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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19세기의 전투(1) - 텍사스 독립의 원동력, 알라모 전투

by uesgi2003 2011. 9. 25.

 

이번 이야기에서는 명칭에 대해 미리 입장을 밝혀둡니다. 예고편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텍사스는 멕시코(스페인어를 사용하는)의 영토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명칭에 대해서는 스페인어 발음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미국 도시를 발음하거나 멕시코(메히꼬), 텍사스(떼하스)와 같이 너무 생소한 경우에는 영어발음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알라모 전투는 미국인의 건국전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미국인에 대해서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멕시코의 당시 역사에 대해서도 설명해서 균형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멕시코를 망친 독재자 산따 아나 편을 먼저 읽거나 알라모 전투를 먼저 읽거나 상관은 없습니다만, 반드시 산따 아나 이야기는 읽으셔야 멕시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13

스페인 수도원 요새에서 용감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신화, 전설, 미스테리

 

Lee Paul (Military History 2004년 특별판) 

 

1836 2 23, 알라모(Alamo, 현재의 텍사스 샌 안토니오)가 포위되면서 오래된 스페인 수도원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가 된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수 많은 전투에서,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는 왜 알라모 전투가 가장 돋보이는 것일까?

 

그림 설명: 알라모 최후의 순간. 그러나 이 그림과 달리 소총을 휘두르는 크로켓은 전투 중에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 때문일까? 물론 그런 것도 있다. 그 당시의 상황? 그것도 이유 중 하나다. 아니면 전설과 신화로 지금까지 이어져왔기 때문일까? 맞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전투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전투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1960년 역사가 발터 로드(Walter Lord) "알라모에서 일어났던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을 한다면 경솔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주의해야 한다.

 

역사에 따르면 알라모 전투는 3번의 혁명과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혁명은 1808,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 군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혁명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Bonaparte)는 스페인을 침공해 6년간 통치했지만, 스페인 저항군은 프랑스 황제를 몰아내고 페르디난드(Ferdinand) 7세를 왕좌에 복귀시켰다. 스페인 국민의 저항은 바다를 건너 멕시코에 전달되었고, 멕시코의 수도사 미겔 히달고(Miguel Hidalgo) 1810 9 15일 한 밤중에 돌로레스(Dolores)의 한 작은 교회의 종을 울려 두 번째 혁명에 불을 붙였다.

스페인 정복자에 대항한 불길은 멕시코 전역으로 번졌고 당시 멕시코의 북부 국경지대였던 텍사스에 이르렀다. 텍사스 수도였던 산 안또니오 데 벡사르(San Antonio de Bexar)는 혁명의 중심지이자 저항군의 해방구가 되었다. 혁명군의 호세 멘짜까(Jose Menchaca) 대위가 스페인에 잡혀 사형을 당한 후에 머리가 잘려 알라모 수도원 앞에 효수되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저항의 열기는 더해갔다.

멕시코는 11년 동안이나 저항한 끝에 1821년에 자유를 얻었다. 같은 해에, 스페인 군에서 저항군 지도자로 변신한 아구스띤 데 이뚜르비데(Agustin de Iturbide) 장군이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안또니오 로뻬쓰 데 산따 아나(Santa Anna) 장군이 이뚜르비데 정부를 몰락시키고 멕시코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이뚜르비데는 미국인들의 텍사스 정착을 허용했었는데, 카톨릭 교인이면 누구나 토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에 거부감이 없는 미국인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트래비스(William Travis)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카톨릭이 되었다가 알라모에서 죽을 때까지 감리교를 고수했다.

 

그림 설명: 멕시코와 미국 국경지도입니다. 텍사스는 멕시코의 영토였지만 미국인이 대거 이주하면서 사실상의 미국영토화됩니다. 텍사스를 시작으로 멕시코는 남서부의 거대한 영토를 미국에게 내주게 됩니다.

