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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5) - 빅스버그 공성전 (2부)

by uesgi2003 2012. 12. 31.

 

이번 겨울은 정말 추운 날씨가 오래가고 눈도 많이 오는군요.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은 따뜻하다고 들었었는데, 이번 겨울은 지독히도 춥습니다.

보통은 3한 4온이라고 3일 추우면 4일이 따뜻해야 하는데, 7한 3온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 내리 춥고 사흘만 풀리는 거죠.

내일부터 다시 영하 14도 아래로 떨어진다고 하는데, 가스비 걱정이 벌써 되는군요. 여름 에어콘 전기료 걱정때문에 버티다가 한 달 정도 가동하고 요금폭탄을 맞았었는데, 가스요금도 장난이 아니어서 생각지도 않은 지출이 크게 나가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서울의 아파트는 형편이 나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지방의 가스비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아서 난방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단독주택의 경우에는 상하수도가 얼어붙어서 큰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유가 있는 분들은 벌써 해외여행으로 피한휴가 떠나거나 눈많은 덕분에 겨울스포츠를 마음껏 즐기고 있지만, 여유가 없는 하루벌어 살아야 하는 분들은 이번 겨울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질 겁니다.

 

우리도 여유가 없기는 하지만 주변의 불편하신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유 정도는 잃지 말았으면 합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5) -  빅스버그 공성전 (2부)

 

그랜트에게는 빅스버그 남쪽에서 반원형 형태로 점차 조여들어가는 정공법밖에 남지 않았다. 4월이 되면서 뜨거운 봄볕아래 땅이 굳었고 휘하에는 60,000명의 병력이 모였으니까 정공법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미시시피 강 건너로 병력을 보내야만 했다.

병력을 남쪽으로 이동시킨 후에 미시시피 강을 건너고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빅스버그를 포위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었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어야 하는데, 만약 남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교두보가 확보된다고 해도, 남군의 펨버톤(Pemberton)과 존스톤(Johnston)을 포위하려면 적진을 160km나 전진해들어가야 했다. 만약 전진하지 못하면 상륙한 부대는 등 뒤에 강을 두고 함정을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3월 29일, 맥클러난드(McClernand)의 13군단부터 남하하기 시작했지만 문제가 계속 터져나왔다. 겨울비에 젖어있던 땅이 진흙밭으로 변하면서 속도가 점점 느려졌고 후속부대를 위해 길을 다지고 다리를 놓느라 몇 주를 흘려보냈다.

도강 지점에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위험이 시작되었다. 선봉대가 포터 제독의 전함과 화물선을 타고 빅스버스의 포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 교두보를 마련해야 했다. 4월 16일 밤, 남군의 포격 속에서 기적과 같이 세 척만 뺀 나머지 모두가 강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랜트는 펨버톤이 주공격로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기병대를 보내 미시시피 중류 지역을 휘젖고 다니게 했다. 원래 학교 선생님이자 음악가였던 벤자민 그리어손(Grierson) 대령은 최고의 기병대지휘관 답게, 4월 17일 1,7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미시시피 중류 지역을 누비며 철도를 파괴하고 남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4월 24일, 그리어손은 빅스버그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뉴톤 역에서 기차를 노획하고 군수품을 불태우고 전신선을 모두 끊었고 20,000명의 남군 추격대를 피해 종횡무진하다가 루이지애나 베통 루즈(Baton Rouge)로 무사히 귀환했다.

 

4월 30일, 그랜트는 셔먼과 10 연대를 야주 강으로 올려보내 빅스버그의 북쪽 고지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전함과 화물선이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며 남군의 온 신경을 집중시켰죠."

그랜트의 작전을 적중했다. 북군이 공격을 한다고 착각한 펨버톤은 북군의 상륙지점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병력을 불러들였다.

남군이 대혼란에 빠진 동안, 그랜트의 본대는 맥클러난드의 13군단부터 시작해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강 반대편에 내릴 수 있었다.

13군단은 지체하지 않고 깁슨(Gibson)요새를 공격해 그랜드(Grand) 만의 남군 수비대를 우회하려고 했다. 그랜드 만에 있던 존 보벤(Bowen)은 7,000명을 깁슨 요새 외곽의 숲지역에 배치하고 북군 4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맥퍼슨(McPherson)의 병력이 우회하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깁슨 요새와 그랜드 만 요새를 모두 손에 넣은 그랜트는 잭슨(Jackson)을 향해 전군을 이동시켰다. 그의 작전은, 일단 남군의 펨버톤과 존스톤을 갈라 놓은 후에 존스톤의 부대부터 밀어내고 잭슨의 철도망을 완전히 파괴해서 남군 지원군이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레이몬드(Raymond)까지 별 저항없이 도착한 북군은, 허드슨(Hudson) 항에서 급하게 불러들인 남군 존 그레그(Gregg)의 2,500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레그의 부대는 북군의 공격에 물러서지 않고 달려들어 백병전을 벌였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결국 남군은 레이몬드를 내주고 후퇴했고, 남군을 위해 레이몬드 시민이 준비한 점심을 대신 먹은 북군은 잭슨으로 향했다.

