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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6) - 게티스버그 전투 (2부)

by uesgi2003 2013. 1. 8.

 

1863 7 1일 오전 5 30, 게티스버그 서쪽 5km 떨어진 마쉬 개울(Marsh Creek) 근처에서 챔버스버그 파이크(Chambersburg Pike) 길을 따라 회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내려오는 것이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

급하게 전령을 보낸 북군 제8 일리노이즈 기병대 중의 존스는 적을 향해 카빈소총을 발사했고 이렇게 남북전쟁 최대의 대회전이 시작되었다.

다가오는 남군은 제1 군단 헨리 헤쓰(Heth) 사단이었다. 그는 사단병력 75,000명으로 게티스버그에 숨어 있을 시민군을 순식간에 몰아내고 중심지를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허 산등성이(Herr Ridge)에 올라가서야 시민군이라고 믿었던 오합지졸이 북군 정예기병대이며 이미 맥퍼슨(Mcpherson) 산등성이에서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헤쓰는 아처와 데이비스 여단부터 공격시켰고 북군 부포드(Buford) 기병대는 북군의 좌익을 담당하는 존 레이놀즈(Reynolds)의 병력이 투입될 시간을 벌어주었다.

레이놀즈는 오전 9시에 늦지 않게 도착했고 심한 공격을 받던 부포드 기병대를 구원해주었다. 레이놀즈는 병사들을 언덕 위로 직접 이끌며 지휘하던 중에 머리 뒤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애브너 더블데이(Doubleday)가 그를 대신해 1군단을 지휘하면서 헤쓰의 공격을 막아냈다. 아처 여단은 공격에 실패했고 아처는 북군의 포로가 되었다. 데이비스 여단은 공사가 중단된 철로를 따라 북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퇴로가 막혀 부대기를 빼앗기고 거의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오전 11, '기도하는 장군'이라는 별명의 올리버 하워드(Howard)의 제11 군단이 도착했고 2개 사단은 게티스버그 북쪽과 동쪽에 배치하고 나머지 사단은 예비병력으로 세메터리 언덕(Cemetary Hill)에 배치했다.

"더블데이 장군에게 좌익을 책임지라고 전하게. 나는 우익을 책임질테니까."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리는 헤쓰의 무모한 단독공격에 어이가 없었지만 리차드 이웰(Ewell)의 제2 군단이 도착했다는 반가운 보고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아직 하루 거리에 있는 롱스트리트(Longstreet) 군단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1 2 군단만으로 승부를 걸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3시간의 재정비 후에 오후 230분 전투가 재개되자 마자 리의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웰 군단에서 가장 큰 사단인 로버트 로즈(Rodes) 사단이 북쪽에서 조율되지 않은 공격에 나섰다. 1개 여단은 아예 정지해있는 동안 4개 북 캐롤라이나 연대는 저습지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서있던 병사들이 거의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 때에 북군은 반격에 나섰고 그렇게 캐롤라이나 연대는 전멸되었다.

로즈가 계속 공격을 하는 동안, 다른 남군 여단들이 맥퍼슨 언덕을 공격했다. 존스톤 페티그루(Pettigrew) 여단은 북군 아이언 여단의 사격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대로 전진해들어갔다.

"그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속보로 다가오면서 악마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남군의 제26 북 노스캐롤라이나와 북군 제24 미시건 연대는 맞서서 사격전을 벌였고 70% 이상이 사상 당했다. 북 노스캐폴라이나 연대의 기수는 14명이나 바뀔 정도였다. 그 중에는 남군에서 가장 나이 어린 21살의 헨리 킹 버그윈(Bugwyn) 대령도 있었다.

 

오후 3 45, 페티그루의 2개 연대가 북군 가장 왼쪽을 돌파하면서 제1 군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티스버그 북쪽과 동쪽을 방어하던 북군 제11 군단도 남군 주발 얼리(Early)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캐를리슬(Carlisle)과 해리스버그(Harrisburg) 도로 중간에 있던 발로우(Barlow) 여단은 십자포화를 맞았고 여단장이 부상을 당하면서 병사들의 전열을 흔들렸다.

"하워드의 병사들은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망가거나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양 옆에서 그렇게 사격을 당하고도 무사할 수가 없었다."

오후 4 30, 북군 좌우익은 모두 퇴각하기 시작했다. 1 군단 중 일부 부대가 교회당 건물 옆에서 잠시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다시 무너졌다.

"사방에서 우리 병사들이 미친 듯이 뒤로 도망가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 앉는 듯 했다. 희망이 없었다."

 

올리버 하워드가 세메터리 언덕에서 도망치는 병사들을 돌려세우고 있는 동안, 2 군단의 사령관인 윈필드 스코트 핸콕(Hancock)이 미드의 명령을 받고 게티스버그에 도착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그의 모습만으로도 용기와 희망을 되찾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왜 우리가 도망치고 있었는지 창피스러워졌다."

