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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5) - 빅스버그 공성전 (1부)

by uesgi2003 2012. 12. 28.


남북전쟁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제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짧디 짧은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볼 때에는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것과 많이 달랐더군요.

예를 들어, 노예해방이 크게 대두된 것은 나중이며, 미국인들이 가지는 남군에 대한 향수 그리고 로버트 리 장군이 왜 그렇게 존경을 받았는지를 조금씩 공감하게 됩니다. 


국내에 알려진 자료들은 링컨과 북부 연방 중심인데 비해, 외국 자료는 남부 연합에 대해 객관적이거나 호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대표적인 도시 공성전인 빅스버그(Vicsburg) 전투입니다.

전쟁 초반 남군이 비교도 안되는 병력을 가지고 북군을 괴롭혔지만 북군의 압도적인 병력과 신무기에 밀려 점차 도시 중심의 방어전에 치중하게 됩니다. 도시가 함락될 때마다 귀중한 병력이 몇 만 명씩 포로로 잡히게 되고, 가뜩이나 원자재 가공산업으로 도시화가 안되었던 남부는 귀중한 산업/교통/문화 중심지를 잃는 동시에 병력도 북군에 더욱 열세로 몰리게 됩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5) -  빅스버그 공성전 (1부)


전쟁 발발전의 빅스버그는 남부 국경의 번화하고 발전된 도시 중 하나였다. 미시시피강을 내려다 보는 고지대에 있는 이 도시는 남부 지역의 물류가 집중되는 상업중심지로 '절벽 위의 여왕도시'로 불릴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다. 

1862년 초반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도시는 남부 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가 되었고 남과 북이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인 전장으로 변했다. 

빅스버그는 고지대에 대형 포대를 올려두면 강이나 동쪽의 평야에서의 공격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고 북쪽와 남쪽은 광활한 늪과 강이 이어져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천혜의 자연요새였다. 

이렇게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북군은 거의 1년 동안 조금씩 땅굴로 접근해 들어갔고 남군은 필사적으로 방어하느라 애썼다. 점차 전투가 가열되면서 북군 해군의 계속된 포격과 북군의 가장 끈질긴 지휘관인 율리시즈 그랜트(Grant)의 공격을 받아 빅스버그는 폐허로 변했다. 


빅스버그는 남부가 서부에서 식품과 다른 원자재를 들여오는 목숨줄이었고, 텍사스와 알칸사스(Arkansas)의 가축, 면과 곡식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레드(Red) 강을 내려왔다가 미시시피 강을 거슬로 올라와 빅스버그 항구에 화물을 내려 놓으면, 철도로 남부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멕시코를 떠난 유럽산 소총과 화약을 실은 기차가 빅스버그에서 다시 배에 실려 텍사스로 운송되었다. 대부분의 남부 항구는 북군이 봉쇄를 했기 때문에 빅스버그가 남부의 물류와 보급을 책임지게 되었다. 제퍼슨 데이브스 대통령은 빅스버그를 "미시시피 강으로 나뉘어진 남부를 하나로 연결하는 못"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북부 연방은 남군의 보급로만큼이나 자신을 위해서도 빅스버그가 필요했다. 평화시에는 중서부의 농부가 바지선을 타고 내려와 뉴 올리온즈에 수출용 밀과 옥수수를 실어나르면, 원양 화물선에 실려 전세계에 수출되었었는데, 빅스버그가 남군의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연방의 중서부 지역이 해외에 수출할 길이 막혀버리게 되었다. 