잭슨은 12,000명의 병력이 지키고 있었지만 북군의 거듭된 공격에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고 미시시피 의사당 지붕에는 북군의 깃발이 꽂혔다.

남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지른 맥퍼슨의 군단은 조금의 휴식도 없이 바로 빅스버그로 다시 전진했다.

 

그랜트의 기만작전에 속아 많은 실수를 거듭했던 펨퍼톤은 2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빅스버그를 나와 북군을 요격하기로 했다. 5월 16일 오전, 숲이 우거진 챔피온 언덕에 자리 잡은 남군은 왼쪽에 있던 윌리암 로링(Loring)이 가장 먼저 북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북군의 공격이 집중된 중앙이 밀려나면서 6문의 포까지 빼앗기자 펨버톤은 로링과 보벤에게 급하게 중앙을 구원하라고 전령을 보냈지만 놀랍게도 로링은 그 명령을 무시했고 보벤이 구원에 나서 북군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랜트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남군의 전열은 토막났고 등을 돌려 언덕을 뛰어내려가는 병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투에 진 펨버톤은 빅스버그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중앙에 합류하지 않았던 로링은 북군에 가로 막혀 빅스버그로 돌아가지 못했다. 남군은 3,800명, 북군은 2,441명의 피해를 입었다.

 

자연의 방어벽인 빅 블랙 강에 진지를 쌓아 북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남군은 북군의 첫 번째 공격에 요새를 내주고 빅스버그로 들어갔다.

패잔병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놀란 시민들이 물과 음식을 가지고 나와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물었고 남군 병사 한 명이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대답했다.

"채찍질 당했습니다."

패주하는 남군을 바짝 뒤쫓은 그랜트는 빅스버그 주변을 완전히 포위했다. 셔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라고 말했지만 빅스버그의 남군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빅스버그 동쪽은 고지대 15km에 걸쳐 참호와 진지로 뒤덮은 요새 그 자체였다. 부근에서 철수한 병력까지 합류하면서 22,000명이 참호와 진지에 빼곡하게 틀어박혔다.

남군의 사기는 이미 바닥이라고 간파한 그랜트는 5월 19일 빅스버그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맥클러난드와 맥퍼슨의 병력은 남군의 사격을 받고 물러났고 셔먼의 15군단은 북동쪽 구석에 있는 방책진지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가 반격을 받고 물러 났다. 첫 번째 정면 공격에서 북군의 사상자는 942명이었다. 셔먼은 안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건 누가 더 많이 죽나 겨루는 것이요. 끔찍할 것이요."

5월 22일, 북군은 200문의 대포롤 동원해 몇 시간에 걸친 포격 후에 남군 진지의 돌출부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군 지휘관 스테판 리는 "마치 사방에서 샘솟듯이 엄청난 북군이 총검을 앞세우고 달려들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포격은 땅만 두들겼을 뿐이었고 포격이 멈추자 참호에서 나온 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몇 분 만에 언덕 곳곳에 북군의 시체가 쌓였고 방책 앞까지 도달한 병사 몇 명가지고는 남군을 몰아낼 수 없었다. 

 

13군단이 공격하던 북쪽의 전투도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자, 그랜트는 예비병력을 투입해 조금씩 전진하던 맥클러난드의 부대를 지원했다. 적의 진지 두 곳을 점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지만 허위보고였고 그 날 입은 피해만 502명 전사에 2,700명이 부상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아무래도 파들어가야 했다."

북쪽에서 지원군이 더 상륙하면서 그랜트의 병력은 70,000명으로 늘어났고 남군의 말처럼 "고양이 한 마리도 빅스버그를 못 빠져나갈 정도로" 포위망이 단단하게 만들어졌다(그림참조).

그랜트는 24시간 내내 남군 진지를 포격하는 동시에 진지를 향해 지그재그로 땅을 파며 전진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군과 북군의 참호는 서로 농담을 던지고 조롱할 정도로 가까워졌고 밤에는 건너가 카드 놀이를 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북군의 유탄 수 백발이 시내로 떨어지자, 시민들은 집을 버리고 언덕 밑에 땅굴을 파고 들어갔는데, 북군은 '프레리 독(땅굴을 파고 사는 큰 쥐과 동물) 마을'이라고 부르는 500개의 땅굴이 만들어졌다.

