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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 전투 (1부)

by uesgi2003 2013. 1. 15.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Chicamagua) 전투 (1부)


1863년 봄, 윌리암 로즈크랜스(Rosecrans)의 컴버랜드(Cumberland) 군은 남진해서 테네시 동부를 지나 차타누가(Chattanooga)를 점령하려는 원정길에 올랐다. 이 도시는 남군의 무기, 탄약, 식량 등의 군수품이 수송되는 4개의 철로가 모이는 곳으로 전략요충지였다. 로즈크랜스가 이 도시를 점령한다면 남군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빠지게 될 판이었다. 

3,500명이 사는 테네시 강변의 차타누가는 조지아(Georgia) 북부로 들어서는 관문이자 남부 중부의 핵심 도시인 아틀란타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차타누가를 점령한다면, 링컨이 말했듯이 "반란군은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링컨의 바램과 달리 원정준비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1863년 1월 중순까지도, 로즈크랜스는 차타누가에서 230km나 떨어진 머프리스보로(Murfreesboro)에 간신히 캠프를 차렸을 정도였다. 12월 31일부터 1월 2일까지의 3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남군의 브랙스톤 브래그(Bragg)의 테네시군을 참패시킨 후에도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완전한 준비를 갖춘 후에나 다음 작전에 나서려고 했기 때문에 워싱턴은 속을 끓이고 있었다. 


상관인 헨리 홀렉(Halleck)은 차타누가(지도 참조)를 하루 빨리 점령하고 싶었다. 서쪽으로 640km 떨어진 그랜트의 빅스버그 공성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로즈크랜스가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면 브래그가 병사중 일부를 빅스버그 구원에 보낼 수도 있었다. 

로즈크랜스는 그랜트의 상황을 낙관하면서 군사작전은 서두르면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답신을 계속 보냈다. 그리고 원정길은 자연장애물과 요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완벽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도 했다. 

로즈크랜스가 병사들이 지쳤다고 변명했지만 거꾸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느라 사기가 떨어졌다. 인디아나 포병장교는 심지어 "잡담하고, 먹고, 자고, 파리 잡는 것이 전부"인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냥 녹슬어가고 있다"라는 병사도 있었다. 

브래그의 남군의 상황은 처참했다. 이전 전투에서 병력을 30%나 잃은데다가 압도적인 북군을 앞에 두고도 식량을 구하려 사냥이나 채집을 해야 하는 형쳔이었다. 그리고 브래드가 가하는 엄격한 형벌때문에 병사들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남군 장교들은 브래드(사진의 왼쪽. 오른쪽은 북군의 로즈크랜스)가 스톤스(Stones) 강에서 승리를 할 수도 있었는데 후퇴한 것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하면서 물러나라는 편지까지 보냈다. 장교들의 청원을 받은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Davis)는 브래그를 대체할 장군이 없었기 때문에 응답을 하지 않았다. 


보병들은 양쪽 진영에서 한 쪽은 지루함과, 다른 한 쪽은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안, 기병대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브래그는 47,000명 병력 중에 기병이 15,000명이었고 네이턴 베드포드 포레스트(Forrest), 조세트 휠러(Wheeler)와 존 헌트 모건(Morgan)과 같은 용감무쌍한 지휘관이 이끌고 있었다. 남군 기병대는 컴버랜드 강의 수송지에 불쑥 나타나 거의 모든 다리를 불태우고 철로를 끊었다. 

로즈크랜스의 기병 9,000명만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보병 일부를 말에 태워 새로운 부대를 만들었다. 새 연대는 존 와일더(Wilder)에게 맡겨졌다. 

보병들에게 승마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7발 자동사격이 되는 스펜서 소총으로 무장한 새 여단은 최강의 전력이 되었다. 그리고 1863년 6월까지, 이렇게 만들어진 기병대가 80,000명까지 불어난 컴버랜드 군의 수송선을 방어하는 책임을 졌다.  

로즈크랜스가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자, 홀렉은 6월 16일에 "즉시 전진할 것인가? 예. 아니오로 분명한 대답을 바라겠소"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고, 로즈크랜스는 "오늘이나 내일 당장이라면 아니오이고 5일 후라면 예입니다"라는 애매한 답변을 보낸 후에 8일 후인 6월 24일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인 후에는 능숙한 기동으로 속도를 내서 남진했다. 


브래그의 방어선까지 가는 길은 가이스 협곡(Guy's Gap), 벨버클(Bellbuckle)협곡, 리버티(Liberty) 협곡과 후버스(Hover's) 협곡이 있었는데 후버스 협곡은 워낙 험해서 다른 세 협곡을 택하는 것이 편했다.

브래그는 협곡 방어를 위해 가이스와 벨버클 협곡에 2개 군단을, 후버스와 리버티 협곡에는 1개 군단을 배치시켰고 포레스트 기병대는 서쪽에서 있을 지도 모를 북군의 우회에 대비했다. 

