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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6) - 게티스버그 전투(1부)

by uesgi2003 2013. 1. 2.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에게 반복해서 부탁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1. 반말 댓글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양합니다. 그것이 칭찬글이어도 삭제합니다. 

 

2. 의견을 주실 때에는 근거자료도 함께 주십시오. 최소한 URL이어도 좋고 가능하다면 어느 책 어느 부분이라고 상세하게 알려주시면 제가 확인하고 제 의견을 드리거나 수정하게 됩니다. 그냥 "당신이 뭘 모르네! 그건 그게 아니야"라고만 달린 댓글은 제가 의견을 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삭제하기도 좀 난감합니다.

 

3. 제 이야기는 자유롭게 퍼가셔도 됩니다. 요즘 제 이야기가 네이버 지식인에도 사용되던데, 출처는 밝혀주셔야 다른 분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남북전쟁의 최대 분수령인 게티스버그 전투입니다. 제가 역사 블로그를 만들면서, 이미 많은 한글자료가 있거나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는 피한다고 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게티스버그 전투입니다. 칸나에전투, 워털루전투, 미드웨이해전,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제 블로그에서는 절대로 다루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인데, 남북전쟁의 주요 전투를 연재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런 유명한 전투는 이미 많은 분들이 정리한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로 제가 기피하고 있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아! 저 때에 저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하는 아쉬움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감정이입된 인물이 몰락하는 장면은 여러분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장면일 것입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그동안 고군분투하던 로버트 리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실패하는, 결국 남부가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굴러가게 되는 전투입니다. 


이제 정리를 시작해서 이른 감이 있지만, 아마도 상당히 자세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사를 바꾼 미국남북전쟁 (6) - 게티스버그 전투(1부)


게티스버그로 향하는 길은 1863년 5월 3일 챈스러스빌 전투 직후에 바로 열렸다. 와일더니스(Wilderness)라고 불리는 숲에서 3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리의 북부 버지니아군은 겨우 61,000명의 병력으로 134,000명이 넘는 북군을 시종일관 몰아붙이며 승리를 거뒀다. 포토맥군의 4번째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던 조세프 후커(Hooker) 장군은 리의 노련한 전술의 제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북군 병사들은 후커의 지나친 음주벽때문에 전투에서 졌다고 생각했다. 


그림 설명: 100주년 우표로 1963년에 발행되었습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지도는 반드시 큰 그림으로 잘 참조하셔야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습니다. 


포토맥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북군의 전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후커가 챈스러스빌에서 13%의 병력을 잃는 동안 리의 병력은 22%나 사라졌다. 무엇보다 큰 피해는 리가 가장 신뢰하는 토마스 스톤월 잭슨(Jackson)이 부상에서 결국 죽었다는 것이다. 


리는 챈스러스빌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포토맥군이 리치몬드로 진격하는 시간을 지연시켰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선택권은 두 가지 뿐이었다. 리치몬드로 후퇴해서 방어전을 벌이다가 항복하던가, 아니면 과감한 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포토맥강을 건너 펜실바니아로 쳐들어가는 선제공격은 자신의 스타일과도 맞았다. 

리는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Davis)에게, 북으로 진격하면 보급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철도시설 미비와 전투로 피폐해진 남부에서는 충분한 식량이나 군복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펜실바니아로 진격하면 병사들이 먹을 농장이 많았고 그동안 버지니아는 보급품을 채워넣을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남부연맹 정부는 서부의 상황이 걱정이 되었다. 율리시스 그랜트(Grant)의 북군이 미시시피강의 판도를 좌우하는 빅스버그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가 구원을 가주길 바랬다. 그리고 리가 북으로 떠나가면 후커가 다시 리치몬드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폐해진 북 버지니아에서 더 이상의 전투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북부영토에서의 작전이 성공한다면 북부 평화민주당(Northern Peace Democrats)이 남부와의 협상에 나서라고 압력을 넣을 수도 있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에스기 왈: 남부 연맹의 희망과 달리 유럽은 남부의 면화보다 북부의 곡물이 훨씬 더 필요했고 유럽 내부의 사정 때문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리는 북 버지니아군을 3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제임스 롱스트리트(Longstreet), 리차드 스토덜트 이웰(Ewell), 앰브로스 파웰 힐(Hill)에게 지휘를 맡겼다. 병력은 가능한 한 충원해서 75,000명까지 가까스로 올렸다. 