땅굴 덕분에 몇 주에 걸친 엄청난 포격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희생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북군의 공격보다 두려운 적은 굶주림이었다. 펨버톤이 징발한 식량은 6월 중순이 되자 모두 소비되었고 시민들은 말과 당나귀를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다. 병사들의 배급도 하루에 비스켓 한 조각이 전부일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남군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잭슨에 돌아온 존스톤이 30,000명의 병력으로 빅스버그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랜트는 셔먼에게 병력을 주어 잭슨 방향으로 방어선을 만들게 했다.

존스톤이 잭슨에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했지만 존스톤은 병력과 장비 부족때문에 잭슨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7월 초에 전진을 시작했지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6월 말, 공성전을 끝내기로 마음 먹은 그랜트는 병사들을 불러 모으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며칠만에 잭슨 도로 북쪽의 대 보루(Great Redoubt)라고 부르는 남군 진지 밑에 땅굴이 생겼고 여기에 1톤의 화약을 채워넣었다.

폭발로 40m 정도의 구덩이가 생겼지만 남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땅굴을 통해 남군의 진지로 뛰어든 북군은 200명의 시체남 남겨두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7월 1일, 다시 한 번 더 큰 규모의 땅굴작전을 벌여 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북군 장교들은 땅굴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땅굴과 폭파작전은 가뜩이나 굶주려있던 남군과 시민들의 의지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펨버톤은 7월 1일에 탈출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북군의 진지를 무력으로 넘기에는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가 너무 바닥이라는 답변을 들은 펨버톤은 7월 3일, 마침내 이질로 죽어가고 있던 보벤장군을 보내 휴전을 요구했다.

 

그랜트의 조건은 단 한가지, 무조건 항복 뿐이었다가 석방되었을 때에 다시 남군에 복귀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면 풀어주겠다는 관대한 조건을 걸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30,000명의 포로를 미시시피 강을 타고 후방으로 옮기는 것도 엄청난 작업이지만, 궁지에 몰린 남군과 시민이 저항을 계속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존스톤이 배후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공성전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만 했다.

펨버톤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47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남군에게 7월 3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같은 날, 로버트 리의 군대가 게티스버그에서도 패전했기 때문이다.

 

빅스버그를 점령한 그랜트는 바로 다음 행동에 옮겨야 했다.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허드슨(Hudson) 요새의 남군이 여전히 미시시피 강을 위협하고 있었고 존스톤이 간신히 긁어모은 31,000명이 빅 블랙 강으로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셔먼의 30,000명이 이미 방어선을 만들고 있었지만 존스톤의 공격을 앉아서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빅스버그를 점령하자 마자 16,000명의 병력을 셔먼에게 보냈고, 7월 4일 그랜트의 병력 중 거의 70%가 존스톤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셔먼의 방어선에 막혀 있던 존스톤은 빅스버그에서 더 이상 포성이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고 북군의 대군을 피해 잭슨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셔먼은 바로 그 뒤를 쫓아 잭슨에 접근했지만 정면공격은 자살이라고 판단한 후에 병력을 셋으로 나눠 남과 북쪽에서 진지를 만들며 잭슨을 포위했다.

셔먼의 전력을 파악한 존스톤은 잭슨을 방어할 수 없다고 보고 7월 17일 새벽에 도시를 조용히 빠져나가 동쪽으로 사라졌다.

 

빅스버그의 남군의 항복은 아무런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초췌한 병사들이 줄을 지어 무기를 반납하는 동안 주변의 북군은 어떤 조롱이나 환호성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랜트는 충분한 식량과 의약품을 들여와 굶주린 남군과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서부의 지브랄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남부연합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이제 남부는 동과 서로 나뉘어졌고 병참선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반대로 북부연방은 메인에서 미네소타까지 모든 교회 종이 울려퍼졌고 축포가 발사되었다. 그랜트는 영웅으로 부각되며 정치적인 입지까지 확고해졌다. 그리고 게티스버그의 승전과 테네시 중부 확보로 반대판의 불만을 잠재운 링컨은 1864년에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빅스버그 공성전 피해

(빅스버그 공방전에서만 집계한 피해로 보입니다. 전체 전투에서는 북군의 피해가 이보다는 훨씬 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군

전사     763명

부상     3,746명

포로/실종    162명

총계    4,671명

 

남군

전사     805명

부상     1,938명

포로/실종     129명

7월 4일 항복    29,491명

총계     4,67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