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3) - 앤티텀 전투 (2부)

by uesgi2003 2012. 12. 13.

(급하게 정리하느라 오탈자와 어색한 내용이 있습니다. 주말에 다시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아직도 문을 열지 않았군요. 이미 증거자료는 모두 소프트웨어로도 물리적으로도 영원히 삭제할 시간은 충분했을텐데 아직도 버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일베충을 포함한 일부 알바 (혹시 정직원?) 들은 '민주당이 인권을 유린했다'라며 황당한 쉴드를 치던데... 재미있습니다. 

 

이제 2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많은 병력과 지휘관이 움직인 미국 남북전쟁 최대 전투 중 하나라, 모두 설명했다가는 저도 질리고 여러분도 질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건너뛸테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지도를 크게 띄워놓고 보셔야 긴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가 왜 명장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많은데, 역사를 통틀어 일선 병사가 무한한 존경과 복종을 보인 지휘관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남군 병사들은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순간에도 그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는데, 리 장군이 그만한 능력과 인품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자료들에서 병사들의 표정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게더군요.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3) - 앤티텀 전투 (2부)

 

남군의 위기는 생각보다 빠른 9월 14일에 시작되었다. 맥클레란의 선봉대가 벌써 사우스 마운틴에 나타난 것이었다. 1부에서 설명했듯이, 리는 북군이 신중하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고 포토맥 강을 건너는 순간에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사우스 마운티 통로에 겨우 1개 사단만 남겨두었었다.

그러나 맥클레란은 예상을 깨고 워싱턴에서 즉시 나와 남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둘로 나뉜 남군 중 하나를 먼저 격파한 후에 나머지 하나도 격파할 생각이었다.

그는 롱스트리트(Longstreet)에게 즉시 남쪽으로 귀환할 것을, 잭슨에게는 하퍼스 페리에서 바로 합류할 것을, 그리고 휘하의 얼마 안되는 병력에게는 터너스 갭(Turner's Gap)을 전멸하더라도 반드시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군 제이콥 콕스(Cox)가 터너스 갭을 지키던 남군을 우회하려고 3,000명을 폭스스 갭(Fox's Gap)으로 보내면서 오전 9시부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남군은 지휘관인 사무엘 갈란드 장군은 전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2시간 만에 밀려났다.

 

(이제부터 1부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지도는 웹에서 가져온 것이고 본문에서는 많은 생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참조만 하시기 바랍니다.)

 

9월 17일 새벽, 포토맥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남군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맥클레란은 북쪽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남쪽으로 모든 남군에게 차례로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았는데도, 이미 개울을 건너와 있던 조세프 후커(Hooker)의 1군단 중 3개 사단이 남군의 좌측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는 스톤월 잭슨이 작은 교회 주변에서 북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던 지역이었다. 후커에 이어, 맨스필드(Mansfield)의 12군단이 개울을 건너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엄청난 포화를 주고 받는 동안, 남군에게 달려든 후커의 부대는 남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북군의 조지 미드(Meade)와 제임스 리켓(Rickett)의 사단도 옥수수밭 끝의 숲에서 나와 지원했지만 남군의 알렉산더 로톤(Lawton)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오전 7시, 옥수수밭(Cornfield)의 남쪽 끝에서 수비하던 남군의 대열이 무너지자 루이지아나 여단이 급하게 보강되었고 리켓의 마지막 예비병력과 맞붙었다. 루이지아나 여단의 500명 중 323명이 죽었고, 북군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큰 피해를 입었다.

옥수수밭 북쪽에서는 북군의 애브너 더블데이(Doubleday) 사단이 남군의 좌익을 밀어내며 조금씩 전진하면서 던커(Dunker) 교회의 남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에, 남군 윌리암 스타크(Starke)의 2개 여단이 과감한 반격에 나서 북군의 우측을 찔렀지만 스타크는 전사했고 병력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서쪽 숲(West Woods)로 들어갔다. 북군은 계속 던커 교회로 전진해갔다. 

