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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19세기의 전투(1) - 배경설명, 멕시코의 독재자 산따 아나

by uesgi2003 2011. 9. 25.

알라모 전투 이야기를 올리면서 멕시코 이야기를 뺄 수 없어서 아예 한 편의 이야기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요즘 멕시코의 상황이 거의 내전 수준이나 마찬가지인데, 독립초기부터 어지러웠던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났다면 좋았으려만, 불운하게도 독립 초기부터 산따 아나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만나게 됩니다.

 

보통 건국초기에는 강력한 지도자, 심지어 독재자까지도 필요한데, 그들의 리더십이 "국가와 민족이 목표"로 섬기려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와 민족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지에 따라서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건국초기의 독일은 국민을 용병부대로 팔아 국가를 건립하는 디딤돌로 사용했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산따 아나는 국민을 쥐어짠 세금을 사치와 방만에 낭비한 탓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영토를 가졌던 멕시코의 잠재력을 모두 날려버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국가와 민족 운운하며 자신의 치적에 이용하는 지도자때문에 고생이 막심합니다. 경제개발할 민족자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광산채굴권을 팔아 사회자본으로 투자하는 것과 흑자를 잘 내고 있는 공항을 선진경영 운운하며 매각하려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이명박의 4대강 토목공사를 비교하며 4대강 삽질을 옹호하는 분들이 일부 있는데,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는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건설한 것이고, 이명박의 청계천과 4대강 토목공사는 (여기에 나오는 산따 아나처럼) 자신의 치적쌓기 전용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어지러운 세상에, 더 어지러운 지도자를 만나게 되면 세계최강국 1순위 후보에서, 강대국에 절대의존하는 주변국이 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산따 아나, 오똑이 처럼 서다.

 

프랑스 빵가게를 둘러싼 1838년의 분쟁덕분에 산따 아나는 권력을 되찾지만 결국은 외다리 신세로 모든 것을 잃고 만다.

 

Stephen L. Hardin (Military History 2008 5/6월 기사)

 

1828 12, 대립하던 군중이 폭도로 변해 약탈하고 성폭행하며 멕시코 시티의 곳곳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아마도 멕시코 시민들은 이런 난동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1821년 이후, 진정한 의미의 국가관을 마련하려고 애썼지만, 혁명과 반혁명, 쿠데타와 역쿠데타가 연속되는 무질서한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1828년의 폭동은 이전보다 좀 더 심해졌을 뿐이다. 보수파 대통령 마누엘 고메쓰 뻬드라싸(Pedraza)는 자유파 로렌쏘 데 싸발라(Zavala)를 멕시코 주지사자리에서 내쫓았고, 산따 아나(Santa Anna)는 위기에 몰린 주지사 편을 들었다. 산따 아나는 부하들을 모아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뻬드라싸를 거꾸로 몰아내고 자유파의 비쎈떼 라몬 게레로 살다냐(Saldana)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게레로는 산따 아나를 최고 사령관에 앉혀 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림 설명: 건국 초기의 멕시코가 얼마나 난잡한 리더를 만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직전의 쿠데타에서, 보수파와 자유파 폭도들은 일반 가정집과 상가를 가리지 않고 약탈했었다. 멕시코 시티 따꾸바야(Tacubaya) 지역에서는, 굶주린 폭도가 추방당해 멕시코로 온 프랑스 주방장의 상점을 약탈했다. 이 프랑스 인은 멕시코 공무원에게 피해보상을 받아내지 못하자, 프랑스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다. 고국의 관료도 처음에는 그의 요청에 반응을 안보이다가 9년이나 지난 1837년에, 프랑스 왕 루이 필립(Louis Philippe)이 갑자기 그의 청원을 받아들여 600,000 페소(스페인과 중남미 화폐단위) 지불을 요구한다. 멕시코가 이미 프랑스 차관 수 백만 페소를 연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분이라도 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멕시코 대통령 아나스따시오 부스따만떼는 프랑스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했고 루이 필립은 찰스 바우딘(Charles Baudin) 소장 휘하의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국제분쟁을 일으킨다. 1838 10월 말, 바우딘의 기함 Nereide 2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멕시코 항구를 봉쇄하면서 멕시코의 대양무역은 완전히 막혀버리고 만다.