철도로 나르게 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수출길이 막혀버린 중서부 시민들은 전쟁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링커는 중서부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미시시피 강 일대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1862년 중반까지 북군은 미시시피 강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4월, 해군제독 데이빗 글래스그로우 패러것(Farragut)이 함대를 이끌고 뉴 올리온즈를 점령하고 남부의 해상무역을 봉쇄했다 (사진참조. 대부분의 그림과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북군의 육군과 전함이 미시시피를 남하하면서 미주리의 뉴 마드리드(New Madrid)와 켄터키의 콜럼버스(Columbus)를 점령해 미시시피 강의 남과 북 양쪽 끝을 모두 북군이 장악했고 중간의 빅스버그만 남군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즉시 상류로 거슬로 올라가 빅스버그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페러것은 원양 전함을 이끌고 굽은 강을 거슬러가며 남군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빅스버그에 도착해서 즉시 항복할 것을 요구했지만 남군 수비대의 제임스 오트리(Autrey) 대령은 "미시시피 사람들은 항복하는 방법도 모르고 배우고 싶지도 않다"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북군 전함이 얕은 강바닥을 거슬러 올라가느라 고생하는 동안 남군은 빅스버그에 병력과 중포를 급히 투입했다. 그리고 전함의 중포는 고지대의 남군 포대를 포격할 정도의 각도가 나오지 않았던 반면에 남군은 함대를 내려다 보며 포격할 수 있었다. 패러것의 해군 1,400명만으로는 4,000명이 지키는 빅스버그에 상륙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패러것은 다시 뉴 올리온즈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링컨에게서 상류에서 전함이 내려가고 있으니까 합류해서 빅스버그를 함락시키라는 강력한 요구를 받은 패러것은 6월 8일에 다시 상류를 향해 올라갔다. 

이번에는 박격포를 가져가 포격전으로 빅스버그를 굴복시키려고 했지만 남군의 강력한 포격을 받은 함대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15명 전사에 30명 부상이라는 가벼운 피해만 입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이번에는 많이 데려간다고 생각했던 3,200명도 턱없이 부족했고 패러것은 "이 정도면 다행입니다. 빅스버그를 함락시키려면 15,000명 정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라고 해군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빅스버그의 포대의 사거리 밖에 있는 강 건너편에 병사들을 내려 놓고 함선을 정박시켰을 때에 알칸사스라는 남군의 철갑선 한 척이 대담하게 내려와 패러것 함대를 가로지르며 포격을 퍼부었다(그림 참조). 

단 한 척에 불과했던 알칸사스도 피해가 컸지만 북군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거의 모든 배가 함포를 맞았고 17명이 전사하고 42명이 죽어 빅스버그 포대와 포격전을 벌인 것보다 피해가 더 컸다. 

화가 난 패러것은 빅스버그에 정박한 알칸사스를 공격했지만 침몰시키지는 못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한 패러것은 3개월에 걸친 빅스버그 공격을 포기하고 하류로 내려갔다. 해군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고 이제는 육군의 차례가 된 것이었다. 


미시시피 강 부근에는 그랜트 휘하의 북군이 100,000명이 있었다. 10월 초에 있었던 남군의 자살공격과도 같은 공세를 막아낸 후에는 곳곳에 분산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아 빅스버그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랜트의 계획은 미시시피 중앙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후에 빅스버그를 우회해 포위한 후에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존 맥클러난드(McClernand)도 별도의 병력을 이끌고 빅스버그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노이즈 의원 출신으로 2년 전에 장군이 된 맥클러난드는 남부 오하이오에서 군대를 모아 미시시피를 따라 내려가겠다고 링컨을 설득한 것이었다. 

아마추어에 불과한 정치장군이 독립적인 작전을 진행한다는 것에 화가 난 그랜트는 친구이자 부하인 윌리암 티컴세 셔먼(Sherman)에게 30,000명을 주고 멤피스(Menphis)로 이동시켰다. 셔먼은 멤피스에서 미시시피를 따라 내려간 후에 빅스버그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치카소 고지(Chickasaw Bluffs)를 공격하고 그랜트는 남쪽으로 계속 진격해서 잭슨(Jackson, 남군의 지휘관이 아닌 지명)방향에서 빅스버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빅스버스를 구원하기 위해, 존 펨버톤(Pemberton)이 수비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남군이 보유한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조세프 존스톤(Johnston)이 서부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펨버톤은 빅스버그를 요새화시켜야 한다고 고집피운 반면에 존스톤은 빅스버그에 병력을 못박아두지 말고 야전에서 북군을 상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과론으로 보면 존스톤의 생각이 옳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은 계속 엇갈렸고 결국 남군에게 재앙이 되었다. 

