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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4) - 챈스러스빌 전투 (1부)

by uesgi2003 2012. 12. 21.


안사람과 오래간만에 영화 두 편 '나의 PS 파트너'와 '호빗'을 몰아서 봤습니다. 저는 미드보고, 온라인 게임하고, 이야기 정리하느라 밤새우기 일쑤이지만, 안사람은 이제 나이 먹어서 밤 새우면 며칠을 헤매더군요.


'나의 PS 파트너'는 김아중씨가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안타깝게도 김아중씨와 영화 모두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누구세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김아중씨의 변한 모습이 적응안될 겁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에는 '영화와 같은 전개와 결말'에 다시 적응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아예 노골적인 성인용 코메디로 올인하던가 아니면 좀 더 웃음이 넘치는 로맨틱 코메디로 갔어야 했는데 어중간합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적은 김아중씨의 애교넘치는 연기가 "누구세요?"의 변화를 누르고도 남을만큼 매력적입니다. 


'호빗'은 워낙 유명한 영화라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부분 아실 겁니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기대를 낮추라는 것입니다. 호빗 시리즈의 도입부이기 때문에 환타지 광팬이 아니라면 상당히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잔인한 장면이 나오지만 가족용 환타지에 가깝습니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카리스마는 느끼기 힘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시간짜리 영화이기 때문에 음료수 줄이고 중요한 통화는 미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이동하거나 액정 켰다가는 주변에 몰상식한 민폐가 될 겁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남군이 과감한 기습으로 대성공을 거뒀던 챈스러스빌 전투입니다. 남군이 보기 좋게 북군에게 한 방 먹여 기세가 오르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지휘관 한 명을 잃어서 그 이상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4) - 챈스러스빌 전투 (1부)


포토맥 군 총 지휘관으로 임명된 조 후커(Hooker) 장군은 신문사의 실수로 원하지 않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뉴욕 신문사의 누군가가 1862년의 북군 전투를 정리하면서 아무 뜻 없이 "전투-조 후커(Fighting-Joe Hooker)"라는 메모를 달았는데, 메모까지 실수로 인쇄된데다가 중간의 -까지 빠져서 "싸우는 조 후커"라는 별명이 영원히 붙게 되었다. 

정작 후커는 그 별명을 매우 싫어했고 너무나도 심각한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적에게 달려드는 무모한 젊은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링컨 대통령이 파이팅 조를 1863년 1월에 임명하자 대부분의 북부 시민은 이를 반겼다. 아마도 그의 잘못 붙여진 별명처럼 과감한 공세로 리의 북부 버지니아 군을 궤멸시켜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1862년 프레데릭스버스 전투에서 재앙에 가까운 참패를 겪었던 선임자 번사이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  


링컨은 맥클레란(McClellan)이 앤티텀 전투에서 남군을 추격하지 않고 리가 2개월 동안 전열을 재정비할 여유를 주자 번사이드를 포토맥 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었다. 번사이드로 교체하면 맥클레란의 지연전보다는 더 나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번사이드는 야심차게 움직여 링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컬페퍼(Culpeper)에서 리를 공격하는 대신에, 북군 전체를 남동쪽으로 65km 정도 이동시켜 남군을 우회한 다음 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강을 건널 생각이었다(지도 참조. 클릭하면 커집니다).

번사이드의 계획에 따르면 먼저 프레데릭스버그를 정면공격해서 점령한 후에 도강을 해야 했는데 임시 가교를 기다리는 동안 머뭇거렸을 뿐만 아니라 장비가 도착하고 나서도 시간을 끌어 리가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동안 제임스 롱스트리트(Longstreet) 중장이 컬페퍼에서 1군단을 빼내 프레데릭스버그 뒤의 고지대에 배치시켰고 그 뒤를 이어 토마스 스톤월(돌벽) 잭슨(Jackson)이 기병을 이끌고 합류했다. 