 

프랑스 해군의 봉쇄를 피해, 멕시코 상선은 텍사스 공화국의 두 항구에 임시 하치장을 만들었고, 미국과의 분쟁을 염려한 바우딘은 이곳을 오가는 상선을 막지 않았다. 화물이 텍사스 영토에 내려지면, 멕시코 인부들이 국경으로 실어 날랐다. 1836년에 산따 아나에서 승리해 독립한 공화국 입장에서는 이런 행위는 세관을 통관하지 않은 명백한 밀수였기 때문에 멕시코의 모든 상선활동을 막으려고 했지만, 엄격하게 규제하지는 않았다. 공화국이 염려하는 것은 멕시코가 텍사스 영토를 통해 화물을 나르는 것이 아니라 공화국의 수입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멕시코 상인들은 텍사스의 다른 항구를 이용하고 멕시코계 텍사스 인을 고용해 공화국을 안심시켰다.

루이 필립 왕은 프랑스의 해외 확장을 추구했고 멕시코의 어지러운 국내상황은 식민지를 늘리는데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문제는 미국의 먼로주의(Monroe Doctrine)과 이를 지지하는 영국해군과 분쟁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에스기 왈: 먼로주의는 유럽 열강으로 하여금 이상 대륙을 식민지화 하거나 미국이나 멕시코 대륙에 있는 주권 국가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신 미국은 유럽 열강간의 전쟁에 대해 -설령 그것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든 식민지에서의 전쟁이든 - 중립을 취하기로 합니다. 만약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은 그러한 행위를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로 했습니다만, 당시 유럽은 약소국 미국의 주장을 무시합니다. 영국만이 유럽 내의 세력균형을 위해 미국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서 프랑스가 영국과의 해전까지 염두에 두게 것입니다.)

 

프랑스의 명예를 되찾고 서양에서는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먼로주의와 영국해군의 개입을 동시에 피했다. 이렇게 프랑스의 멕시코 침공이 성공한다면 프랑스 군이 멕시코에 상주하게 것이고, 다음에는 영미가 어떻게 방법이 없게 것이다. 필립 왕은 길을 돌아가기는 해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였다.

 

초기에는 필립 왕의 시도가 제대로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이용사인 바우딘 제독은, 멕시코 인들이 "북미의 지브랄타"라고 자랑하던 후안 울루아(San Juan de Ulua) 요새의 근접거리까지 함대를 접근시켰다. 멕시코 관료를 만나 기존의 600,000 페소 외에 원정비용인 200,000 페소를 요구했다.

 

그림 설명: 울루아 요새의 항공사진입니다.

 

그리고 11 27일까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함대를 동원해 멕시코의 자랑거리인 요새를 파괴시키겠다고 협박한다.

11 27 새벽이 밝자, 바우딘은 자신의 협박대로 함선의 대포와 박격포의 포문을 연다. 멕시코 군도 대응사격에 나섰지만 화약의 품질이 워낙 조악해 포탄이 목표물에 미치지도 못했다. 이것을 확인한 프랑스 군은 더욱 거리를 좁혀 마음껏 요새를 두들겼고 멕시코에서는 64명의 전사자와 147명의 부상병이 발생했지만 대포와 요새의 성벽은 무사한 상태였다.

 

그림 설명: 함포로 울루아 요새를 포격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해군이 아니라 나중에 설명할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할 때의 울루아 요새 포격장면입니다.

 

당연히 멕시코 지휘관은 계속 항전을 했어야 했는데도 프랑스 함대의 화력과 자신들의 보잘 없는 전력에 사기를 잃고 요새와 도시를 넘겨주고 만다. 바우딘은 하루 만에 요새를 점령하고 멕시코의 대서양 소함대도 노획한다. 3,000명의 프랑스 군이 상륙해 요새의 삼색깃발을 프랑스의 삼색깃발로 바꿔 게양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이 바우딘을 " 후안의 영웅"으로 칭송하는데, 웰링턴 공작까지도 해군 단독으로 요새를 점령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논평할 정도였다. 특히 1814 영국해군이 미국독립 전쟁 당시에 볼티모어의 멕헨리(Mchenry) 요새를 공략하지 못했던 실패와 비교되어, 바우딘의 영웅담은 더욱 각광을 받았다. 바우딘은 1805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배를 잃었었고 1808년에는 영국 함포를 맞아 팔을 잃었던 것을 이번에 복수하게 것이다. 프랑스 언론은 "프랑스가 돌아왔다"라는 기사를 보도한다.

 

그림 설명: 프랑스 해병대가 울루아 요새에 상륙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국민은 프랑스에게서 연거푸 굴욕을 당하면서 뭉치기 시작한다. 요새함락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프랑스 군의 주둔을 반대하기 시작한다. 멕시코의 지역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두랑고(Durango) 시민들이여. 프랑스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울루아 요새를 잃었고 300명의 멕시코 군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두랑고 시민이여, 무장하자! 전쟁의 함성을 울러 퍼졌다. 한쪽 팔만 있는 침입자가 우리에게 굴욕 또는 죽음의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머리를 조아릴 것인가? 우리는 자유시민이다... 형제와 함께 하자.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렇게 많은 고통을 겪고 많은 피를 흘리며 쟁취한 독립을 위해 싸우자. 적들에게 독립아니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하나된 뜻을 보여주자.

