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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4) - 챈스러스빌 전투 (3부)

by uesgi2003 2012. 12. 26.

 

대선 이후에 역사를 다시 공부하려는 분들이 많아져서 DVDPrime 회원을 중심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모이는 역사공부 모임을 제가 주도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주제를 미리 정해서 각자 공부했다가 모임에서 자유롭게 토론하는 형식이 될 수도 있고, 원하는 분이 발표를 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세미나 형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모임이기때문에 참석과 불참도 자유로우며, 주제는 인류사, 예술사, 과학사, 심지어는 공룡사(?)까지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회원들과 미리 협의해서 정하게 되겠죠.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되면 제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1월 초에 다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IE에서 제대로 연결되며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지도는 큰 그림으로 참조하셔야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4) - 챈스러스빌 전투 (3부) 

 

다행히도 그 지역에서 살았던 정찰병이 있었다. 잭슨의 지도병이 북군의 우측으로 통하는 숨은 길을 급하게 그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로 돌아가도록 하죠,"

"병력은 어느 정도 투입할 생각인가?"

"제 모든 병력이 갈 겁니다."

잭슨이 떠나고 나면 앤더슨과 맥로스 두 군단만 남아 후커의 본대 전체와 상대를 해야 하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리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좋아. 시작합시다"라고 말했다.

 

오전 7, 선봉대가 리의 사령부 앞을 지났고 잭슨은 잠시 멈춰 리와 인사를 나누었다. 남북전쟁에서 가장 뛰어났던 두 지휘관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길을 나섰다.

"앞으로 밀착! 서둘러라! 간격을 좁혀라. 앞으로. 앞으로." 잭슨은 모자를 눈까지 푹 눌러쓰고 말 위에서 상체를 기울이고는 계속 소리쳤다.

시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작전이었다. 26,000명의 병사가 20km의 좁은 길을 따라 북군의 눈을 따돌리고 우회해야 했다. 그리고 기습을 하려면 어둠이 내리기 전에 반드시 도착해야 했다.

수 만 명의 기동을 숨길 수는 없었다. 챈스러스빌 남동쪽 언덕에 있던 북군 초병의 보고를 받은 후커는 남군이 우회하고 있다고 제대로 판단했지만 하워드의 11군단에게 남군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당부를 보내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시클스(Sickles) 3군단에게 조심해서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전적인 시클스는 명령을 어기고 잭슨의 최후위인 제23 조지아연대부터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남군은 급하게 반격에 나서 북군의 추격을 물리쳤다.

 

남군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일이 완전히 엉뚱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수의 마차가 낀 긴 남군 대열이 급하게 서쪽으로 허둥지둥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연속해서 받은 후커는 남군이 본격적인 후퇴를 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북군의 우익에 있던 지휘관들은 남군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무시하고 병사들을 무장시키지 않았다.

남군이 오렌지 턴파이크(Orange Turnpike)에서 대열을 전개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해가 겨우 3시간 정도 남았을 때였다. 그러나 잭슨은 불평하는 장교들을 누르고 전체 병력을 2열 종대로 정렬시켰다.

5 15분이 되어서야 모든 부대의 대열이 정렬되었고 잭슨은 선두의 로드스(Rodes) 사단에게 "전진해도 좋소"라고 허락했다. 로드스 사단이 속보로 전진하기 시작하자, 놀란 북군 초병들이 사격을 하기 시작했지만 남군은 고함을 지르며 북군 캠프 외곽으로 뛰어들었다(그림 참조).

놀란 북군은 총 한 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을 쳤고 남군은 날이 저물 때까지 3km 정도를 무인지경으로 달리면서 부대가 마구 뒤섞여 자연스럽게 공격이 멈춰졌다.

지휘관들이 사방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부대를 찾고 있는 동안, 잭슨은 이 정도의 성공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야습을 감행할 다른 도로를 찾아보던 잭슨은 저녁 9시에 본대로 귀환하다가 북군의 기병으로 착각한 제18 노쓰 캐롤라이나 병사들의 집중사격을 받고 말에서 떨어졌다.