12월 12일, 번사이드는 120,000명의 북군에게 강을 건너 이미 참호에 틀어박힌 남군을 공

격하라는 자살에 가까운 명령을 내렸다. 결과는 참혹했다. "차라리 지옥을 공격하라는 것이 더 낫겠다"라는 북군 병사의 말처럼 북군의 대부분 부대는 탁 트인 들판을 건너 고지대의 남군에게 다가가는 동안 집중사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림 설명: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북군이 프레데릭스버그에서 점령한 남군 참호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장교들이 남군의 위치와 사거리를 측정하고 있습니다.

 

12,000명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남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번사이드는 12월 15일에 전군을 폴마우스(Falmouth) 부근으로 불러 들였다. 일방적인 자살공격에 질려버린 병사들은 하루에 200명 꼴로 탈영하면서 북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여기에 수 천 명이 이질과 괴혈병에 걸리자 대부분의 병사들이 술을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 연대 전체가 만취한 것도 봤다. 경계를 설 15명을 골라내야 했는데, 술 깬 병사가 없었다."

번사이드는 전체 병력을 서쪽으로 보내 남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작전으로 실수를 만회하려고 했지만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마차와 대포는 진흙에 잠겨 150명의 병사가 달라붙어도 끌어내지 못할 정도였다. 4일동안 온갖 고생을 한 끌에 결국 작전이 취소되었다. 

결국 장교들이 나서 백악관과 전쟁부(War Department)에 청원을 했고, 링컨은 조 후커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후커는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다(그림 참조). 1846~1848년 멕시코 전쟁에서 3번이나 진급할 정도로 뛰어난 여단과 군단 지휘관이었지만 명예욕이 너무 강해서 언론 플레이를 심하게했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말 실수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링컨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독재자가 정권을 잡고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었다. 

링컨은 그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선임자들의 실패에 질려서 후커의 추진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링컨은 후커에게 편지를 보내 "성공한 장군만이 독재자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귀관에게 요구하는 것은 군사적 성공이며, 그 경우에는 독재를 무릅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꾸짖었다. 후커는 편지를 가지고 다니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마치 아버지처럼 얘기하네. 대승을 거둔 후에 답장을 쓸 생각이야."

조 후커는 뛰어난 조직력을 보이며 사기가 땅에 떨어진 북군병사들을 정비했다. 대대적인 위생점검을 하며 질병발생을 줄였고 자유휴가로 탈영도 줄였다. 심지어 일주일에 네 번은 부드러운 빵과 채소가 보급될 수 있게 해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후커는 군의 지휘체계도 바꿔서 번사이드의 '초대형 사단'을 7개의 작은 군단으로 나누고 지휘관이 모두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게 했다. 군단을 한 눈에 구분할 수 있도록 병사들의 모자에 배지를 달았는데, 배지의 모양은 군단을, 배지의 색은 사단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적색 다이아몬드는 3군단 1사단 병사이고 백색 다이아몬드는 3군단 2사단 병사를 의미했다. 

모자 앞에 붙인 작은 상징이었지만 병사들에게는 마치 명예훈장인 것처럼 대단한 의미였다. 

그리고 남군처럼, 보병군단 속에 분산되어 있던 기병대를 모두 모아 독립 군단을 만들고 남군의 스톤월 잭슨과 웨스트 포인트 동기였던 조지 스톤맨(Stoneman) 준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군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커는 링컨에게 "세상에서 최정예 군"이라고 자랑을 하며 리치몬드 점령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허풍을 부렸다. 

 

래퍼한녹(Rappahannock) 강 건너편 5km 떨어져 있던 리의 남군은 비참한 상태였다.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여전히 헐벗고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루이지아나 여단은 겨울인데도 1,500명 중에서 400명이 신발이 없었고 거의 대부분이 찢어진 셔츠와 양말을 신고 있었다. 외투는 '신기한 물건'이 되었다. 

지난 여름의 가뭄때문에 식량도 제대로 반입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보급품도 남부의 열악한 철도때문에 제 때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인 리의 참모캠프에서 한 명당 하루 100그램의 베이콘을 먹을 수 있는 정도였으니 일반 병사의 처지는 알 만 했다. 

