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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6) - 게티스버그 전투 (3부)

by uesgi2003 2013. 1. 9.

 

이번 이야기는 게티스버그라는 초장편 영화 덕분에 여러분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 장면을 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에 동영상을 보여드렸지만, 이번에는 각 장면을 이야기에 맞춰 보여드려 어느 때보다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7월 2일 전투에서도 북군은 매순간 패전의 위기에 몰렸지만 그 때마다 지휘관들의 뛰어난 용기와 리더십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반대로 리는 북쪽의 컬프스에서 세메터리 언덕까지, 남쪽으로는 세메터리 산등성이부작은 산봉우리까지 북군의 방어선 곳곳을 두들겼지만 돌파직전에 물러나야만 했다.

세번째 전투에서도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한 리는 북군에 대해 두 방향에서 협공하기로 했다. 왼쪽에서는 이웰(Ewell) 군단이 컬프스(Culp's) 언덕을 점령하고, 피켓(Pickett) 사단이 도착해 병력이 보강된 롱스트리트(Longstreet)는 세메터리(Cemetary) 산등성이의 북군 중앙을 공격하기로 했다.

컬스프 언덕의 북군은 참호를 파고 툴어박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웰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미드는 병력을 이동시켜서 다른 방어선이 약해지게 된다. 그리고 전날 전투에서 세메터리 산등성이를 방어하던 북군의 피해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만약 이곳의 병력을 조금만 다른 곳으로 빼낸다면 롱스트리트가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날과 마찬가지로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리의 작전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요란한 총성과 포성때문에 남군 지휘관들은 컬프스 언덕을 이미 공격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북군의 제12 군단 일부가 전날 내줬던 지역을 탈환하려고 공격에 나섰고 그렇게 전투가 가열되면서 리가 노렸던 동시 협공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정오가 되면서 컬프스 언덕 전투는 대치상태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고, 남군이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세메터리 산등성이의 북군 중앙을 돌파하는 수 밖에 없었다. 

리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롱스트리트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롱스트리트는 북군 중앙을 공격한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다고 거듭 반대했다. 리의 종용을 받은 롱스트리트는 오전 내내 병력을 배치하며 시단을 보냈고 결국 컬프스 언덕 전투가 모두 끝난 다음인 오후 1시에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세메터리 산등성이의 북군 진지를 170문의 대포가 두들기면서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었다. 북군의 제2 군단도 대응포격에 나서면서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포격전이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남군의 포격으로 북군 포대는 거의 궤멸되었지만 대부분의 포탄은 북군 머리 위로 넘어갔고 핸콕(Hancock)은 병사들의 대열을 천천히 오가며 사기를 높였다. 

오후 3시, 포격이 점차 잦아들자 약 12,500명의 남군 3개 사단이 세미너리(Seminary) 산등성이의 출발점에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우에스기 왈: 영화 게티스버그의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기 전에 천천히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해상도가 낮지만 그래도 최대한 높이고 소리도 키워서 보시기 바랍니다.)




페티그루(Pettigrew)의 북 캐롤라이나와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이 선두에 서고 트림블(Trimble) 사단은 왼쪽에서 페티그루를 지원하며 뒤를 따랐다.

북군의 포화는 남군 대열 중간을 끊었고 곧바로 옆이나 뒤에서 빈 곳을 채우며 남군의 전진은 중단없이 계속 이어졌다. 첫 번째 여단이 에미츠버그(Emmitsburg) 도로의 철도 펜스를 넘어서는 순간에 북군의 일제사격이 집중되었다. 포격과 집중사격을 받던 남군은 목표로 삼은 낮은 돌담이나 죽은 나무로 목을 잔뜩 움추리고 속보로 달리기 시작했다. 켐퍼(Kemper) 여단장은 이미 부상을 당해 뒤로 실려갔고 페티그루도 손에 부상을 입고 말도 없이 병사들 틈에서 함께 걸었고 가네트(Garnett)여단장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선두 여단이 거의 궤멸되자, 두 번째 여단의 아미스테드(Armistead)는 칼 끝에 모자를 끼워 높이 들고 돌담을 향해 부하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아미스테드는 병사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 "가자 병사들이여!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누가 함께 가겠는가?"라고 소리쳤다.

약 200명의 남군병사가 아미스테드를 따라 돌담을 넘어 북군 포대를 넘어섰고 순간적으로 북군의 중앙이 뚫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급해진 핸콕은 예비병력을 무너진 중앙에 투입하는 동시에 좌익에 있던 조지 스탠너드(Stannard) 여단에게 에미츠버그 도로를 향해 이동해 남군의 옆구리를 찌르라고 명령했다. 이리 저리 말을 몰던 핸콕의 오른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지만 핸콕은 남군이 물러날 때까지 전선을 떠나지 않았다.

 

북군의 증원군은 남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전쟁 전 행콕의 친구였던 아미스테드는 북군 포대 옆에서 중상을 당했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아미스테드를 잃자, 북군 앞까지 전진했던 남군 병사들은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리는 전장에서 도망쳐오는 병사들 틈을 오가며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라고 중얼거렸고 지휘관들은 만신창이가 된 부대를 재정비했지만 더이상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었다.

남군은 거의 모든 병력을 소진하고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측이 50,000명의 희생자를 낸 게티스버그 전투를 끝으로 남군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 부분의 동영상, 북군의 예비병력으 투입되면서 남군의 마지막 공격이 무산되는 장면은 유투브에서 소스코드를 공유하지 않아서 http://www.youtube.com/watch?v=h21U4AJvMoA 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7월 4일, 남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북군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남군은 거의 20,000명, 전체 전력 중 40%를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오후 늦게 비가 내리는 동안, 리는 가장 느린 수송부대부터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광경과 소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두 배 가까이 부풀어오른 시체들. 어떤 시체는 가스가 가득차 터지기까지 했다."

북군은 남군이 물러간 후에 시체들을 파묻는 작업을 했다. "냄새가 너무 역겨워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질식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돌아서서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어야 했다."

게티스버그 시민들은 피난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그 중에는 쓰러진 병사들의 소지품을 뒤지다가 붙잡혀 시체 치우는 작업에 강제로 동원된 사람도 있고 스스로 도운 사람도 있었다. 엘리자베쓰 쏜(Thorn)이라는 여성은 임신 6개월의 몸을 이끌고 105명의 병사를 파묻었는데 작업이 끝났을 때에는 온 몸이 피에 물들었다고 한다. 


게티스버그까지 강행군을 한데다가 휴식없이 전투를 치루면서 병사들의 체력은 완전히 고갈되었기 때문에 미드는 후퇴하는 남군을 바로 추격할 수 없었다. 워싱턴에서는 "바로 추격해서 그가 강을 건너기 전에 붙잡으시오"라는 전신을 보냈지만, 가장 피해가 적었던 제6 군단은 7월 5일에야, 그리고 다른 군단은 7월 7일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강우로 강물이 불어나면서 발이 묶인 남군은 결전을 각오하고 강력한 진지를 만들어 북군을 기다렸고, 그 모습을 본 미드는 프레데릭스버그의 참패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지휘관도 공격에 반대했기 때문에, 남군의 후위인 헤쓰 사단의 1,500명만 포로로 잡는 것에 만족했다.  


게티스버그 전투 피해


북군 피해

전사    3,070명

부상    14,497명

포로/실종    5,434명

총계    23,001명


남군 피해

전사    2,592명

부상    12,706명

포로/실종    5,150명

총계(추정)    20,44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