 

남군의 좌익이 무너질 것 같자, 잭슨은 마지막 예비부대인 존 벨 후드(Hood) 사단을 투입했다. 텍사스 여단을 비롯한 후드 사단은 북군을 다시 옥수수밭 너머로 돌려보냈다. 위기를 모면했지만 피해가 너무나도 심각했다. 텍사스 여단의 경우 무려 82%가 사상당했다. 후드의 활약덕분에 북군의 진격은 멈췄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이제 맨스필드의 7,200명이 동쪽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남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새로운 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맨스필드는 수십 년 동안 군경력을 쌓았지만 야전지휘관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의 병사들도 대부분 신병이었다. 자연스럽게 12군단은 전열을 갖추지 못했고 마구잡이로 숲에서 나오다가 잭슥과 힐의 부대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맨스필드는 중상을 입었고 앞 열은 옥수수밭 동쪽 끝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조지 그리니(Greene)가 12군단을 지휘하면서 던커 교회 앞까지 전진했지만 전열을 가다듬은 남군에 막혔다. 

 

오전 9시, 북군은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후커는 부상을 당했고, 맨스필드는 죽어가고 있었으며, 수 천 명이 옥수수밭 부근에 쓰러졌지만 더 이상 진격해들어가지 못했다. 

앤티템 개울의 오른쪽 저택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맥클레란은 에드윈 섬머(Summer)의 2군단에게 돌파구를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섬머는 1개 사단을 예비병력을 남겨두고 2

개사단을 이끌고 개울을 건너 좌익의 전투로 병력이 빈 중앙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섬머는 부대와 속도를 맞추지 않고 성급하게 존 세지윅(Sedgwick)의 부대의 공격에 합세했고, 그의 병사들은 롱스트리트 부대가 지키고 있던 좁은 길에 들어섰다.

서머와 세지윅은 남군의 저항이 거의 없자 거칠 것 없이 서쪽 숲으로 달려갔지만, 왼쪽을 남군에게 완전히 노출시켰다. 

북군의 옆구리가 노출된 것을 본 주발 얼리(Early, 로톤의 부상으로 지휘권을 받은)와 라파예트 맥크로(McLaws)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력을 투입해 북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세지윅이 큰 피해를 입는 동안, 프렌치(French)는 성큰 로드(Sunken Road, 참호처럼 내려앉은 길)에 틀어박힌 남군에게 다가섰다. 북군의 대열은 계속 쓰러지면서도 다가섰고 남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섬머의 예비사단이 투입되면서 성큰 로드에서 남군을 밀어낼 수 있었다. 성큰 로드는 "시체더미 길(bloody lane)"이라고 부를 정도로 시체로 채워졌다.

남군의 중앙은 뚫릴 듯 하면서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손쉽게 승리할 줄 알았던 맥클레란은 병사들의 엄청난 피해에 충격을 받았지만, 북군의

좌익에 있던 앰브로우즈 번사이드(Burnside)가 명령대로 앤티텀 개울을 건너 남군의 취약한 남쪽 옆구리를 공격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번사이드는 오전 내내 개울의 3개 다리를 건너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12,500명과 50문의 대포라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소수의 남군이 지키는 다리를 오후 1시까지도 건너지 못했다. 

번사이드의 9군단이 다리를 건너 서쪽 강둑에 올라서기만 하면 좌익의 전투를 응원하기 위해 병력을 모두 동원한 남군의 궤멸은 시간문제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번사이드가 지체하는 동안, 하퍼스 페리(Harpers Perry)를 뒤처리하느라 미처 합류하지 못한 힐(Hill)이 남군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8시간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25km를 행군해 온 것이었다.

오후 4시, 새로 도착한 힐의 부대가 번사이드의 진출을 막아냈다.

 

남군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전선을 지켜냈고,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맥클레란은 마지막 예비사단까지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남군을 앤티텀 서쪽에 묶어두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거의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끝났고, 대학살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양쪽 병사들은 다음 날의 전투를 위해 캠프로 돌아갔다. 

 

9월 18일 새벽이 밝자 전날의 전투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22,000명 이상의 남북군이 사상당했으며 샤프스버그 주변에만 4,000구 이상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북군 포병장교 업톤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시체를 쌓는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본 것은 앤티텀 전투가 처음이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죽어버렸다"라고 썼다. 

