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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3부)

by uesgi2003 2012. 12. 6.

 

젊었을 때에 제 철학이 '뛰면서 생각한다'였고 '작전은 일단 첫 번째 총성이 울릴 때까지만 준비하면 되고 그 이후는 상황에 따라 바로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였습니다. 

지극히 행동지향적인 성격때문에 "만약에 그 산이 아니면 어떻게 할래? 그러니 먼저 알아보고 움직여야지"라는 조언을 받으면 "그럴 경우를 위해 2배 더 빨리 올라가야지. 그 산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대답을 했었죠.


동시에 많은 생각과 작업을 해야 하는 마케팅이 제 천직이었는데, 블로그에서도 저만의 장점이자 단점이 나오는군요.

욕심을 내서 긴 시리즈를 잡아 놓고는 그 도중에 계속 한 눈을 팔다가 더 매력적인 주제를 만나면 바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겠죠.


오늘 이야기는 지도자 시리즈로 한동안 미뤄두었던 거대 시리즈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에서 샤일로 전투... 그것도 겨우 3부입니다. 

제 이야기를 잘 읽어주신 분이라도 지난 이야기를 읽으셔야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대부분의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지도는 반드시 크게 해서 보셔야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남북전쟁 들어가가 - http://blog.daum.net/uesgi2003/205

샤일로 전투 1부 - http://blog.daum.net/uesgi2003/206

샤일로 전투 2부 - http://blog.daum.net/uesgi2003/208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2) - 샤일로 전투 (3부)


존스톤이 이끄는 40,000명의 남군은 온갖 악재를 무릅쓰고 4월 5일 저녁, 샤일로 교회에 주둔하고 있던 북군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공격 직전에 뷰리가드 장군은 체력이 바닥난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한다는 것을 반대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병사들은 식량도 떨어진 상태였고 브랙스톤 브래그 사단은 이미 2일 전부터 굶고 있었다. 

뷰리가드는 북군이 이미 공격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지난 2일 동안 하디(Hardee) 사단이 북군의 정찰대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었기 때문에 북군은 참호를 파고 들어 앉아서 남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존스톤은 단호했다. "공격은 예정대로 시작될 것이다."

(그림 설명: 오전의 전투 전개입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좌익은 포크 사단이, 그 뒤를 바짝 좇아서 브래그 사단이 중앙에, 그리고 우익에는 하디 사단이 사선대열로 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브렉켄리지(Breckinridge) 사단은 예비병력으로 남겨뒀다. 뷰리가드는 사선공격보다 3번의 순차공격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고 존스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했다. 존스톤은 뷰리가드의 능력을 믿고 있었는데 만약 원래대로 사선대열로 공격했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북군은 남군이 샤일로 교회 근처에 집결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랜트는 "적의 주력이 코린쓰에 있으며 우리에게 반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홀렉(Halleck)에게 알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지런한 북군 장교때문에 남군의 작전은 예정과 다르게 시작되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피바디(Peabody) 대령은 새벽 3시에 5개 중대를 남군 쪽으로 무력정찰하도록 보냈던 것이다. 오전 5시, 북군 정찰대는 하디의 전초대와 총격전을 벌였고 피바디는 주변 연대를 깨워 급하게 남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전 6시 30분, 존스톤은 전군에 전진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공격을 지휘하기로 했다. 하디와 포크 사단이 북군의 우익인 셔먼의 부대에 밀어닥쳤다. 셔먼은 지난 며칠 동안 남군의 접근에 대해 보고를 받았었지만 "너희 시민지원병들은 겁에 질려서 과장을 한단 말이야"라며 무시했었다. 남군의 엄청난 공격을 직접 보고서야, 셔먼은 급하게 말에 올라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지휘했다. 

셔먼의 부대는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지만 브레그 부대의 공격까지 더해지자 버티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림설명: 남군의 브레그 사단이 북군의 프렌티스 부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당시 병사가 스케치한 그림이며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셔먼의 전열이 무너지는 동안, 남군은 북군 중앙의 프렌티스(Pretiss) 사단을 향해서 압박해들어갔다. 가장 먼저 방어태세를 갖췄던 피바디 연대는 남군의 맹렬한 공격에 완전히 무너졌고 피바디는 사살되었다. 