리가 지휘를 맡은 후부터 남군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병사들의 사기와 승리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들은 자신을 무적이라고 그리고 어떤 북군 지휘관도 리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가 지휘를 하는 동안에는 걱정거리가 없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듯이 그와 함께라면 승리는 당연해보였다."

리도 병사들에 대한 신념이 대단했다.

"남군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병사들 중에 최고의 병사다."


후커가 공세에 나서지 앉자, 리는 컬페퍼(Culpeper) 근처까지 북서쪽으로 50km 정도를 전진했고, 남군의 움직임이 불안했던 푸커는 6월 5에 "남군이 포토맥강 상류를 건너거나 아니면 저와 워싱턴 중간을 가로지를 것 같습니다"라는 편지를 링컨에게 보냈다. 

리의 병력 중 60%가 컬페퍼에 집결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던 후커는, 스튜어트(Stuart)의 기병군단이 북군의 병참선을 교란시키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후커는 알프레드 플리손톤(Pleasonton)에게 컬페퍼 근처에 집결한 반란군을 쫓아보내라고 명령했다. 

1863년 6월 9일 이른 아침, 플리손톤의 8,000명 기병군단은 3,000명 보병의 지원을 받아 스튜어트의 전초부대를 기습했다. 기습에 놀란 스튜어트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북군에게 대응했고 14시간 동안 미국역사상 최대의 기마전이 벌어졌다. 

어둠이 내리면서 플리손톤의 기병군단이 물러갔지만, 최소한 기병대만큼은 자신들이 압도적이라고 자신했던 남군은 큰 충격에 빠졌다. 


북 버지니아군은 게티스버그 전투를 향한 대장전에 올랐다. 선봉대에는 이웰의 21,000명 군단이 셰넌도어(Shenandoah) 계곡을 따라 포토맥강이 만나는 지점을 향했다. 6월 13일~15일 이틀동안 이웰 군단은 윈체스터(Winchester)의 북군을 공격해 3,000명의 포로와 23문의 대포를 노획하면서 진로에 있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했다. 

메릴랜드(Maryland)에 입성한 리는 북부침공에 대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남군의 대병력은 블루 릿지(Blue Ridge) 산맥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고 스튜어트의 기병군단이 북군 정찰병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플리손톤의 기병대는 알디(Aldie), 미들버그(Middleburg)과 어퍼빌(Upperville)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남군의 봉쇄를 뚫지 못했다. 


셰넌도어강 하류에서 남군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폴마우스(Falmouth)의 북군 사령부로 들어왔다. 후커가 가장 걱정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났는데, 문제는 리가 북부, 워싱턴, 보급선(오렌지와 알렉산드리아 철도)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후커는 일단 워싱턴 방어를 위해 북쪽으로 7개 군단을 이동시키기로 했다. 

남군이 7일 먼저 앞섰기 때문에 북군은 15시간 동안 행진했다. 

"버지니아의 흙이 얼굴 전체를 뒤덮어 친한 친구조차 서로를 몰라볼 정도였다."


북군이 열심히 따라오는 동안, 남군은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들어서고 있었다. 6월 24일, 힐 군단이 쉐퍼즈타운에서, 롱스트리트 군단이 윌리엄스포트에서 강을 건넜고 군악대는 "메릴랜드! 나의 메릴랜드"를 연주하며 사기를 높였다. 표정이 어두운 메릴랜드 여자들에게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가 왔어. 아가씨들. 정말 볼품없지만 양키들을 혼내주려고 왔다고."