 

잭슨이 오인사격을 받아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아무리 큰 승리라도 잭슨 장군과는 못 바꾸네"라며 더 이상의 보고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스튜어트에게 잭슨의 병력까지 책임져서 다음 날에 있을 전투에서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다 

 

잭슨이 전날 대단한 성공을 거뒀지만 북군에게는 여전히 압도적인 병력이 남아 있었다. 후커가 존 레이놀드의 1군단까지 불러들여 챈스러스빌 근처에는 76,000명의 북군이 있었고 리의 남군보다 2배나 많은 병력이었다.

더구나 이제 남군은 챈스러스빌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스튜어트, 남쪽과 동쪽에는 리가 서로 3km나 떨어져서 양분된 상태였다. 북군은 어느 한 쪽이던 총공격을 가해 궤멸시킨 후에 나머지 한 쪽을 정리하면 되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불안에 사로잡힌 후커는 반격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호를 파며 수비진영을 갖추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양쪽의 남군에게 포격을 가하기 너무 유리한 헤이즐 그로브에서 시클스의 부대를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 언덕은 남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령하려고 했던 곳이기 때문에, 남군 포병 대령 포터 알렉산더가 "전장에서 이런 선물은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결국 공세로 나선 것은 남군의 스튜어트(사진참조)였다. 그는 밤새 잭슨의 군단을 재정비해서 힐(Hill) 사단, 롤리(Raleigh) 콜스톤 사단, 로드스 사단 순서로 이동시켰다. 힐은 전날 전투에서 부상당했기 때문에 헨리 헤쓰(Heth)가 지휘하고 있었다.

헤쓰의 우익 병력이 마침 후퇴하고 있던 시클스 후위부대를 몰아내고 헤이즈 그로브를 차지했고 알렉산더 대령은 근처에 숨겨놓았던 대포 30문을 언덕에 올린 후에 북군의 진영 곳곳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헤쓰의 5개 여단이 후커의 서쪽 방어선 외곽에 빽빽하게 서 있던 2, 3, 12군단에게 달려들었다. 양쪽 병력 중 절반 정도가 사라지고 난 오전 8 30분 정도가 되자 남군의 기세는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헤쓰 사단이 서둘러 전열을 재정비하는 사이에 북군이 반격에 나섰다.

헤쓰의 진격이 멈춰진 것을 본 스튜어트는 즉시 콜스톤과 로드스 사단에게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군의 한 여단은 지휘관이 하루에 4번이나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북군을 서서히 밀어냈다.

 

대저택을 사령부삼아 창문밖을 내다보고 있던 후커는, 포탄에 부숴진 기둥조각에 맞아 잠시 기절했다가 반쯤 넋이 나간 상태가 되었는데도 카우치(Couch) 장군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거나 지휘권을 넘기지 않았다.

후방의 텐트로 옮겨진 다음에야 카우치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서 전군을 뒤로 물려서 수비선을 좁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카우치를 비롯한 모든 지휘관은 공격에 나서야 할 때에 거꾸

로 후퇴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명령에 따라 양끝은 래퍼한녹(Rappahannock) 강에 걸친 반원형태로 병력을 안으로 더욱 집어 넣었다.

 

스튜어트만으로는 역부족인 것을 본 리는 자신의 병력에게 후커의 남쪽 외곽을 공격하고 라파예트 맥로스에게는 동쪽에서 플랭크(Plank) 길과 턴파이크(Turnpike)를 따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군이 뒤로 물러나자, 리는 헤이즐 그로브에 있던 40문의 대포를 페어뷰(Fairview)로 이동시켜 북군을 두들기고 거의 반쯤 부숴진 후커의 사령부 저택에 불을 질렀다.