오전 8시 45분이 되자, 북군의 모든 전선이 무너져내리면서 남군 주변은 피츠버그 랜딩과 강으로 달려가는 패잔병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기습의 충격에서 정신을 차린 북군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프렌티스는 약 1,000명의 병사를 한 곳에 모아 남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남군이 잠시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 후방에서 미처 투입되지 못했던 병사들이 북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셔먼은 이곳 저곳에서 급하게 투입되는 지원군 덕분에, 남군의 진격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샤일로 일대에서 북군이 재앙 직전까지 몰리고 있는 동안, 사반나에 있던 그랜트는 전장의 소음을 듣고 급하고 말을 몰아 전선으로 달려갔다. 피츠버그 랜딩에서 내린 그는 도망치는 패잔병들의 숫자를 보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 수 있었다. 만약 남아있는 병사들이 남군의 공격을 늦추지 못한다면 그리고 아직 사반나에서 지체하고 있는 뷰엘의 부대가 제 시간 안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패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눈 앞에 둔 남군은, 훈련과 규율이 잡히지 않은 오합지졸의 허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굶주린 병사들은 등돌린 북군을 추격하기 보다는 남겨진 텐트와 마차의 보급품을 챙기기 바빴고 심지어 개인적인 욕심으로 시체를 뒤지는 병사들까지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사령부에서 병력투입을 판단하고 있었던 뷰리가드는 총성이 가장 심한 곳으로 병력을 조금씩 보냈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곳에 너무 많은 남군이 투입되어 엉키거나 지휘관없이 투입되는 부대까지 생길 정도였다. 

존스톤은 뷰리가드를 믿고 사령부를 맡겼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질이 없었고 결국 남군은 북군만큼이나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오전 10시 30분, 약 5,000명의 남군과 6문의 야포가 북군의 마지막 저항선에 모여들었다. 피츠버그 랜딩까지 가려면 먼저 개활지를 건너서 북군의 저항선을 무너뜨려야 했는데 바로 이 지점이 말벌집(Hornet's Nest, 그림참조)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곳이다. 

존스톤은 프렌티스 부근의 북군에게 접근하던 2개 연대를 우측으로 돌려 만약의 반격에 대비했는데, 이 결정은 북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우익으로 다가오던 북군이 있었지만 자신의 사단에서 떨어져 나와 우왕좌왕하던 3개 연대가 전부였다. 

 

오전 11시, 남군 선봉대가 말벌집을 공격해 들어갔지만 병력이 많지 않아서 바로 격퇴당했고, 힘을 집중시키지 못하 남군의 공격은 계속 수포로 돌아갔다. 오후 12시 30분, 브레그 장군이 프렌티스 부대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집중사격을 받고 엄청난 피해만 입었다. 

말벌집이 남군을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동안, 북군의 우익에 있던 셔먼과 맥클러낸드 부대는 남군의 포크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 물러났고 자연스럽게 월레스(Wallace) 부대의 옆구리가 노출되면서 다시 이 부대는 프렌티스쪽으로 밀려들어갔다. 

남군은 북군의 좌익도 밀어내고 있었다. 오후 2시, 북군의 존 맥아더 여단이 피츠버그 랜딩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말벌집 방어선은 마치 말발굽 모양처럼 양쪽이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나를 따라라"라고 외치면서 진두지휘하던 존스톤은 오른쪽 다리 부상따위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2시 30분, 존스톤이 갑자기 말 위에서 비틀거리자 참모들이 달려들었지만 오른쪽 부상의 과다출혈로 전사하고 말았다(그림참조). 이제 뷰리가드가 남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세 방향에서 공격을 당하면서도 버티고 있던 말벌집의 북군은, 남군이 끌고온 62문의 대포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 방어가 약해졌고 남군은 포위망을 계속 좁혀들어갔다. 

우익의 월레스 부대가 모두 북쪽으로 달아나고 월레스도 치명상을 입자, 프렌티스 장군은 살아남은 2,300명의 병사와 함께 항복했다. 

그러나 말벌집이 버티는 동안 북군은 전열을 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셔먼과 맥클러낸드는 병력을 거의 잃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으며 도망병은 후방에서 긁어모아 전방으로 보내졌다. 


북군의 마지막 저항선인 말벌집도 무너뜨렸고 해가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북군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남군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총사령관 존스톤이 전사했고, 수십 개 여단이 서로 뒤섞여서 지휘계통이 무너졌고, 말법집을 공격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전투가 12시간이상 계속되자 굶주린 수 백 명의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약탈한 군수품으로 저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멀리 후방에 떨어져 있던 뷰리가드는 최전방의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일선 지휘관이 알아서 독자적인 결정을 해야만 했다. 

첫 번째 공격에서 대성공을 거둔 남군이 어이없게도 대혼란에 빠진 동안에 그랜트는 병력을 긁어모아 새 수비선을 만들 수 있었다. 우익에 셔먼과 맥클러낸드 패잔병을 배치시켰는데, 때마침 전장에 늦게 도착한 6,000명의 병력이 보강되었다. 

