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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팬저 에이스 - 구사일생 (2)

by uesgi2003 2023. 2. 17.

치열한 전투보다는 탈출 드라마가 이어집니다. 

 

 

그 극적인 순간에 아군전투기가 러시아진지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기관총공습으로 땅을 쓸고 지나갔다. 러시아군은 우리보다 자신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나는 폰 코셀에게 다가가서 호프베버가 해치를 이용해 탈출하려던 순간, 아군 전차가 옆으로 돌진해 호프베버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말했다. 
볼츠와 무전병 하르트만의 행방도 알지 못했고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볼츠는 포로가 되어 스몰렌스크에 억류되었다가 열흘 후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풀려났다). 나는 권총을 베터하사에게 건네 주며 포로가 될 경우 먼저 나를 쏘아 달라고 했다. 
코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나를 쏘지 않았을 것이다. 터널에 있은 지가 90분이 지났고,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외부에서 러시아군의 소총사격이 때때로 터지면, 그때마다 아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위한 것이기를 바랐다. 
아군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터널의 마지막 5m를 기어가 도로 높이로 지어진 작은 벙커로 들어갔다. 벙커는 약 2m x 2m 정도였고 우리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8명이 이곳에 있었다. 안에서 발견한 황마자루로 벙커입구를 덮었다. 아무런 방어수단이 안되었지만 당시에는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베터하사는 벙커입구에서 내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러시아군을 사살할 준비를 했다. 나는 벙커 사격구멍옆에서 러시아군과 잘 위장된 저격수 위치를 관찰했다. 그 뒤로는 넓고 느린 드네프르강이 흐르고 있었다. 반대편 강둑에서는 스타리비초프의 집들이 보였는데 거리에는 독일군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따금씩 사격소리가 나고 러시아군이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러시아군이 바로 옆에 있었고, 풀밭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 위로 다가와 서 있었다. 러시아인들 중 한 명이 발로 두어 번 밟았고 천장과 벽이 흔들리면서 흙이 우리 주변으로 흘러내렸기 때문에 발 아래 땅이 텅 빈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점점 더 흥분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를 떠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벙커 사격구멍도 흙으로 막아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군의 사격이 더욱 거칠어졌다. 포병까지 동원해 스타리비초우를 포격했다. 매우 심한 진동으로 천장과 벽에서 흙이 다시 흘러내렸다. 확실히 포격은 아니었고 누군가 '러시아군이 다리를 폭파했다'고 말했다. 
전우들이 구하러 올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벙커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고 5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숨어 있는 부상자와 전차병들을 찾고 있었지만, 벙커보다 주저앉은 전차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마도 좁은 터널을 기어가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곧 저쪽에서 많은 고함과 시끄러운 흥정 소리가 들렸다. 전차 안에 들어가 카메라와 모든 개인 소지품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다투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갑자기 총격이 재개되었다. 러시아군이 우리 바로 위 도로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짧은 간격으로 총을 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포탄이 터지는 사이에 가끔씩 MG34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아군이 온 것일까? 너무 가까운데? 러시아군이 우리 전차에서 노획한 기관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폰 코셀소령은 부상으로 많이 괴로워했다. 벙커를 나가 헤엄쳐 건너는 탈출을 말했지만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달빛이 밝았고 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공간에는 엄폐물이 없었다. 우리 대부분은 지쳐서 졸고 있었는데 코를 너무 크게 골거나 잠꼬대를 하면 한 명씩 깨워야 했다. 
1941년 7월 5일 04시: 독일군의 공격에 가장 유리한 시간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군 전투기 한 대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0500시. 모든 것이 조용해졌고, 이제 오늘도 아군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았다.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시 어둠 속에서 벙커를 나가 드네프르강으로 내려가 헤엄쳐 건너는 방법을 논의했다. 
드네프르강을 건너도 러시아군이 있다면? 출발순서를 정하고 해가 질 무렵인 2200시로 시간을 정했다. 러시아군은 우리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주변을 수색했기 때문에 독일군이 자신들의 진지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전선이 36시간 동안 조용했으니 보초병들의 경계와 경계가 느슨해졌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기회였다. 
우리는 제방을 따라 다리와 강까지 약 250~300m를 엄폐물 없이 기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엄청나게 무더운 날씨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2000시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흐려졌다. 2100시가 되자 내가 칼로 벙커사격구를 넓혔다. 
그리고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게 군화를 벗었다. 검은 색 전차병상의도 벗었다. 소령은 자신이 뒤떨어지면 그대로 두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갑자기 구름이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밝은 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첫번째 사람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세 번이나 시도한 끝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세번째였는데 불과 몇 미터 위에 이반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우리는 풀숲을 헤치고 제방 밑으로 1미터씩 기어가면서 제방 밑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우리 왼쪽에서 금속성 소리가 났다. 러시아 기관총사수가 무기를 다루는 소리 같았다. 경계병이 우리를 발견했는데 무기가 고장 났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기다렸다. 한 발이면 러시아 참호 전체를 깨우고도 남았다. 
그런 경우 우리는 마구 달려 강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무언가 쉭쉭거리는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와 터지면서 흙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아군 포병이 러시아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고, 탈출하기 더 없이 좋은 기회였지만 아군의 포격에 누워있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몇 초 후 포탄이 쉭쉭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폭발하곤 했다. 
우리는 다리에 도착했고 물살에 가려진 작은 배를 물속에서 발견했다. 간신히 보트에 도착하여 노를 저어봤는데 갑자기 무언가 쉭쉭하는 소리가 났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높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나무로 된 선체로는 너무 위험해서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찾았다.

