라노비치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야? 전황지도는 어디에 있나?"

병력이 바라노비치에 곧 진입할 것이라는 대답을 들은 주코프는,

"왜 그렇게 확신하지? 당신이 직접 바라노비치로 달려가서 그 마을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마시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24시간 후, 러시아군 통신은 '바라노비치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된다.

 

 

3주 후, 러시아군은 브레스트(Brest)를 지나 메멜(Memel)과 비스툴라(Vistula) 강까지 전진하고 독일군은 여기에 가까스로 방어선을 만들고 러시아군의 교두보를 밀어내기 위한 몇 번의 반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은 5주 만에 600km 이상을 달려 1941년 독일군이 전세계를 놀라게했던 브레스트-스몰렌스크-옐냐 전격전 속도와 맞먹는 전과를 올렸다. 

 

그림 설명: 비스툴라 강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러시아군입니다. 

독일군 수비선에 생소한 부대 명칭이 등장하는데, 국민척탄병은 전멸한 사단을 다운사이징 형태로 재편성한 것으로 병력이나 전력 모두 예전의 사단보다 훨씬 약한 편성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격속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중부집단군 전멸이라는 대전과가 너무나도 화려했기 때문이다. 38개 독일군 사단 중에서 28개 사단이 사라졌고, 350,000~400,000 명의 독일군이 전사, 부상, 실종되었다. 러시아군 기록에 따르면 200,000명이 전사하고 85,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전선에 있었던 군단장 또는 사단장 47명 중 10명이 전사하고 21명이 포로가 되었다. 

 

1944년 7월 말, 러시아군은 동프러시아 국경까지 전진했고 그들의 슬로건은 '베를린을 향해'가 되었다.  

 

그림 설명: 1944년 8월 말 당시의 전황입니다.

러시아군은 이미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눈 앞에 두었고, 북부집단군이나 남부의 북부 우크라이나 집단군은 거의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르샤바에서는 러시아군의 지원을 기대하며 시민봉기가 일어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잔인하게 진압됩니다.

지도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유투브에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한 많은 동영상 자료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추천합니다. 영어 설명이지만 정교한 CG로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HuV_wUHRv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