 

그림 설명: 열악한 환경인데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은 남군은, 눈이 내리자 9,000명이 편을 갈라 눈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눈을 처음 본 병사가 많은 남군은 매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야채는 거의 보급되지 않아서 괴혈병을 걱정한 리는 모든 연대에게 매일 들판의 녹나무 봉우리 등을 채집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고 쥐는 보이는대로 잡아서 요리했다.

군마의 상태도 심각했다. 마차나 대포를 끌게 했다가는 모조리 죽을 판이어서 부대를 이동시켜 선제공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병력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가장 많을 때에도 후커에 비해 2/3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롱스트리트의 병력을 남부 버지니아로 보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북군이 포토맥 강을 따라 남하해서 리치몬드를 공격하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인데, 그것이 소문에 불과하더라도 어차피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내려가야 했다. 

롱스트리트가 병력가 대포를 가져가면서 리는 북군의 410문에 비해 220문만 보유했고 그나마도 성능이 뒤떨어지는 활강포(Smoothbore, 강선이 없는)가 대부분이었다. 리는 분산된 야포를 16문으로 묶어 독립포병대대로 만들어서 더 많은 포를 필요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게 했다.

 

각자 나름대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진영에 틀어박혀 있던 북군과 남군은 조용히 겨울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켈리 여울목(Kelly's Ford)에서 기병대가 맞붙기 전까지는. 북군이 새로 만든 기병군단의 윌리엄 아베렐(Averell)은 3월 중순이 되어 길이 단단해지자 래퍼한녹 강을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지역에 있는 남군 기병대를 쫓아내기로 했다.

강 건너 편에 있던 남군의 피츠휴 리 (리 장군의 조카)가 기습을 해와 150명의 북군을 포로로 잡아간 것도 모자라 아베렐에게 '귀관을 초대함'이라는 메모를 남겨둔 것을 되갚고 싶었다. 

 

그림 설명: 남군의 스튜어트가 켈리 여울목에서 남군 기병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아베렐은 약 3,000명의 기병과 견인포를 준비했다. 3월 17일, 제4 뉴욕 기병대를 선두로 켈

리 여울목을 건넜다. 북군의 기습은 예상과 달리 빨리 남군에게 알려졌다. 길 가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부수기 위해 말에서 내리는 사이에 남군의 공격을 받았고 대포까지 동원해서야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포성을 들은 피츠 리는 컬페러에 있던 사령부에서 달려나와 800명의 기병을 켈리 여울목과 브랜디 역(Station) 사이에 배치했다. 아베렐은 적의 상황도 모른 채 남군의 노련한 기병대와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태세로 바꿨다. 아베렐은 몰랐지만, 포를 사용하는 바람에 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던 남군의 스튜어트(Stuart)와 존 펠햄(Pelham, 역전의 포병장교) 소령까지 끌어들였다.   

펠햄은 말을 빌려타고 제5 버지니아 기병대에 합류해 북군에게 돌격해들어가다가 머리 위에서 터진 포탄을 맞고 쓰러졌다. 땅에 떨어진 그는 말짱해보였고 눈도 뜨고 있었지만 파편에 맞아 머리 뒤가 날아간 상태였다. 병사들의 존경을 받던 펠햄은 곧바로 숨졌으며 리치몬드로 옮겨진 후에, 고향이 알라바마로에 묻혔다. 

 

그림 설명: 웨스트포인트 동기였던 두 사람이 맞붙은 켈리 여울목 전투는 친구들끼리의 초대와 방문으로 유명합니다. 우측이 아벨레, 좌측이 리입니다.

 

펠햄이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북군은 반격에 나서 남군의 돌벽을 장악하고 남군을 몰아내면서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아베렐은 더 이상 작전을 확대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하

고 있는 적이 스튜어트와 피츠 리라는 포로의 말을 듣고는 이제 후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강을 건너 되돌아가면서 아베렐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친애하는 리에게. 초대에 답하며 여기 커피를 두고 가네. 마음에 들기 바라네"

   
그림 설명: 25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펠햄소령입니다. 그는 초기부터 많은 전투에 참전해 부하와 상관 모두에게 인정받은 뛰어난 포병장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