모든 전력이 소진된 양쪽은 산발적인 포격만 주고 받으며 18일 하루를 보냈다. 남군을 묶어두는데 성공한 맥클레란은 아내에게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투에서 멋지게 승리했다고 말할 것이오"라며 북군의 승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노획한 14문의 포와 부대깃발을 보내며 홀렉에게 "완벽한 승리였다"는 보고를 보냈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이긴 전투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5와 6군단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만약 18일에 다시 한 번 승부를 걸었다면 남군을 궤멸시킬 수도 있었지만 맥클레란은 그 상태로 만족하기로 했다. 참모장교 헌터 스트로더는 "모든 사람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무승부는 패전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기록했다. 

 

18일 하루가 별 일 없이 지나가자 남군 지휘관도 맥클레란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포터 알렉산더 중령은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텐데. 우리는 더 이상 전투를 할 여력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전선을 지켜낸 리는 더 이상 북군 지역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 날 밤, 북부 버지니아군부터 후퇴하기 시작했고, 일부 장교들은 리가 왜 샤프스버그에서 북군에 맞섰는지 의문을 표시했지만 더 이상 혼란은 없었다. 

리의 뒤를 황급하게 추격하려던 맥클레란은 강을 건너던 도중에 남군의 기습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기습에 놀란 그는 부대를 멈추고 재정비겸 휴식을 취했다. 남군보다는 나은 형편이었지만 3개월 동안 계속 전투를 벌이느라 보급을 반드시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목숨만 간신히 건져 후퇴하는 남군을 추격하지 못한 것은 맥클레란의 실책이었다. 

 

링컨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대승을 거두지 못한 것이 못마땅했지만 리의 군대를 쫓아내고 워싱턴을 지켰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는 22일에, 정부관료들을 모으고 2개월 전에 작성해 두었던 노예해방을 선언해서 남부의 3백5십만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했다. 당연히 남부에서는 이 선언을 무시했고 북부에서도 많은 불만이 쏟아졌다.

"도대체 노예해방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 군이 진주한 곳에는 노예가 없고, 남군이 있는 곳에서는 노예해방이 무용지물인데"

그러나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외국이 남부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려는 선제조치였다. 

 

10월 초, 링컨이 맥클레란을 직접 방문해 행동에 옮길 것을 권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고, 10일 후에 다시 비난하는 편지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군대를 이끌고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 워렌톤(Warrenton)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링컨은 더 이상 맥클레란의 신중한 움직임을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었다. 

11월 6일, 맥클레란은 번사이드로 교체되었다. 병사들에게 무조건 충성을 당부한 그는 병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부대를 떠났다. 

일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병사들은 그를 원했고 흐느끼는 병사들도 많았다. 심지어 폭동의 조짐까지 있었지만, 장교들이 한 사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설득했다. 

 

앤티텀 전투의 피해

 

북군 

전사 - 2,108명

부상 - 9,540명

실종 - 753명

총계 - 12,401명

메릴랜드 전역 - 27,000명

 

남군

전사 - 1,546명

부상 - 7,752명

실종 - 1,018명

메릴랜드 전역 - 14,000명

총계 - 10,316명 

 

(우에스기 왈: 단 하루에 끝난 전투라, 앤티텀 전투 자체는 상당히 단순한 전투였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번사이드 다리로 불리는 전투를 보충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북전쟁은 잘 모르는 지휘관과 부대가 너무 많이 나와서 누가, 왜 중요한지 파악하는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앤티텀 전투의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PKJKIBeGACw를 참조해주십시오. 아마도 남과 북이라는 드라마 중 한 장면일텐데 우리가 남북으로 갈린 것처럼 그 때에도 친인척이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덕들이 펼치는 올해 9월에 재현한 앤티텀 전투입니다. 숲에서 등장하는 것 등 역사재현에 상당히 노력했습니다. 화질이 좋으니까 고해상도를 선택해서 큰 화면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zT_p3wd0uk0

 

그리고 Manassas 전투 재현놀이입니다. 규모가 장난이 아닙니다. 소리높여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전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경꾼들까지 재현하고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dyu1M-i1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