팸버톤도 무기력하게 빅스버그에 틀어박혀 있지는 않았고 얼 반 돈(Dorn)이 기병대를 이끌고 홀리 스프링스(Holly Springs)를 공격해서 그랜트의 병참선을 끊는 동시에 네이탄 베드포드 포레스트(Forrest) 기습군이 잭슨 근처의 철도선을 공격하라는 계획을 세웠다. 

양쪽에서의 기습은 대성공을 거뒀다. 포레스트는 몇 km에 달하는 철도를 끊었고 돈은 1백 5십만 달러어치의 군수품을 노획했다. 적진에서 병참선이 완전히 끊긴 그랜트는 멤피스의 기지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랜트는 후퇴하면서 셔먼에게 양동작전이 실패했다고 알렸지만, 기습으로 전선이 끊겨서 셔먼에게 전신이 전달되지 않았다. 소식을 받지 못한 셔먼은 12월 20일, 3개 사단을 이끌고 멤피스를 출발해 28일에 치카소 고지 근처에 이르렀다.

팸버톤이 보낸 20,000명의 남군은 아직 늪지대에서 발이 묶여 있던 북군에게 달려들었고, 당황한 셔먼은 공격을 중단하고 다음 날에 공격을 재개하기로 했다.

남군의 살인적인 총격을 무릅쓰고 고지대 아래까지 진격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북군은 1,776명을 잃고 물러섰고 남군의 피해는 겨우 187명이었다(그림 참조).

셔먼은 야주 강을 올라가 헤인즈(Haynes') 고지를 공격하기로 하고 전함을 타고 이동했지만 폭우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맥클러난드가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온 셔먼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급상 상관인 맥클러난드는 셔먼에게서 지휘권을 넘겨받고 독립적인 행동에 나서려고 했지만 멤피스에서 많은 전함과 병력을 데리고 때마침 도착한 그랜트가 거꾸로 맥클러난드의 병력을 13군단으로 휘하에 넣어버렸다. 셔먼의 15군단, 제임스 맥퍼슨(McPherson)의 17군단과 함께 13군단까지 통합한 그랜트는 빅스버그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

패러것이 빅스버그 건너편에 상륙시킨 병력은 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고, 빅스버그 북쪽의 늪지대를 건널 수도 없었지만 그랜트는 해볼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써보기로 했고 갈수록 그 방법은 이상하게 변해갔다.

실패하더라도 계속 시도한다면 워싱턴과 링컨이 인정해줄 것이며 병사들도 나태해지지 않고 결국에는 어느 방법이던 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랜트의 바램이었다.

가장 어이없는 방법은 빅스버그를 지나는 강물의 흐름을 바꿔서 북군의 함선이 안전하게 지나다닐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셔먼의 부대가 운하작전을 맡게 되었는데, 셔먼조차 하반신이 진흙에 잠겨 지낼 정도로 고달픈 작업이었다. 벌레가 들끓고 병사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지만 공사는 계속되었다. 미시시피 강에 홍수가 나서 그 때까지의 모든 작업이 물에 떠내려가고 나서야 그랜트도 이 무모한 공사를 중단했다(그림의 Cananl 부분. 그랜트의 운하라고 불립니다.)

 

그랜트는 대운하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훨씬 상류의 프로비던스 호수(Lake Providence)로 통하는 물길을 뚫어 약 750km 하류의 레드(Red) 강으로 물이 흐르게 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맥퍼슨의 부대가 대공사를 맡았다. 맥퍼슨 부대가 30톤이 넘는 증기선을 땅위로 들어올려 호수로 옮기고 회전톱을 사용해서 나무를 베어내며 2개월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한 후에야 그랜트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공사를 중단시켰다(그림 왼쪽의 붉은 원.)