이 영토를 제대로 지켰다면 지금의 세계최강국은 멕시코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지배를 제대로 했다면 절대적 강대국이 되었을 테지만요.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불행하게도 막 출범한 멕시코 공화국은 이미 파산상태였고 자치정부를 조직할 능력이 없었다. 멕시코 공화국은 독립 후 15년 동안 13명의 대통령이 통치했었는데, 모두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유를 추구하는 연방주의자와 독재주의의 중앙집권주의자로 쉴새없이 바뀌었다. 초대 대통령은 혁명영웅이자 연방주의자였던 과달루뻬 빅또리아(Guadalupe Victoria) 장군으로, 1824년에 자유 헌법을 제정해 산타 아나의 분노를 샀고 결국 12년에 알라모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이렇게 멕시코 내부의 리더십이 흔들리면서 멕시코 북부국경이었던 텍사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멕시코가 1824년에 국경을 다시 확정하면서 텍사스는 자치권을 잃게 된다. 텍사스는 멕시코 꼬아울리아(Coahulia)에 합병되어 수도도 산 안또니오에서 살띠요(Saltillo)로 바뀌게 되면서 시민들이 무장하고 저항에 나서게 된다. 1835 9, 시민군은 꼬아울리아와 분리된 독립 자치권을 청원했고 선언문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와 불만을 공개하면서, 텍사스 시민은 1824년 헌법이 지켜지고 여기에서 보장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1833년에 권력을 장악한 산따 아나는 멕시코 땅에서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텍사스 시민들의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사촌 마르띤 페르훽또 데 꼬스(Martin Perfecto de Cos)의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1835 10, 1,200명의 멕시코 군이 산 안또니오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꼬스는 산 안또니오에서 약 70km 동쪽의 곤잘레스(Gonzales) 마을로 가서 수비용으로 빌려준 대포 한 문을 되돌려 받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원래 인디안의 공격에 대비한 소구경포로 시민군이 멕시코 군에게 사용하지 못하게 돌려받으려고 했던 것인데, 마을 주민들은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봐"라며 우마차에 실린 포를 발사했다. 이 사건으로 단 한 명의 멕시코 병사가 부상을 당했을 뿐이지만 곤잘레스는 텍사스의 렉싱톤(Lexington, 미국 독립전쟁의 한 전투)이라 불리며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텍사스 혁명이 일어난다.

12 5, 200명의 텍사스 시민군이 산 안또니오의 알라모에 있던 꼬스의 부대를 공격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진다.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벌이는 시가전은 멕시코 군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투였기 때문에, 꼬스는 4일 만에 알라모에 항복 깃발을 내걸고 만다. 200명의 멕시코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수 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의 군대는 텍사스 시민군에게 산 안또니오의 모든 공공재산, 자금, 무기와 탄약을 넘겨주는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 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리오 그란데(Rio Grande)를 건너 멕시코로 도망쳤다. 텍사스 시민군 지휘관인 벤 밀람(Ben Milam)이 죽었지만 겨우 20명만이 전사해 완승을 거둔 셈이었다.

꼬스의 패배를 들은 산따 아나는 즉시 보복에 나선다. 그는 대부분 미국과 유럽 용병인 8,000명의 병력을 모아 텍사스로 진군한다. "중미의 나폴레옹"이라고 자칭하는 산따 아나답게 행렬의 가장 앞에 서서 텍사스 시민군을 반드시 몰아내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의 태도를 본 참모들은 "이번 전쟁에서는, 포로는 없겠는걸"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왈: 이 기록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산따 아나가 전문용병을 8,000명이나 동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멕시코의 재정상태로 봤을 때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의심됩니다. 다른 자료들은 산따 아나가 동원한 군대가 농민이 대부분인 급조된 군대였으며, 그 규모도 최소 1,700에서 최대 8,000명이라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이미 계절이 한 겨울이었지만, 산따 아나는 군대를 텍사스로 밀어붙였다. 북부 멕시코 사막의 한겨울 날씨는 당연히 멕시코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수 백 명의 시체가 도로에 남겨졌다. 그리고 공성용 대구경 포가 진흙탕에 빠지자, 산타 아나는 포를 그대로 버려두고 가기로 결정한다. 그만큼 텍사스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림 설명: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린 멕시코 군입니다. 여기에서는 농민부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군이 다가오는 동안 제임스 C. 네일(James C. Neill) 대령이 겨우 80명 밖에 안되는 알라모 수비군의 지휘를 맡게 된다. 윌리엄 R. 케어리(William R. Carey) 지휘의 1개 포병 중대, 윌리엄 블레이즈비(William Blazeby) 지휘의 2개 보병중대, 그리고 로버트 와이트(Robert White) 지휘의 벡사르(Bexar) 근위대가 가족과 겨울휴식을 보내고 농장일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1836 1 17, 시민군 사령관 샘 휴스톤(Sam Houston)은 제임스 보위(James Bowie) 대령과 25명의 병사를 산 안또니오로 보내 알라모 요새를 파괴하고 포대와 함께 동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보위와 네일은 노획한 24문의 포를 소나 말없이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텍사스 시민군이 배치한 것 중 가장 큰 화력을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보위는 지형과 병참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휴스톤 장군이 멕시코 군에 대항할만한 군대를 모집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보위는 네일이 병으로 떠난 후에 명령을 어기고 요새를 보강하기 시작한다.

