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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3) - 앤티텀 전투 (1부)

by uesgi2003 2012. 12. 10.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춥고 눈내리는 겨울은 여유있는 분들에게는 데이트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낭만적인 계절인 반면에 가난한 분들에게는 하루를 걱정해야 하는 잔인한 계절입니다. 

특히 국가의 보조금과 폐지벌이로 연명하는 노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잔인한 계절이죠.


오늘의 이야기는 미국남북전쟁 전투 중 전투시간에 비해 가장 많은 피해를 냈던 앤티텀(또는 앤티에탐) 전투입니다. 

북군에 비해 병력과 전력이 열세였던 남군이 공세를 펼쳤던 몇 안되는 전투이기도 합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3) - 앤티텀 전투 (1부)


1862년, 9월 3일 수요일, 약 40,000명의 남군이 버지니아 드레인스빌(Dranesville) 부근 들판에서 목격되었다. 그들은 앙상하고 태양에 그을렸으며 군복은 너덜거렸다. 일부는 아예 맨발이었고 나머지도 찢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겉모습은 마치 패잔병과 같았지만 4일 전에 존 포프의 북군에게 대승을 거뒀기 때문에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1861년 7월에 있었던 불 런(Bull Run) 전투에서도 남군은 북군에게 치명타를 입히고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을 위협했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1년 후의 남군은 이제 역전의 용사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로버트 리(Lee)라는 당시 최고의 지휘관이 이끌고 있었다. 병사들이 '로버트 주인님(Marse Robert)'라고 부르는 리는 3개월 만에 주 전장을 남군의 수도 리치몬드에서 워싱턴 주변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남군은 2배나 많은 북군과 맞먹을 정도로 사기가 높아졌고 병사들과 장군의 상호신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라고 포터 알렉산더 중령이 회상했다. 

 

리는 2차 머내서스(Second Manassas) 전투의 승리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고 워싱턴 주변의 가공할만한 방벽을 공격하는 동시에 포토맥(Potomac) 강을 건너서 전쟁을 북부로 옮길 생각이었다.

리는 머내서스 전투 후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애마 트래블러에서 내려서 지도를 보던 중에 말이 날뛰는 일이 벌어졌고 고삐를 잡다가 넘어져서 양쪽 손 모두를 다쳤고 오른손은 부목을 해야 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감한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남군의 무장과 병력이 북군에 비해 심각하게 열세였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수 처지가 아니었다.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이더라도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에 들어서고, 운이 좋다면 메이슨-딕슨(Mason-Dixon) 수비선을 넘어 펜실바니아로 계속 진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공세로 나서게 되면, 전쟁에 피폐해진 버지니아를 재정비하고, 메밀랜드에서 군수품을 조달할 수 있은 뿐 아니라 남부 메릴랜드 사람들을 남군으로 모집할 수 있었다. 만약 북군이 워싱턴 방어선에서 나와 일전에 응하고 여기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링컨 대통령은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9월 4일, 남군의 선봉대가 리스버그 부근의 와이츠 포드(White's Ford)를 건너기 시작했고 군악대는 "Maryland! My Mayiland"를 연주했다.

 

리가 무인지경의 들판을 행군하고 있을 때에, 워싱턴 방어책임은 조지 맥클레란(McClellan, 사진참조)에게 주어졌다. 리는 이미 2개월 전에 리치몬드를 공략하려던 그의 계획은 막아낸 적이 있는데, 그를 "유능하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장군"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정보가 맞으면, 북군은 앞으로도 몇 주 동안 군대를 정비하느라 반격에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35세의 조지 맥클레란은 조직, 훈련, 동기부여 면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1차 머내서스 전투의 충격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년 6개월간의 전쟁을 벌이면서 그는 너무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결국 남군이 주도권을 가져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맥클레란은 9월 7일에 워싱턴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사령부를 차리고 수도 방어선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남군의 침입에 대응하기로 했다. 수도 방어에 2개 군단을 남겨둔 그는 70,000명(10%는 신병)을 이끌고 40km 넓이의 횡렬로 전진했다. 당연히 전진속도는 느렸지만 리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북군의 추격을 받게 된 남군은, 8일 메릴랜드 시민에게 "남부시민들은 여러분이 양키의 압제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권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호소했지만 북군에게 호의적이었던 메릴랜드 중부는 반응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리는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그 중에 세 부대를 가장 신뢰하는 토마스 스톤월(Stonewall)에게 맡기고 셰넌도어(Shenandoah)와 포토맥이 만나는 북군 전략요충지인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 마을로 전진시킬 계획이었다. 하퍼스 페리를 점령한다면, 리는 자신의 배후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다. 잭슨은 다시 30km 북쪽의 분스보로(Boonsboro)로 전진한 다음에 리의 나머지 병력과 합류하게 된다.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면 남군은 12일에 합류하게 되고, 리는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맥클레란과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설명: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의 지도가 훨씬 자세한데, 워낙 두꺼워서 스캔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웹에 공개된 지도와 사진을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지도는 남군과 북군의 이동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클릭해서 이야기를 읽는 동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원 자료에서는 각 부대의 상세한 이동이 설명되어 있지만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어서 결정적인 부분만 설명했습니다.) 

 

북군이 예상보다 빨리 움직였기 때문에 남군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북 버지니아군이 10일에 프레드릭(Frederick)으로 들어갔지만 싸늘한 대접을 받았다.