그랜트는 포기하지 않고 빅스버그 북쪽 건너편의 복잡한 물길로 눈을 돌렸다. 전쟁 전에는 빅스버그 동쪽으로 240km 지점의 야주 경로(Pass)로 배가 오갔고 뉴 올리온즈로 향하는 배는 빅스버그를 지나 미시시피 강으로 진입했었다.

그랜트가 생각하기에, 북군이 야주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야주 오른쪽 강변에 상륙해서 셔먼이 실패했던 고지를 우회한다면 빅스버그를 북동쪽에서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야주 경로가 이제는 막혀있다는 것이었다. 1850년대에 홍수를 막기 위해 입구에 거대한 수문이 만들어져 물길을 막고 있었다. 그랜트는 제임스 윌슨 대령에게 화약을 주고 이 수문을 폭파하라고 시켰다. 수문을 파괴한 후에 북군의 증기선이 4,500명의 병력을 싣고 하류로 내려올 수 있었다(그림 윗쪽의 붉은 원.)

북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펨버톤은 급히 병사들에게 나무를 모조리 베어서 물 속에 쳐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군은 중간 중간 강변에 내려 수 백명이 큰 나무를 강물에서 꺼내고 다시 승선해서 내려가는 거북이 전진을 해야만 했다. 북군의 증기선은 나무 뭉치에 이리저리 받히면서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선체와 엔진만 간신히 남은 폐선 직전이 되었다.

 

남군은 야주 강 합류지점에 증기선을 침몰시켜 물길을 막고 방벽을 높여 새로 만든 펨버톤 요새에 2,000명의 병력과 8문의 대포를 배치시켰다. 펨버톤 요새 주변은 늪지대여서 북군이 물길 외에는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2척의 증기선을 보냈지만 포격을 맞고 물러났고 여러 번에 걸치 돌파시도는 모두 격퇴당했다.

통과할 방법이 없어진 북군은 작전을 취소하고 160km를 다시 거슬러 올라갔고 병사들은 '그림책에서나 나올 코미디'라고 비웃었다.

 

그랜트는 야주 경로(Pass) 작전이 남군의 방해로 실패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포터(Porter) 제독에게 야주의 하류 끝 지점을 조사할 것과 필요하다면 궁지에 빠진 북군을 구원해줄 것을 부탁해두었다. 포터는 그랜트와 함께 기함 블랙 호크를 타고 일대를 돌아본 후에, 전함과 증기선으로 선플라워(Sunflower) 강으로 이동해 치카소 고지의 요새를 우회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상 경로로는 겨우 40km에 불과한 거리를 무려 320km너 돌아가겠다는 소리였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성공가능성이 보였다(그림 중앙의 붉은 원 참조.

그랜트의 승인 하에 11척의 배가 얕고 복잡한 수로를 고생스럽게 이동하는 동안 셔먼의 부대는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수로는 점차 좁아졌고 남군도 가만히 있지 않고 선플라워 강 입구의 수문에 대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배가 포격을 받자 포터는 셔먼에게 급하게 지원해달라는 전령을 보냈다. 

셔먼의 부대는 총열 앞에 촛대를 꽂고 밤새 이동했고 포터의 함선들을 전멸직전에 구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그랜트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남군과 북군의 전투가 익숙해질 때가 되었으니까 남북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대포와 박격포(일명 구포)의 실제 발사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포는 6파운드 포로 그렇게 크지 않은 포입니다.

 

 

재미있는 동영상입니다.

북군의 소총 장전과 발사, 분대의 소총 발사 그리고 12파운드 포 발사 모습입니다.

탄약과 총탄 장전 모습을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남군과 북군의 작은 전투 모습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양쪽의 총격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블루레이로 가지고 있는 게티스버그의 총력전 시작 장면입니다.

포격전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리고 포연때문에 전황을 알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의 희생이 컸는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보다 박진감(?) 또는 처절한 장면은 게티스버그 전투 이야기를 정리할 때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