 

프랑스 군이 침공한 구실에 따라 빵가게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스따만떼 대통령은 여전히 저항의 의지를 밝혔고 산따 아나는 다시 멕시코 국민 앞에 나설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는 독단적으로 베라끄루쓰(Veracruz, 멕시코 베라끄루쓰 주가 아니라 같은 이름의 도시) 달려가 수비대 지휘관인 마누엘 린꼰에게 합류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린꼰이 승리한다면 영광을 함께 있겠지만, 패배한다면 산따 아나는 그의 후임이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회는 산따 아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내주고 수비대를 후퇴시기로 결정한다. 다른 멕시코 지도자들은 베라끄루쓰를 포기한 결정을 비난했다. 1838 12 1, 멕시코 의회는 린꼰을 군법재판에 회부하고 군대를 산따 아나에게 맡긴다. 멕시코 국민은 결정을 환영했으며 "그야 말로 우리가 바라던 사람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구원할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텍사스를 잃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혀진 채로, 산따 아나가 돌아온 것이다.

 

그림 설명: 멕시코를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멕시코 위에 선 산따 아나입니다. 장화 한 짝을 들고 설치는 이유는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44세가 산따 아나는 5,000명의 병사들 앞에 서서 외적을 베라끄루쓰에서 몰아내겠다는 맹세를 한다. 12 4, 산따 아나는 바우딘 제독에게 멕시코 정부가 베라끄루쓰를 양도한 합의는 무효임을 알리고 다시 점령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산따 아나의 선언에 따라 바우딘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다. 본국의 지원 없이 해병대만으로 도시를 수비하기 힘든데다가 그렇다고 함대의 대포를 시민들이 있는 도시에 마구 쏘아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울루아 요새의 북부와 남부 성곽을 점령하고 요새의 대포를 모두 파괴하기로 한다.

 

그림 설명: 프랑스 군이 상륙해 울루아 요새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12 5 새벽이 밝기도 전에, 1,500명의 프랑스 해병대가 해안에 상륙해 요새의 재점령에 나섰다. 그들은 짙은 안개를 틈타 몰래 다가가 희생없이 요새의 성곽을 장악했고 마리아노 아리스따와 산따 아나가 있던 집을 포위했다. 프랑스 군은 아리스따(향후 멕시코 대통령으로 재임) 포로로 잡았지만 산따 아나는 속옷 차림으로 가까스로 도망치고 그의 바지만 전리품으로 남겨졌다.

새벽이 밝자, 전과를 살피기 위해 상륙한 바우딘은 크게 만족했다. 프랑스 군은 요새를 장악했고 대포는 모두 파괴되었다. 그는 요새 곳곳에 화약을 설치한 후에 함선으로 돌아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멕시코 군에 합류한 산따 아나는 대포의 지원을 받으며 철수하는 프랑스 군을 공격한다. 승리를 눈앞에 산따 아나는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고 부대와 함께 돌격한다. 프랑스 포병은 산탄을 장전하고 다가오는 멕시코 군을 겨냥하면서 멕시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된다.

산따 아나의 말이 파편을 맞으면서 주인 위에 쓰러졌는데, 산따 아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뼈가 부러진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병사들이 달려와 그를 전장터에서 데리고 나가면서 전투는 끝났다. 프랑스 군은 8명이 죽고 60명이 부상을 당했고, 멕시코 군도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산따 아나는 왼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밖에 없었다. 상처가 너무 심해서 그가 살아날 있을 지도 의문스러웠다.

의사의 비관적인 진단과 달리, 그는 천천히 회복한다. 이제 회복기에 들어선 것을 확인한 그는 잃어버린 다리를 자신의 정치활동에 이용하기로 한다. 그는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글을 남겨 국민을 움직였다.

멕시코 국민은 산따 아나의 희생에 대한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고, 그는 마치 훈장처럼 없어진 다리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행진을 하기도 했다.