 

한 시민은 "그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무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들이었다. 외모, 머리와 군복은 때로 쩌들었고 계속 긇어대는 것을 보면 몸에 기생충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라고 회상했다.

맥클레란은 12일에 프레드릭 외곽에 도착했고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홀렉(Halleck) 장군은 하퍼스 페리의 얼마 안되는 수비군을 소개시켜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정보가 어두운 과거에 언제나 그랬듯이, 맥클레란은 자신의 병력이 훨씬 적다고 오판하고 워싱턴에 '적의 병력은 약 120,000명'이라고 보고했는데, 남군의 실제 병력은 40,000명에 불과했다.

 

(그림 설명: 프레드릭에 입성한 남군의 실제 모습입니다. 본문에서도 설명했듯이 남군의 보급상태는 매우 열악했는데, 전쟁초기 양 진영의 위생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전투사상자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훨씬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13일, 남군이 머무르고 간 자리에서 리의 특별명령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통신병이나 장교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명령서는 남군의 상세한 경로와 일정 그리고 병력배치의 귀중한 정보를 알려줬다.

만약 하퍼스 페리 수비대가 끈질기게 버텨서 남군의 합류가 늦어진다면, 포토맥군은 분산된 남군을 차례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리의 전략을 입수한 맥클레란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고 자신하고 링컨에게 "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대가를 치룰 것입니다"라는 보고를 했다.

 

북군이 프레드릭을 지날 때에는 3일 전에 지난 남군의 경우와 달리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그림 참조).

"성조기가 모든 건물 위와 창문에 게양되었다. 모든 문에는 아이들이 서 있었고 맑은 물과 케익을 주곤 했다."

맥클레란이 프레드릭을 통과하고 있을 때. 스톤웰 잭슨은 하퍼스 페리의 14,000명 북군을 향해 조여들어가고 있었다. 9월 13일, 라파예트 맥크로스(Mclaws)가 이끄는 2개 사단이 메릴랜드 하이츠의 고지대를 점령했고 존 워커스의 2,000명이 하퍼스 페리의 쎼넌도어 강변을 내려다보는 고지대를 점령했다. 잭슨의 나머지 병력은 서쪽에서 하퍼스 페리에 다가갔다. 

14일 오후, 잭슨의 포대가 수비대를 포위하고 맹렬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예정보다 2일이나 지연된 것에 초조한 리는 1개 사단을 뒤에 남겨둬서 북군을 지연시키게 하고 헤거스타운(Hagerstown)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14일 오전, 리에게 맥클레란의 대군이 사우스 마운틴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그는 뒤에 남겨둔 병력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만약, 그들이 북군을 지연시키지 못한다면 남군 전체는 궤멸될 위기상황이었다. 

 

 

사우스 마운틴에 남겨진 소수의 남군은 제 역할을 다해줬다. 맥클레란의 선봉대가 접근하자 맹렬한 저항을 했고 북군은 완전히 기습을 당했다. 날이 저물어서도 맹렬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북군의 엄청난 대군을 막기에는 남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맥클레란은 애써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처했지만, 사실은 분산된 남군은 너무나도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리는 메릴랜드 작전을 취소하기로 하고 맥크로스의 8,000명이 북군에게 협공당하지 않도록 고지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하퍼스 페리(사진 참조)를 구원하는 임무를 받은 프랭클린의 북군 6군단은 분산된 남군을 밀어냈면서 사우스 마운틴 지역을 확보했는데, 만약 그가 그대로 전진해 들어갔다면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는 맥크로스의 병력을 포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의 전력이 훨씬 강하다고 착각한 프랭클린은 하퍼스 페리를 겨우 10km 남겨두고 야영을 하고 만다. 

운명의 여신은 다시 남군에게 미소를 지었다. 15일 오전, 리는 잭슨에게서 "신의 도움으로, 하퍼스 페리가 항복할 예정입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12,500명의 수비대와 73문의 야포가 남군의 손에 떨어졌다.  

 

하퍼스 페리의 승전보를 받은 리는, 메릴랜드에서 승부를 걸어보기로 하고 병력을 북쪽의 샤프스버그(Sharpsburg)로 선회시켰고 잭슨에게도 즉시 본대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림 설명: 북군이 폭스스 갭, Fox's Gap에서 남군을 밀어내며 사우스 마운티 일대를 확보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앞의 지도를 참조해주십시오.)

 

한 북군 병사가 인정했듯이 "리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대단한 도박사답게 절망적인 순간에서 조차 운을 시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잭슨의 3개 사단은 16일 강을 건너 대부분의 병사가 48시간 동안 잠을 못 잔 상태로 행군해서 리와 합류했지만 그래도 맞은 편의 맥클레란의 병력에 크게 못미치고 있었다.

16일 하루 종일, 양쪽이 포격을 주고 받았다. 양쪽 진영 사이에는 앤티텀 개울이 천연의 장벽이 되어 주고 있었는데, 북군은 총공세에 나서기 전에 개울의 서쪽 강둑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싶었다. 16일 밤이 되자, 후커(Hooker)의 3개 사단이 북쪽 여울목을 건너 남군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포진했다. 남군은 바로 밀어내려고 시도했지만 동이 트기를 기다리기로 했고, 남북전쟁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가 해가 뜨면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