헤이즐 그로브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리는 챈스러스빌 들판까지 말을 달려 내려왔고, 화약연기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병사들은 전쟁의 신을 맞이하는 것처럼 긴 환호성을 질렀다.

잭슨이 병상에서 보낸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신을 받아적게 했다.

"내가 세상 일을 바꿀 수 있다면, 귀관대신에 부상을 당했을 것이요. 이번 승리는 귀관의 능력과 열정 덕분에 가능했소."

 

병사들의 흥분이 가라앉자, 리는 후커의 새로운 방어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는데, 프레데릭스버그에 있던 세지윅(Sedgwick)의 6군단이 후커와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세지윅은 잭슨의 공격이 중단된 5월 2일 저녁부터 후커의 급한 요청을 계속 받아왔었다. 원래대로라면 세지윅은 프레데릭스버그 남쪽을 출발해 얼마 안되는 남군을 순식간에 쫓아내고 5월 3일에 리의 배후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신중한 세지윅은 야간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고 남군의 수비가 상당하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주발 얼리(Early)의 9,000명은 56문의 대포와 함께 고지대에 방벽을 쌓고 단단히 틀어박힌 상태였다.

 

그림 설명: 북군의 공세를 맞아 남군이 분투를 벌이는 장면인데, 영화가 아니라 역사재현 놀이 중인 양덕입니다. 규모가 장난이 아닙니다.

 

세지윅은 어쨌든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5월 3일 오전에 메어리스(Maye's) 고지를 우회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에는 정면 공격밖에 방법이 없었다. 오전 10시 30분, 존 뉴톤(Newton) 사단에게 고지 입구에 있는 돌담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뉴톤의 부대는 3번 물러났다가 4번째 돌격에서 돌담을 장악하고 메어리스 고지로 올라갈 수 있었다. 북군의 압박을 받은 얼리는 포위되는 것을 염려해 남쪽으로 후퇴하기로 했고 카드머스 윌콕스(Wilcox) 여단은 서쪽으로 후퇴하면서 세지윅의 전진을 방해하게 했다.

 

리는 일체의 동요도 없이 만신창이가 된 병력을 나누어 라파예트 맥로스에게 4개 여단을 주고 윌콕스와 합류해 세지윅을 막게 했다. 리의 25,000명이 북군의 75,000명을 방어선 안에 밀어넣은 역사상 보기 드문 전투가 계속 되었다. 

세지윅이 살렘(Salem)교회에 늘어선 윌콕스를 밀어내고 있을 때에 맥로스의 병력이 도착했고 남군은 학교 건물을 요새삼아 더 이상 북군의 전진을 허용하지 않았다. 세지윅은 2개 사단을 더 투입했지만 저녁이 가까워져서 총공격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아니었다. 리는 주발 얼리에게 5월 4일 새벽에 북쪽으로 전진해 세지윅을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남과 서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작전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고 오후 6시가 되어서야 협공체제가 만들어진데다가 맥로스의 병력은 숲 속에서 길을 잃어 세지윅을 공격하지도 못했다.

세지윅도 위험을 간파하고 19,000명의 병력을 급하게 뒤로 물려 말발굽 모양의 방어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새벽에 강을 건너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리는 전체 병력을 모아 후커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후커도 6일 오전 9시에는 이미 래퍼한녹 강 건너편에서 자신이 떠났던 폴마우스(Falmouth)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2배에 가까운 북군을 전장에서 쫓아낸 대승리였지만 리는 북군에게 결정타를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지휘관을 너무 많이 잃었다는 것이 큰 피해였다. 2명의 사단장, 11명의 여단장, 40명의 연대장을 잃었고 그 중에는 남군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관인 잭슨이 포함되었다. 리는 잭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장군에게 빨리 회복하라고 전해라. 그는 왼팔을 잃었지만 나는 오른팔을 잃었다고."