오후 5시 30분이 되자 뷰엘의 선봉대가 강을 건너 수비선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남군 제2 군단을 지휘하던 브랙스톤 브레그(Bragg)는 어둠이 내리기 전에 결전을 치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후 6시, 북군이 수비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휘하의 2개 여단에게 "전방에 있는 것은 모두 쓸어버려라. 적을 강물 속으로 넣어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받은 2개 여단 중 절반은 노획한 탄약을 보급받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탄약이 모두 떨어져서 총검만으로 돌격해야했다.

남군 앞에는 딜스 브랜치(Dill's Branch)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가파른 오르막이 있

었기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했고 대열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랜트는 이미 60문 이상의 포를 배치시켜두었는데 그 중에는 코린쓰 공성전을 위해 가져온 5문의 대형포(그림참조)가 있었다. 남군을 기다리고 있던 포병들은 포탄세례를 퍼부었고 테네시 강에 있던 타일러와 렉싱톤 전함도 지원포격을 했다. 전함에서 날아오는 30kg 포탄은 남군 머리 위에서 꽂히며 대열은 무너뜨렸고 북군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자 남군 여단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6시 30분, 날이 저물자 뷰리가드는 공격을 중단하고 휴식을 명령한 후에 리치몬드에 있는 남군 정부에 '완벽한 승리'를 보고 했지만 사실은 승리를 주장할 형편이 아니었다.

밤새 북군 지원병력이 강을 건너 보강되었다. 자정이 되자 4개 여단이 배에서 내려 딜스 브랜치 수비선에 합류했다. 동이 트기 전까지 3개 사단이 증원되었다. 

뷰엘은 그랜트를 무시하면서 독단적으로 새벽에 반격하겠다고 알렸고, 그랜트도 "날이 새면 공격할 생각이다. 놈들을 쓸어버리자"라고 참모들에게 알렸다. 

 

4월 7일 날이 밝았지만 남군은 공세를 이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남군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심지어 주변에 북군의 탄약박스가 널려있는데도 부대원의 탄약을 챙겨주는 장교가 없을 정도였다. 

뷰리가드는 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뷰엘의 병력이 절반이나 강을 건너왔는데도, 자신은 자리만 잘 지키고 있으면 그랜트가 알아서 테네시강을 건너 도망갈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북군의 반격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참호를 파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랜트는 남군보다 2배나 많은 45,000명의 병력으로 어제의 패배를 만회할 각오였다. 

오전 7시, 뷰엘의 선봉대가 남군 초병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북군은 남군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뷰엘은 15,000명의 병사들을 남군이 보이는 들판에 정렬시켰다.

갑작스런 북군의 등장에 놀란 하디는 몇 개 여단을 투입해 북군의 전진을 막게 했고 처음에는 북군도 흔들렸지만 새로운 병력이 투입되면서 남군의 반격은 무위로 끝났다. 

동쪽에서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북군 중앙은 브레그가 준비해둔 병력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 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쪽 끝에 있던 6,000명의 새 병력은 차음 남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림 설명: 북군이 반격하는 전투 전개입니다. 부대 별로 알아야 할 정도의 전투도 아니고 이 정도 영어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두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북군을 막아낼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브레그는 패트릭 클레번(Cleburne)에게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그에게는 겨우 800명만이 남아있었다. 설득에 실패한 클레번은 북군의 십자포화 속으로 들어갔고 셔먼과 맥클러낸드의 공격 앞에 사라져갔다. 

오후 2시 30분, 뷰리가드는 남군 전체에 코린쓰로 후퇴하라는 총퇴각령을 내렸고 마지막 예비부대를 투입해서 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했다. 뷰엘의 나머지 병력까지 전장에 투입된 것을 알게 된, 뷰리가드는 직접 최전방으로 말을 몰고 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러글스(Ruggles) 사단과 우드(Wood)여단이 샤일로 교회 근처에서 잠시 버텼지만 북군의 공세에 밀려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부대가 명령에 따라 북군에게서 노획한 군수품에 불을 지르고 코린쓰로 향하는 진흙길을 뛰어갔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 두 시간이 남았지만, 그랜트와 뷰엘은 전장에서 적을 몰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북군은 13,000명을 잃었는데 그 중에 11,000명은 그랜트의 병력이었고 그가 보유했던 병력 중 25%가 사상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전날의 남군처럼 북군도 추격해서 결정타를 날리기에는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남군은 10,700명을 잃었지만 무엇보다도 사기가 떨어진 것이 문제였다. 눈 앞에서 사라진 승리뿐만 아니라 전장에 동료의 시체를 버려두고 달아났다는 사실은 남군의 미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뷰리가드(그림참조)는 4월 8일에 코린쓰로 부대를 이동시켰고 네이턴 베드포드 포레스트 휘하의 350명 기병이 퇴로를 지키고 있었다. 셔먼의 4개 보병여단이 그 뒤를 쫓다가 포레스트의 반격을 받았다. 방심하다 기습을 받은 셔먼의 부대는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무너졌고 포레스트와 마주친 셔먼은 포레스트의 권총탄알이 바닥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포레스트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북군의 본대에 뛰어들었다가 부상을 당하고 황급히 도망을 쳤다. 