굶주린 병사들은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의 농장에 미쳐있었고 리는 도둑질이나 강탈을 금지하고 시장가격에 징발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도둑질이 다반사였고 장교들은 배고픈 부하들의 일탈을 눈감아주었다. 

"몇 명이 닭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사실 명령위반이거든. 한 놈도 처벌하지 않았어." 한 상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내용이었다. 

일부 지휘관은 심지어 강한 복수심을 보이기까지 했다. 

"양키들은 우리가 펜실바니아를 초토화시킬까봐 걱정이지. 버지니아가 당했던 것처럼 보복할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일이야."


이 때까지는 리의 도박이 그대로 적중하는 듯이 보였고 펜실바니아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려있었다. 젭 스튜어트는 4개 기병사단 중 3개를 이끌고 후커를 우회해서 북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줘서 병력격차를 좀 줄여보려고 했다. 스튜어트는 대담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전력이 되지 않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리는 해리스버그(Harrisburg)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와 연결되는 철도선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안심하는 순간 후커의 군대가 보인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북군은 이미 포토맥강을 건너 남군의 사령부가 차려진 챔버스버그(Chambersburg)에서 남쪽 65km 지점까지 추격해왔다. 만약 북군이 그대로 강행군을 한다면 길게 늘어진 남군의 대열을 중간에 끊고 분산시키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리는 해리스버그 점령을 취소하고 군단 지휘관들에게 챔버스버그 동쪽 40km에 있는 캐시타운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했다. 

정찰병들은 북군 지휘관이 조세프 후커가 고든 미드(Meade, 사진참조)로 교체되었다는 흥미로운 소식도 가져왔다. 


대회전이 임박한 것을 느낀 미드는 병사들을 북쪽으로 강행군시키면서 리의 행방을 쫓는 기병대를 사방으로 보냈다. 북군은 하루 50km 이상을 행군했고 밤에도 행군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라고는 입 안에 가득찬 흙먼지뿐이었다. 물집잡힌 발로 무거운 군장을 지고 먼지 자욱한 길을 계속 걸었다. 수 백 명이 탈진해서 길 옆에 쓰러졌다. 일사병이 걸려서 얼굴이 전부 가죽색깔이었다."

지역주민들은 북군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피로와 곧 있을 결전의 두려움으로 병사들은 누구 하나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대열에서는 발거음과 군장이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기도와 신음소리가 전부였다."

미드가 펜실바니아로 들어섰을 때에, 리의 첫 번째 부대도 캐시타운에 도착했고 6월 30일, 동쪽으로 13km 떨어진 게티스버그를 정찰했다. 게티스버그에는 구두 공장이 있었는데, 정찰대는 구두를 가지러갔다가 북군이 이미 게티스버그를 점령한 것을 발견했다. 

약 2,700명의 북 캐롤라이나 병사들이 게티스버그에 접근했을 때에 푸른 군복의 기병들이 있는 것을 보고 명령받은대로 뒤로 물러났다. 그날 밤 제3 군단 지휘관인 힐(Hill)은 게티스버그의 북군이 시민군 정도일 것으로 판단했고 헨리 헤드(Heth)에게 공격 허락을 내렸다.

"장군님의 반대가 없다면 제 사단이 내일 게티스버그를 점령하고 구두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반대할 리가 없지."


힐의 판단은 완전히 오산이었다. 게티스버그에 있던 북군은 존 부포드(Buford) 기병사단의 2,700명 정예병이었고 부포드는 게티스버그가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주변의 12개 도로는 마치 바퀴처럼 마을을 거치기 때문에 남군이나 북군 모두에게 집결지로 그만한 곳이 없었다. 

부포드는 레이놀즈(Reynolds)에게 보병을 데리고 빨리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부하들을 게티스버그의 북쪽과 서쪽의 높은 곳에 배치시켰다. 힐의 안이한 판단 그리고 부포드의 정확한 판단이 게티스버그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