 

윌리엄 트레비스 대령이 2 2일에 소수의 기병대원을 이끌고 산 안또니오에 합류하면서 알라모 요새의 인원은 130명으로 늘어난다. 척후병이 산따 아나가 리오 그란데를 이미 건넜다고 알려주었지만, 트레비스는 그가 초봄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군수품과 증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그림 설명: 텍사스 지원군을 모집하는 포스터입니다. 당시 외교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은 지원군대신에 이민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와 보위는 지휘권을 두고 심각한 대입을 했지만 결국 보위가 지원병을 맡고 트레비스가 정규군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 8, 데이비드 크로켓(David Crockett) 14명의 테네시 기병 지원병(정작

테네시 출신은 3명뿐)이 더 합류한다. 멕시코 군이 드디어 마을 외곽에 나타나자, 트레비스는 증원요청을 급하게 보낸다. 2 24일 편지에 따르면 "텍사스 시민과 전세계 모든 미국 국민에게 보냅니다.... 저는 절대로 항복하거나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승리아니면 죽음만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단호하면서도 애절한 간청이 담겨있었다.  트레비스는 알버트 마틴(Albert Martin) 대위 편에 이 편지를 보냈다.

 

그림 설명: 알라모 요새의 전설적인 3인방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산따 아나는 휴스톤이 이끄는 텍사스 시민군과 직접 맞붙었을 것이고, 준비가 부족했던 텍사스 군이 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크로켓은 그 동안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다른 모습이어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내기 하루 전인 2 23, 산따 아나는 산 안또니오를 점령했다. 군악대의 트럼펫 연주에 맞춰 마을을 점령한 후에 알라모 요새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그는 산 훼르난도 (San Fernand) 교회 종탑 위에 "자비는 없다(no quarter)"라는 깃발을 건다. 알라모 내에서는, 트레비스와 텍사스 시민군이 18 파운드 포를 발사해 산따 아나에게 단호한 대답을 들려준다. 멕시코 군의 군악대에 대항해 크로켓의 바이올린 연주가 울린다.

 

 

산따 아나는 12일 동안 포와 소총으로 요새를 두들겼는데, 수비군이 잠도 못자고 쉬지도 못하게 한 다음 쇠약해진 요새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소음은 멕시코 군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워낙 소음이 심해서 요새를 오가는 기병을 제 때에 제지할 수 없었다. 3 3, 적진 한 가운데를 뚫고 마지막 지원군이 알라모에 합세한다. 이들은 곤잘레스에서 온 구원군으로 트레비스의 지원요청에 유일하게 응답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알라모 수비군은 190명으로 늘어났다.

 

그림 설명: 알라모 요새의 평면도입니다. 원래 카톨릭 교회였기 때문에 요새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고 수비군 숫자도 190여명에 불과해 몇 시간 안에 충분히 점령할 수 있는 간단한 전투였습니다만, 요새에는 24문의 노획대포가 있었고 산따 아나가 수비군을 과대평가했었기에 오래 걸린 전투가 아니었나 합니다.

또는 산따 아나가 여기로 텍사스 구원군을 끌어들여 승부를 결정지으려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산따 아나는 손쉬운 전투에서 무려 13일을 허비하는 바람에 텍사스 시민군은 병력과 무기를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됩니다.

 

1836 3 6일 오전 4, 산따 아나는 부하들을 알라모 요새의 벽에서 200m 거리까지 전진시킨다. 아침이 밝아오자, 멕시코 나팔 소리 데게요(Deguello)가 울려 퍼진다. 텍사스 지역 출신의 멕시코인들로 알라모 요새에 합류했던 떼하노스(Tejanos, 텍사스 사람들이라는 스페인어)가 이 음악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라는 뜻이라고 알려준다.

 

(우에스기 왈 : 데게요는 영어로 Slit throat to Invaders로 침입자의 목을 베라는 뜻입니다. 아래는 데게요 연주로 요즘에 맞게 좀 구슬프게 편집한 연주입니다.)

 

산따 아나의 첫 번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공격도 트레비스 포대의 맹렬한 포격으로 무산되었다. 세 번째 공격에서는, 세 방향으로 나뉘어 분산공격을 했지만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수도원 벽을 두고 육박전이 벌어져 처참한 시체가 곳곳에 널렸다. 교회 입구부터 막사까지 모든 곳에 피가 흘러 수도원 전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전투는 90분 만에 끝났다.

산따 아나는 텍사스 시민군을 모두 죽이고 진압했지만 600명을 잃고 더 많은 부상병이 발생했다. 그는 알라모 정복을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참모는 "이런 식으로 한 번만 더 승리하면 우리 군대가 남아나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

전사한 멕시코 군은 교회의 장례식을 거쳐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지만 텍사스 시민군의 시체는 근처 숲에서 가져온 마른 장작과 함께 쌓아올렸다가 불태웠다. 유일하게 제대로 매장된 사람은 호세로, 그는 꼬스 장군의 근위대원을 형으로 둔 덕분에 이런 모욕을 피할 수 있었다.