플뢰처하사가 다리 근처 갈대밭에 누워 있었다. 그는 반대편 강둑으로 헤엄쳐 아군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물기둥이 우리 위로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나머지 네 사람, 플뢰처, 마크그라프, 호프마이어, 그리고 나는 부서지고 남은 다리부분으로 도망쳤다. 
20초마다 포탄이 날아왔고 다리 위에서는 포탄파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안 좋은 상황이었죠. 러시아포병들이 우리를 향해 계속 포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보트로 달려갔다. 
우리는 천천히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고, 첫 번째 기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다시 전신선에 얽혀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보트가 잔잔한 물에 도달했는데 갑자기 '플뢰처, 플뢰처셔'라고 부르는 약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바로 코셀이었다. 
우리 중 다섯 명이 드네프르 강을 무사히 건넜다. 다른 동료 베터, 투르바니쉬, 오스트발트가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지역 어딘가에 배치되어 있을 아군 보초병들이 우리에게 발포할 경우를 대비해 매우 조심해야 했다. 

플뢰처는 강둑에서 마을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길을 따라 첫 번째 집까지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중 한 명이 바리케이드를 돌아서 가려고 할 때 아군 보초병이 보였다. 그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경계심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엄폐물에서 '보초병!'이라고 불렀다. 그는 깜짝 놀라며 소총을 들었고, '쏘지 마!'라고 외치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 포옹을 하려고 했지만, 소령은 부실한 경계에 대해 혼냈다. 
초병은 우리를 부대로 안내했고 의무장교가 큐벨바겐에 태워 스타리비쇼우 외곽의 숲에 있는 제35공병단 연대본부로 데려갔다. 연대장 큐벨바겐에서 잠자는 에버바흐를 발견했다. 코셀이 문을 열자 에버바흐가 깨어났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았다. 
재킷도 신발도 없이 흠뻑 젖은 채, 머리도 헝클어진 채 연대장 앞에 섰다. 마른 속옷과 외투를 가져왔고, 코냑 한 병이 한 바퀴 돌았고, 주방에서 뜨거운 국물과 닭고기가 나왔다. 이틀 전, 부르크하르트 중위와 네 명의 병사가 다리가 아직 멀쩡할 때 돌아왔다고 들었다. 
우리가 떠난 지 4시간 후 베터소위가 드네프르 강을 헤엄쳐서 하류로 내려왔다. 투르바니쉬가 익사했고 25 명 중 모두 11 명이 돌아 왔습니다. 훨씬 후에 운전병 볼츠가 열흘 동안 포로로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새 군복을 받았고 나는 부르크하르트중위의 포수로 배치되었다. 전차는 잘 작동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그 사이 도착한 내 생일 우편물을 받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시계가 들어 있는 소포를 보내주셨다. 
저녁에 적에 맞서 용기를 낸 공로로 7월 1일부로 부사관 진급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믿을 수가 없었다. 중위님은 샴페인 한 병을 준비해 주셨고, 우리는 전차 근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함께 술을 마셨다. 
1941년 7월 10일, 사단은 포병과 루프트바페의 상당한 준비 끝에 드네프르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1100시, 우리는 철십자 이등 훈장을 받았다.

정오에 스타리비초우로 가서 파괴된 우리 전차를 살펴 보라고 명령을 받았다. Me 110 2대가 저공비행을 하며 공습하고 있었다. 첫 포로들이 건너왔다. 이제 우리도 다리를 건너 먼 강둑에 도착했다. 길 왼쪽에서 간신히 군복으로 식별할 수 있는 쾨니히중위의 시신이 있었고 그 끔찍한 광경은 내 심장을 뒤흔들었다. 

 

 

 

공식명칭은 BF-110입니다. 영국전투에서 BF-109의 비행거리 제약때문에 BF-110이 폭격기 호위를 맡았는데 기대와 달리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거꾸로 109의 호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에 주력에서 밀려났다가 독일본토 방어전에서 야간전투기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동체를 어둡게 도색하고 중간에 20mm 기관포를 장착하고 야간폭격에 나선 연합군 폭격대 밑을 조용히 지나가면서 기관포탄을 쏘아 올려서 격추시켰습니다. 당시 야간전투기들은 모두 기수에 레이더를 달고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수색을 계속했고, 우리 전차 근처와 도로, 강 초원에 흩어져 있는 전우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먼저 내 장전수 호프베버였다. 그는 끔찍한 부상을 입었고 의심 할 여지없이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크롬퍼트, 린덴베르거, 스퇴셀. 이들은 여전히 전차에 앉아 있었는데, 직격탄에 린덴베르거의 머리가 찢어져 있었다. 이어서 게를스베르거가 누워 있었고,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중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한스 에버스베르크도 발견했다. 
탈출할 때에 대원들은 그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을 그곳에 두고 기회가 되면 부모님께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했었다. 이것은 전체 캠페인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전차에 함께 앉았던 전우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절단되고 부패하는 잔인한 광경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전차에 가서 아직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물건을 찾았지만 러시아군이 대부분의 물건과 가치있는 물건을 모두 가져갔다. 그러는 동안 선전 중대에서 사방에서 우리 사진을 찍었다. 나는 우리가 숨어 있던 구멍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살아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감탄했다다. 저녁 무렵 오토바이 중대가 도착했고, 전우들을 위해 무덤을 파고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