로즈크랜스는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치밀한 조사를 해두었고 적을 속일 수 있는 길로 이동하기로 했다. 행군하기 편한 벨버클이나 리버티 협곡으로 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기만기동을 한 후에 남군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남군을 속이기 위해 데이빗 스탠리(Stanley)의 기병군단과 고든 그랜저(Granger)의 예비군단을 벨버클 협곡으로 보내고 폴크(Polk) 군단은 브래그가 기다리고 있던 왼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1개 사단만 맥민빌(McMinnville)로 보냈는데, 브래그는 이것을 기만작전으로 판단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로즈크랜스가 바라던 대로 브래그가 속아주었다. 처음 출발한 1개 사단 뒤를 따라 토마스 크리텐덴(Crittenden)의 21군단이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에 남군 기병대의 방어를 뚫고 맨체스터(Manchester)로 남진할 계획이었다. 남군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알렉산더 맥쿡(McCook)의 20군단은 리버티 협곡으로 이동해서 남군 군단을 그 자리에 못 박아 둘 생각이었다. 기만작전이 성공한다면, 로즈크랜스의 좌익은 브래그의 뒤로 돌아서 차타누가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폭우가 쏟아져서 길이 진흙밭으로 변했지만 북군의 진격속도는 매우 빨랐다. 24일 오후가 되자, 맥쿡의 선봉대는 리버티 협곡에 상당히 진입했고 남군 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남군의 저항을 만난 북군은 산을 올라 우회하려고 했고 병력이 1개 사단에 불과했던 남군은 후퇴하고 협곡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후버스 협곡에서는 새로 구성된 와일더의 1,500명 기병여단이 선봉에 섰다. 와일더는 협곡 안으로 들어간 후에 보병의 지원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와일더는 협곡으로 돌격해서 남군의 초병을 쫓아냈고 보병과 16km의 틈이 벌어졌다. 

남군 하드(Hardee) 군단은 즉시 대응에 나섰지만 새 기병대가 무장한 7연발 스펜서 소총(그림 참조)의 위력 앞에 물러섰다. 


(우에스기 왈: 연발소총을 사용한다는 것은 전장식과 후장식만큼이나 화력이 차이가 납니다. 스펜서 소총은 탄창이 재미있게도 개머리판 뒷쪽으로 긴 꽂을대를 넣는 개머리판 장전식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는 것 아시죠?)


와일더 기병대가 전멸당할 것을 염려한 레이놀즈(Reynolds)는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와일더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고 버티겠다는 고집을 피웠다. 결국 저녁 7시에 급히 후방에서 포병이 도착했고 2개 여단이 더 도착해서야 격전을 치룬 기병대는 휴식을 취했다. 북군이 3일 동안 전투를 치룰 각오를 했던 협곡을 단 반나절 만에 점령했고 예상되었던 수 천 명의 피해도 피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북군이 진격하고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툴라호마(Tullahoma)에 있는 브래그는 여전히 로즈크랜스의 작전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북군의 기병과 보병이 남군의 좌익인 쉘비빌(Shelbyville)로 계속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연달아 들어왔다. 정작 이상한 것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남군의 우익쪽 협곡에서는 보고가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25일, 우익에서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고 26일이 되어서야 브래그는 우익이 정말로 위험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오후에서야 폴크 군단에게 동쪽으로 달려가서 하디(Hardee)의 어려운 상황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북군과 전투를 벌인 지 3일 만에야 남군 전체가 함정에 빠진 것이 파악되었다. 와일더의 기병여단을 선봉에 서고 토마스 군단이 그 뒤를 바짝 좇아, 이미 맨체스터에 들어온 북군과 합류하기 직전이었다. 

브래그는 폴크와 하디 군단에게 지금의 방어선을 버리고 즉시 툴라호마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툴라호마는 남군이 뭔가를 하기에 상당히 부족한 도시였다. 폭우 속에서 완전히 젖은 병사들이 툴라호마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자, "툴라는 진흙, 호마는 더 많은 진흙"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비속을 뚫고 와일더의 기병여단은 27일 오전에 맨체스터로 들어왔고 토마스 군단이 그 뒤를 따랐다. 28일 새벽에는, 와일더 여단은 내쉬빌 & 차나누가 철도의 지선(branch line)을 파괴해 브래그의 보급선과 통신선을 끊었다. 

브래그는 결정을 못내리고 있었다. 그는 툴라호마에 전군을 집결시켰지만 북군의 공격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북군이 동쪽으로 우회해서 남군과 차타누가 사이를 끊으려고 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림 설명: 상대적으로 풍족한 보급을 받던 북군도 남부 지역을 약탈하며 보급품을 채웠습니다.)


브래그는 장교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지만 폴크와 하디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29일, 북군의 토마스, 크리텐덴, 맥쿡 군단의 일부 부대가 힐스보로(Hillsboro)를 향해 진격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남군의 후방으로 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랜저의 예비군단과 스탠리의 기병군단이 북서쪽에서 툴라호마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6월 30일, 브래그는 툴라호마를 버리고 자연 장애물인 엘크(Elk) 강 너머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7월 1일, 병사들이 겨우 참호를 파고나서야 북군이 우회해서 포위당할 여지가 많은 것이 밝혀져서 다시 한 번 치욕적인 후퇴를 해야만 했다. 

7월 3일, 그는 테네시 강의 도강지점까지 남동진해서 차타누가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얼굴은 거의 시체처럼 보였고 그는 군목에게 "이건 재앙이상 이군요"라며 괴로운 심정을 드러냈다. 


브래그와 달리 기고만장한 로즈크랜스는 7월 3일에 툴라호마로 무혈입성했는데 9일 동안의 작전에서 북군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고 84명 전사, 476명 부상이라는 미미한 피해만으로 테네시 강 중류에서 남군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림 설명: 나중에 자세하게 사진으로 설명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간단하게만 당시 정규군 장비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보병은 전쟁 초기 전장식 구형소총을 사용했고 기병은 상대적으로 화력이 앞선 카빈을 사용했습니다.

총검은 중간처럼 대검을 꽂아 사용한 경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