 

산따 아나는 알라모를 정복한 지 6주 후에, 아직 부상병이 산 안또니오에 누워 신음하는 동안, 산 하씬또(San Jacinto)에서 자신의 워털루를 만나게 된다. 알라모 수도원 벽에서 죽어간 시민군 덕분에 휴스턴 장군은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있었고 텍사스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알라모 수비군의 위대한 희생은 역사에 분명하게 기록되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전설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림 설명: 산 하씬또 전투 장면입니다. 이 전투에서 텍사스 시민군은 40명의 손실만 입은 반면에 멕시코 군은 무려 1,400명 모두가 전멸/포로가 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산 하씬또 전투에서 패배한 산따 아나가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텍사스 시민군이 알라모 전투의 보복으로 처형했다면 멕시코의 역사는 조금 더 밝아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에스기 왈: 이하의 긴 내용은 알라모 요새에서 죽어간 미국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로, 미국인들에게는 중요하겠지만 세계역사에서는 그 정도의 비중이 아니기 때문에 요약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나왔듯이 요새에서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구전설화와 같이 어느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정규군을 지휘했던 트레비스는 전투를 앞두고 땅에 줄을 그으며 "텍사스의 그랜드 캐년이다. 독립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선을 넘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트레비스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시민군이 자원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전멸하는 것이 분명한 전투에서 떠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단 한 사람만이 떠났는데, 프랑스에서 온 루이 로즈(Louis Rose)로 그는 이미 나폴레옹 군대에서 참전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함락되기 직전에 요새를 떠났다고 한다. 탈출하면서 선인장에 워낙 심하게 다쳐 평생을 고생했다고 하는데, "신은 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알라모 함락 순간에 측근과 함께 전사했다고 알려진 데이빗 크로켓은, 요새가 함락된다는 것을 알고도 3 3일에 연락병으로 들어간 제임스 버틀러 본햄 중위와 함께 포로로 잡혀 산따 아나가 처형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항상 모험을 즐기는 전형적인 개척시대의 미국인으로 미국 국회의원을 3번 당선된 다음에 4번째에서 낙선하자 이전의 모험을 즐기던 생활로 돌아가 텍사스의 독립을 위해 알라모로 들어갔다. 그는 고향인 테네시를 떠나 텍사스로 향하기 전 지역주민에게 "지금은 정치활동을 그만둡니다. 텍사스 시민군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텍사스로 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알라모가 함락되는 순간에 크로켓이 소총을 거꾸로 잡고 백병전을 벌이다 총검에 찔려 전사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다.

크로켓이 살아있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알라모 요새에 수감되어 있던 꼬스 장군에게서 나왔다. 크로켓이 막사 안에 자신을 가둬두었었는데, 멕시코 군이 그를 막사 안에서 발견하자 "꼬스 장군을 만나던 참에 알라모 요새가 함락되어 탈출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크로켓은 꼬스가 산따 아나에게 잘 말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산따 아나는 "포로는 없다"라고 말했었기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

 

1878년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크로켓과 다섯 명이 살아남았다가 마누엘 훼르난데쓰 까스트리욘 중장에게 항복해 목숨을 건졌다가 산따 아나의 명령에 의해 바로 처형을 당했다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 1836년의 멕시코 군 중위의 일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1970년대에 영어로 번역되어 공개되면서 크로켓의 영웅담에 심취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시민군을 지휘했던 보위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는 요새보강 공사 도중에 다쳐 병상에 누워있다가 함락직전에 크로켓이 전해준 두 자루의 권총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알라모 수비군의 최후 전사자가 되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요새의 벽을 내주면서 수비군은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갔는데, 그 급한 상황에서 보위를 교회까지 데려갈 수 없었고, 그를 발견한 멕시코 군은 거의 죽어가는 그를 불쌍하게 여겨 내버려뒀지만 멕시코 귀족과 결혼해 큰 재산을 얻어놓고도 텍사스 시민군에 합류한 것에 분노한 산따 아나가 병상째 불길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이 어떻든, 알라모 요새에서 목숨을 던지 190명의 영웅덕분에 미국은 텍사스를 얻는 동시에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에스기 왈: 다음 자료들은 Osprey 도서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냥 가볍게 보시면 됩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니까 꼭 확대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멕시코 군은 군복을 입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 인디오 혼혈의 멕시코 군의 체격은 정말로 작았습니다. 백병전에서는 텍사스 시민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동영상은 알라모 전투 영화로 화질은 좀 안좋지만 자막이 있는 것으로 선택했습니다. 시간여유를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알라모 전투 (2004년도 영화)의 주요 장면입니다. 초반 탐색전 후에 최종 함락 그리고 싼 하씬또 전투 순서입니다.

 

 

 

 2004년 판에서는 크로켓이 전사하지 않고 포로로 처형되는, 수정된 역사관을 보여줍니다만 영화에서 처럼 마지막까지 영웅다운 모습을 보여줬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영웅과 전설은 그대로 두는 것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