 

(우에스기 왈: 잭슨은 3발을 맞아 왼팔을 잘라냈고 결국 5월 10일에 죽고 맙니다. 그는 회복을 확신하며 "신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말했거든"이라는 농담까지 했지만 당시로서는 불치증세인 폐렴으로 죽습니다. 그는 전쟁발발 전에 자신이 가르쳤던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묻혔습니다.

그림은 리가 언덕에서 내려와 전장을 가로지르며 병사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장에서 치욕스런 후퇴를 한 후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책임을 돌렸다.

"기병대가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지윅이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입은 피해보다 훨씬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포토맥군은 더욱 명예로워졌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속지 않았다.

"도대체 절반만 싸우고 나머지 절반은 싸우지도 못하고 지는 경우가 있단 말인가?"

링컨도 후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았다. 5월 6일, 오후 1시에 포토맥군이 다시 강을 건너 후퇴했다는 전신을 받은 링컨은 '차라리 번개를 맞는게 나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친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가 그렇게 낙담하고 귀신을 본 것 처럼 넋이 나간 일이 없었다. 뒷짐으로 손을 문지르며 쉴새없이 방을 오갔다. 국민을 어떻게 보라고... 라고 중얼거리면서."

 

북부 연맹 전체가 동요했다. 특히 반전주의자였던 평화민주당(Peace Democrats)은 남부에 자치권을 주더라도 평화협상을 벌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링컨은 급하게 폴마우스로 가서 후커에게 일체의 비난도 하지 않고 부대의 상황에 대해서만 물어봤다. 거의 모든 지휘관이 후커의 교체를 요구했다. 카우치는 아예 후커의 명령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했고 특히 젊은 장교들은 거침없이 의사를 표시했다.

"그의 명성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로켓처럼 치솟았다가 막대기만 땅에 떨어진 꼴입니다."

 

북군이 물러나자 리는 프레데릭스버그로 돌아가 북군의 재침공을 대비했다. 챈스러스빌에는 2개 여단만 남겨두었는데, 19,500자루의 소총과 엄청난 화약을 노획해 다음 전투에 귀중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 천 명의 북군 포로는 보너스였다.

북군 포로는 제대로 대접을 받다가 리치몬드로 가는 길이 늘어지면서 굶주리고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벨레(Belle) 섬에 수용되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다가 몇 주 후에 포로교환으로 풀려났다.

시체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묻혔지만 워낙 많은 숫자여서 제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1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들판에는 뼈들이 곳곳에서 드러나 있는 공포스러운 광경에 펼쳐졌다.

 

북군의 피해

전사     1,606명

부상     9,762명

포로(실종)    5,919명

총 피해    17,287명

 

남군의 피해

전사     1,581명

부상     8,700명

포로(실종)     2,545명

총 피해     12,826명

 

(우에스기 왈: 의외로 전사자가 적어서 요란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바로 의사가 투입된 잭슨장군도 며칠 후에 죽었는데, 전장에 버려지거나 며칠을 걸어서 후퇴해야 하는 일반 부상병에게 총상은 손발을 절단하거나 합병증으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총검에 의한 자상은 내장을 다치지 않는 한은 동료의 도움을 받아 꿰맬 수 있었지만 총상은 총알을 꺼내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야전병원과 항생제 처방이 제대로 자리잡기 전까지는 부상자의 사망이 70% 이상이었다는 자료를 본 기억이 납니다.)

 

옆의 그림은 북군의 6인치 포대에 들이닥치고 있는 남군을 재현한 미니어처입니다.

 

다음 동영상은 '신과 장군들'이라는 대작 중에서 챈스러스빌, 특히 잭슨의 병력이 북군 캠프를 기습해서 그대로 달리는 장면입니다.

아쉽게도 원작 그대로는 구하지 못했고 음악이 편집된 동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만약 잭슨에게 2~3시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북군의 한 축은 완전히 궤멸되었을 것이고, 잭슨도 죽는 일이 없어서 남북전쟁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세계 역사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겠죠.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