 

1839 3, 영국정부가 멕시코와 프랑스의 분쟁에 개입하기로 한다. 국제분쟁으로 영국의 상업활동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평화조약을 중재한다. 프랑스는 원래 요구했던 600,000 페소를 받고 원정비용 200,000 페소는 포기한다는 조건이었다. 필립 왕은 식민지 건설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주머니는 채울 있었고 바우딘 제독은 영웅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누가 봐도 프랑스가 이전 전쟁이었다. 바우딘 제독은 북중미의 지브랄타라는 베라끄루쓰를 폐허더미로 만들었고 600,000 페소를 받아냈다. 거기에 멕시코가 거금을 주고 볼티모어 조선소에서 구입한 대서양 소함대까지 노획했다. 그는 24문의 포를 무장한 콜벳함 이구알라(Iguala), 척의 범선, 척의 훈련선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대서양 함대가 쏘고 프랑스에 헌납했다는 것도 멕시코의 치욕이었다. 그렇지만 멕시코는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산따 아나와 국수주의 신문사들은 있지도 않은 승리소식을 쏟아냈고, 산따 아나와 용감한 멕시코 군이 프랑스 침입자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다시 바다로 밀어냈다는 조작을 했다. 대부분의 시민이 대사기극에 감동을 받았고 진실을 꿰뚫어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841 산따 아나는 멕시코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3 동안 재임기간 동안, 멕시코 시티의 모든 가구에 "자발적 헌금" 거뒀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게서는 강제로 대출금을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영국에게 광산 채굴권을 팔고 수입관세를 20% 높였다.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둔 세금으로 굶주린 지방의 재정을 지원헸으면 좋았을텐데, 측근을 부유하게 만들고 자신을 우상화하는데 사용했다. 국가원수라는 책임이 억누를 때마다 휴양지에서 기다리는 창녀들과 아편과 투계(닭싸움) 즐겼다. 1844 9, 멕시코가 파산위기에 몰리게 되자 결국 국민은 그를 몰아내고 영원히 국외로 추방했다.

 

멕시코 국민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산따 아나는 베네주엘라로 추방되어 장군 급여의 절반만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는 쿠바로 달아나 2년을 숨어 지내다가 멕시코 내전이 발발하자 1846년에 사령관으로 귀국하게 된다. 1853, 그는 다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혼란스러운 국내상황에 지친 국민들이 영웅을 찾을 때마다, 앞에는 항상 산따 아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프랑스에 대한 조작된 전설을 국민들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프랑스 군을 바다로 밀어냈는지, 그가 어떻게 조국을 위해 피흘렸는지, 그가 어떻게 멕시코의 자존심을 되찾았는지. 그렇지만 진실을 알고 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1828년에 있었던 프랑스 빵가게 약탈사건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멕시코 국민들은 다시 산따 아나의 다리를 날려버린 프랑스 군을 저주하게 되었다. 프랑스 군이 산따 아나의 다리 하나를 날려보내는 바람에 멕시코는 비교도 안되는 많은 것을 잃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에스기 : 다음은 산따 아나의 일화입니다. 자신을 위해 국가와 민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독재자가 다리 하나도 얼마나 이용해먹었는지 황당하기만 합니다. 독립 초기에 이런 지도자를 만났다는 것이 멕시코 국민들의 불운이겠죠.)

 

산따 아나는 다리를 잃은 후에 그것을 자신의 정원에 묻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 그는 묻은 다리를 다시 멕시코 시티로 가져오게 한다. 1842, 건조된 다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대로를 따라 행진한다. 대통령 경호부대, 국방군, 심지어 군사학교 사관생도까지 마치 성인의 유품인 것처럼 어처구니없이 엄숙한 행렬에 동참한다. 묘지에는 다리를 넣을 화려하게 치장된 항아리가 마련되었다. 장례행렬이 묘지에 도달하자 지리한 의식이 계속 이어졌다. 대통령 정부각료, 의교관 그리고 모든 국회의원이 장례객으로 참석했다. 물론, 장례식 참석은 의무적이었다.

 

그림 설명: 산따 아나가 잘 나가던 시절의 초상화입니다. 상당히 거만한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황당한 장면은 산따 아나가 자기 우상화에 미쳐서 벌인 일들 하나에 불과하다. 대통령 궁은 성지가 되었고 그는 모든 공식 문서에, 산따 아나, 조국의 구원자, 총사령관, 까르롤스 3 스페인 최고 수훈장, 멕시코 공화국 대통령, 과달루뻬 국가 최고 수훈장이라는 모든 직함의 서명을 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앞에서 조롱할 수는 없었다.

조국을 위한 희생의 상징으로 자랑한 그의 다리는 바램과 달리 방탕함의 상징이 되었다. 사치와 방만으로 국가붕괴 위기에 몰린 1844 분노한 시민들은 "병신 놈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묘지를 부수고 다리 뼈조각을 거리로 끌고 다녔다. 산따 아나 덕분에 멕시코 곳곳을 여행한 다리는 이렇게 역사로 사라졌다.

 

(우에스기 왈: 다음 이야기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옮겨 줄루 전쟁으로 하려고 했습니다만, 이왕 시작한 김에 아예 미국의 멕시코 침공까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줄루 전쟁을 조금 더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