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Play의 자료입니다. 대안역사는 그냥 재미로만 보면 되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길.
1941년 6월 아돌프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명령했을 때,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역사를 반복할 운명이다'라는 진리가 증명되었다. 129년 전 같은 달에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정복하겠다는 비슷한 꿈을 꾸며 국경을 넘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비극적인 실패로 막을 내렸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 암호명인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은 역사상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남아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사상자의 80%가 동부 전선에서 발생했는데 3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히틀러의 양대전선 전쟁은 파시스트 국가로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었고 결국 소련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면서 오판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히틀러가 동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일의 군장성들이 총통에게 침공하지 말라고 설득했다면?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안역사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매혹적이고 탐구적인 시도지만, 이 질문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고려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도 제한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히틀러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양립할 수 없는 이념의 적이었기 때문에 항상 소련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하고, '인간 이하의' 슬라브민족 노예화하거나 몰살시키고, 소련의 방대한 자원을 착취하고, 궁극적으로 게르만민족에게 필요한 레벤스라움Lebensraum(생활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우선 히틀러가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접근 방식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지연되는 시나리오와 그럴 경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준비되는 동안 독일군 장군들은 독일의 경제와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할 것이라며 총통을 설득했다. 실제로는 히틀러가 듣지 않았지만, 대안역사에서는 충고를 받아들여 동부전선 개전계획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가정해 보겠다.
히틀러의 관심은 어디로 향했을까? 1941년 중반, 히틀러는 영국전투에서 패배한 후 영국 정복 계획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가 다시 영국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을까? 동부전선에 투입된 인력과 자원의 양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주장이다. 동부전선의 자원낭비가 없었다면 독일이 계획한 영국침공의 암호명인 바다사자Sea Lion 작전에 효과적으로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로!라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영국본토 침공이 성공했으려면 덩케르크에서 연합군 34만명이 철수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았어야 하고, 영국전투에서 공습목표물을 도시로 돌리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독일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덩케르크에서 영국군 20만명, 프랑스군 14만명이 바다를 건너가게 두었는데 여기에서 설명하듯이 히틀러가 영국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독일의 군사력은 육군에 있었으며, 육군은 영국해군의 힘에 대항할 수 없는 지상군이었다. 해협을 건너는 침공이 성공하려면 히틀러는 하늘뿐만 아니라 대양도 장악해야 했다. 히틀러는 영국에 대한 상륙공격을 감행하려면 해군을 대폭 강화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했다.
설사 그렇게 했더라도 영국은 여전히 영국공군을 그대로 유지했고 미국의 무기대여Land Lease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또한 영국을 정복하고 침공할 실질적인 동력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소련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영국이 전쟁에서 이탈하는 정도만을 원했다. 사실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의 동맹관계를 원했고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공격을 연기한 후 그 시간을 이용해 영국을 더욱 압박하고 올가미를 조여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 위해 히틀러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실제역사에서 그는 북아프리카전선에서 승리를 보장할 만큼의 지원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안역사에서는 1939년 체결된 나치-소련 불가침 조약에 따라 자원이 동쪽으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북아프리카로 집중시킬 물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총통은 이제 병력과 병력을 남쪽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에르빈 롬멜과 그의 아프리카군단은 지원군을 받아 리비아와 이집트를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를 향해 진격하여 1941년 말과 1942년 초에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다.
일본전사가의 영향으로 롬멜과 아프리카군단이 무척 유명하지만, 실제 북아프리카전선은 동부전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거의 모든 전력과 물자가 동부전선으로 투입되었고, 롬멜은 말도 안되는 전력만으로 영국과 미국군을 상대하다가 결국에는 전멸직전에 이탈리아로 탈출합니다.
수에즈 운하가 나치의 통제하에 들어가면서 영국은 주요 병참 보급로를 잃었고 중동에서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여전히 서방에 두고 있던 히틀러는 몰타와 지브롤터 침공에 성공하여 영국을 더욱 압박한다. 영국은 협상 테이블로 내몰리거나 히틀러가 서부전선에서 걱정할만한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제 히틀러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할 것인지, 아니면 스탈린이 먼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볼 차례다. 현실에서 스탈린은 1941년 히틀러의 침공에 완전히 대비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여전히 혼란상태였고,공격 초기 며칠 동안 방어선이 붕괴되어 수백 km를 무인지경으로 내주었다.
그러나 새로운 타임라인에서 히틀러의 침공이 지연되면서 스탈린은 병력을 증강하고 전쟁경제를 활성화하여 수많은 전차와 비행기를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두 이데올로기가 언젠가는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에 체결한 협정은 10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서로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려는 목적이었다.
소련이 전쟁을 위해 더 잘 조직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특히 북아프리카, 지중해, 중동에서 히틀러의 승리를 목격한 후 전쟁을 선동하고 독일 침공을 명령할 수 있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더 잘 준비된 소련군이 결국 독일과 나머지 동유럽을 정복할 것인지 아니면 히틀러가 남부에서 거둔 승리로 독일군이 승리할 것인지? 아니면 양측이 유럽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지형을 개척하면서 모든 것이 교착 상태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의 원자폭탄이 유럽전선에서도 등장할 것인지?
대답은 여러분의 몫이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에 실제역사에서 동부전선 개전시기는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이 시나리오대로 개전이 연기되었다면 소련은 압도적인 지상군전력 그리고 약간 열세인 공군전력으로 히틀러를 위협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림처럼 미국이 천문학적인 규모로 군사지원을 했을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빼고 모두 미국물자라고 했을 정도로 지원을 받았는데, 대안역사처럼 소련이 개전을 했을 경우에도 지원했을 지 그리고 미국의 지원없이 소련 독자적인 전쟁수행이 가능했을 지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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