이것이 그 날 벌어진 가장 큰 전투였다. 그랜트는 남군을 추격하고 싶었지만 뷰엘이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5,000명의 부상병을 끌고 간신히 코린쓰로 돌아간 남군은 3,000명 만이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고 10,000명은 코린쓰의 오염된 물을 먹고 설사병과 장티푸스에 걸렸다. 


70,000명까지 불어난 그랜트와 뷰엘의 병력은 코린쓰로 밀고 들어가서 남군 패잔병을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었지만 승리를 확신한 그랜트가 시간을 조금 더 끈 것이 운명을 바꿔놓았다. 4월 11일, 홀렉(Halleck) 장군이 전장에 와서는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고 평소 싫어하던 그랜트는 참모로 돌려놓았다. 모욕을 당한 그랜트는 하마터면 군대를 떠날 뻔 했다. 

홀렉은 병력을 재조직한다면서 무려 3주의 휴식을 취했고 110,000명까지 불어난 병력을 3개 군단으로 나누어 뷰엘, 토마스, 포프에게 맡겼다. 엄청난 전력을 가졌지만 홀렉은 여전히 극도의 조심성을 보이며 한 달 동안 피츠버그 랜딩에서 코린쓰 외곽까지 겨우 32km를 진격했다. 그리고 부대를 멈출 때마다 남군의 반격을 걱정하며 참호를 파게 했다. 

뷰리가드가 지원군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겨우 12,000명에 불과했고 병에 시달리고 있던 55,000명의 남군은 북군의 공격을 막아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렉의 신중한 대처는 남군을 살려주는 꼴이 되었다. 

 

뷰리가드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은 북군이 오기 전에 코린쓰에서 들키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뷰리가드는 수십 량의 기차를 코린쓰로 불러 모았고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환호성을 질러서 마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기차들은 빈 채로 들어와서 나갈 때에는 남군에게 필수적인 군수품을 가득 실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중한 홀렉은 더욱 신중해졌고 5월 30일, 뷰엘과 포프의 선봉대가 코린쓰에 진입했을 때에는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이 그들을 반겼다. 남군이 마지막 남은 탄약을 모두 불태운 것이었다. 코린쓰에는 단 한 명의 남군도, 심지어 캔 하나도 남겨지지 않았다(그림참조). 


자신의 위장퇴각을 대단한 성공이라고 착각한 뷰리가드는 병력을 남쪽으로 80km 정도 이동시켰을 때에 경질 소식을 들었다. 남군 대통령 제퍼슨은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코린쓰를 잃은데다가 북군의 대군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남부 깊숙히 전진한 것에 몹시 화를 냈다. 

그러나 제퍼슨 대통령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린쓰를 무혈입성한 것에 만족한 홀렉은 다른 작전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홀렉은 대신에 워싱턴 정부에 전과를 보고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한 곳에 모으기도 힘든 대군을 다시 둘로 나누어 뷰엘은 북동쪽으로 보내 차타누가(Chattanooga)를 점령하게 하고, 그랜트는 멤피스로 그리고 포프는 코린쓰를 방어하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그랜트가 나중에 한탄했듯이, 전쟁을 순식간에 끝낼 수도 있었던 대단한 승리를 평범한 전투로 만들어 버린 결정이었다. 


샤일로 전투의 피해

북군 - 전사 1,754명  부상 8,408명  실종 2,885명  총 피해  13,047명

남군 - 전사 1,723명  부상 8,012명  실종 959명     총 피해  10,694명

 

(그림 설명: 남군의 사진으로 의외로 남군에도 흑인병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자의였던지 타의였던지 많은 사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진과 같은 포즈가 남북전쟁 초기 유행했던 포즈인 모양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 중에도 저렇게 대검과 권총을 뽑아든 사진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후손들은 우리 시대 사진을 보면서 "왜들 저렇게 촌스럽게 두 손가락을 펼치냐?" 할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