북군은 가까스로 대재앙의 위기를 벗어났다. 만약 남군이 세메터리 언덕으로 모두 몰려왔다면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그 날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리가 이웰에게 '가능하다면' 세메터리 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지만, 이웰은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고, 그 동안 강행군을 하던 미드의 본대가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게티스버그 전투로 돌입하게 되었다.

 

7 1일 자정이 되기 바로 직전에 조지 미드(Meade)가 도착했다. 미드는 게티스버그를 결전의 장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핸콕과 하워드의 보고를 받자 첫 날 전투에서 북군이 패전위기까지 몰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개 군단 중 2개 군단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이 게티스버그 남쪽의 언덕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대가 새벽까지 도착하지 않는다면 북군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남쪽에서 강행군에 지친 북군이 발을 끌며 도착하기 시작했고 수 백 명의 이탈자가 생겼더라도 제2, 3, 5 12군단을 배치시킬 수 있었다.

새로운 병력덕분에 게티스버그 남동쪽의 컬프스 언덕(Culp's Hill)의 숲을 장악하고 세메터리 언덕에서 남쪽으로 세메터리 산등성이(Ridge)까지 방어선을 넓게 펼칠 수 있었다. 방어선은 말굽모양으로, 북군의 집중공격이 예상되는 북쪽과 동쪽에 최대한 전력을 집중시켰다. 

북군 병사들은 텐트를 칠 기력조차 없을 정도로 탈진해서 배치된 그 자리에 쓰러져서 잠에 취했다. 


 

리는 수적으로 우세한 북군을 상대하려면 두 번째 전투는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 과감한 작전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이 그만의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두 번째 머내서스(Second Manassas)와 챈스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에서 이끌어냈던 성공을 이번에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롱스트리트의 3개 사단 중 2개가 힐과 이웰의 군단을 보강시켰고 리는 새 병력으로 북군의 가장 취약한 좌측을 공격하기로 했다. 오전부터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리는 지휘관들에게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허 산등성이에서 출발한 롱스트리트의 존 벨 후드(Hood)와 라파예트 맥로스(McLaws) 사단은 세미너리(Seminary) 산등성이를 가림막삼아서 북군의 시야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이동한다음, 에미츠버그(Emmitsburg) 고로 서쪽에서 정비한 다음 북쪽으로 순차공격을 할 계획이었다. 

롱스트리트의 마지막 부대가 전진할 때에, 힐 군단의 앤더슨(Anderson) 사단이 세메터리 산등성이에 있는 북군 중앙을 공격하고, 이웰은 북군의 우익을 공격해서 주위를 그쪽으로 분산시키게 된다. 

그러나 롱스트리트는 도착하려면 아직 하루가 남은 조지 피켓(Pickett) 사단없이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는 리의 생각과 달리 아예 공격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게티스버그는 그대로 두고 방어하기에 좋은 지역을 골라 미드가 공격에 나서게 만들고 싶어했다. 암브로스 번사이드(Burnside)가 프레데릭스버그(Fredericksburg)에서 틀어박히 남군을 공격하다가 참담한 실패흘 했던 것처럼 북군을 유도하고 싶었지만 리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롱스트리트는 마지못해 명령을 따랐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많은 장교들이 롱스트리트에게 반기를 들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롱스트리트가 겨우 공격에 나섰던 오후 4시에는 이미 북군 한 개 군단이 세메터리 산등성이를 내려와 에미츠버그 도로에서 롱스트리트의 진로를 막고 있었다. 


리가 지휘관과 의견차이로 삐걱거리는 동안, 미드도 고집센 지휘관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대니엘 시클스(Sickles)는 3 군단의 배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독단으로 2개 사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에미츠버그 길을 따라 배치시켰는데, 미드가 뒤늦게 알았을 때에는 이미 롱스트리트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그대로 전투가 이어졌다. 

남군은 여단 단위로 계속 북군 3 군단을 향해 밀어닥쳤고 북군은 필사적인 저항을 했지만 결국 세메터리 산등성이쪽으로 밀려났다. 그대로 좌익을 내줬다면 전투를 시작하자 마자 바로 북군의 전열이 무너질 결정적인 순간에 초급장교의 분전으로 작은 산봉우리(Little Round Top)을 지켜내면서 좌익도 지켜졌다. 

핸콕의 제2 군단도 세메터리 산등성이를 지켜내면서 이웰의 공격을 격퇴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할 때에 남군이 잠시동안 세메터리 언덕을 돌파하기도 했지만 북군의 반격에 곧바로 밀려났다. 

이렇게 두 번째 전투도 기회와 위기가 교차하면서 끝나게 되었고 세 번째 전투에서 승부를 걸게 되었다. 

 

(우에스기 왈: 게티스버그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도 있는 작은 산봉우리 전투입니다. 대학교수 출신인 북군의 챔벌레인이 남군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격을 가해 남군을 완전히 밀어냈습니다.

이 봉우리를 빼앗겼다면, 남군은 여기에 포대를 설치하고 북군을 내려다 보며 마음껏 포격을 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