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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남북전쟁

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 전투 (2부)

by uesgi2003 2013.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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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미국 남북전쟁 (7) - 치카마구아 전투 (2부)


로즈크랜스(Rosecrans)가 그렇게 적은 피해만으로 협곡과 남군의 방어선을 모두 돌파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었지만 북부의 인정을 받기에는 시기가 너무 안좋았다.  1863년 7월 4일, 서쪽의 그랜트가 빅스버그(Vicksburg)를 많은 시도끝에 점령했고 펜실바니아에서는 게티스버그(Gettysburg)를 놓고 남군과 3일동안의 대회전을 벌인 끝에 리의 마지막 모험을 막아내면서 로즈크랜스의 성공은 그저 그런 일로 축소되었다.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고 워싱턴 정가에서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전쟁장관(Secretary of War) 에드윈 스탠톤(Stanton)은 3일이나 지나서야 "리의 군대 격퇴;그랜트 승리...귀관의 귀중한 군대가 이제 반란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차례임. 이 기회를 날릴 생각?"이라는 전신은 보낼 정도였다. 

로즈크랜스는 "장관은 이 귀중한 군대가 미시시피 중류에서 반란군을 몰아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부(War Department)는 이 편지가 피로 씌여졌다는 사실을 알아 줄 것을 병사들을 대신해 청원합니다"라는 냉소적인 답신을 보냈다. 


워싱턴의 모욕에 가까운 종용에도 불구하고 로즈크랜스는 다시 주저앉아서 차타누가(Chatanooga) 공격을 위한 치밀한 계획수립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6주간이나 주저 앉았다. 목표물인 차타누가 근처에서. 

브래그(Bragg)가 지원군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지만 홀렉(Halleck)은 8월 4일에 또 다시 비난을 퍼부었다. "귀관의 부대는 바로 진격해야 합니다. 테네시 강을 건널 때까지 매일 내게 보고하기 바랍니다."

일선 지휘관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로즈크랜스에게 홀렉은 "명령을 즉각 수행하시오"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림 설명: 북군은 전쟁을 치루면서 젊고 뛰어난 지휘관을 많이 얻게 되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존 토마스 와일더입니다. 개전 당시에는 일개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장군까지 오르게 됩니다.

차타누가 전투에서도 와일더 기병여단은 대단한 활약을 보입니다. 기병전력은 그 동안 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놀라운 활약이었습니다. 


결국 8월 6일, 북군은 캠프를 떠났고 툴라호마에서와 같이 남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월든 산등성이(Walden's Ridge)를 지난 후에 북쪽에서 도시를 공격하는 길이 누구나 생각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로즈크랜스는 다시 한 번 기만기동으로 존 와일더(Wilder)의 기병대와 함께 3개 보병여단만 이쪽으로 보냈다. 와일더 여단은 신속하게 움직여 테네시 강 건너에서 차타누가를 포격해 큰 불을 냈다. 와일더 병력만으로는 도시를 공격할 수 없었는데도 브래그는 북군 전체병력이 이미 근처에 와있고 북쪽에서 공격해 올 것으로 믿게 되었다. 

 

브래그의 시선을 엉뚱한 곳에 묶어둔 로즈크랜스는 50,000명의 보병군단과 9,000명의 기병군단으로 구성된 주력군을 차타누가 서쪽 30km에서 테네시 강 너머로 진격시켰다. 9월 4일에 강을 건넌 북군은 다시 우회해서 남군을 남서쪽에서 공격할 계획이었다. 

우회기동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위험한 작전이었다. 50km 가까운 룩아웃(Lookout) 산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래도 제 때에 우회할 수만 있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북군을 만난 브래그가 즉시 북부 조지아로 도망칠 것으로 기대했다.

 

며칠 동안 북군의 의도를 모른 채 속고 있었던 브래그는 북군의 주력이 왼쪽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결국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대를 일부 급히 배치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로즈크랜스가 기대했던대로 총 한 방 안쏘고 차타누가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로즈크랜스는 홀렉에게 "전투없이 차타누가 점령"이라는 승리의 메시지를 보낸 후에 전력을 다해 남군을 추격했다. 맥쿡(McCook)의 20군단에게 룩아웃 산을 넘어  브래그의 배후를 공격시키는 한 편, 조지 토마스(Thomas)의 14군단은 룩아웃 산을 넘어 브래그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고, 크리텐덴(Crittenden)의 21군단은 차타누가를 점령한 후에 도망가는 브래그의 뒤를 좇게 했다.

로즈크랜스는 남군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이며 브래그가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브래그의 남군이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차타누가에서 남쪽으로 33km 떨어진 조지아 라 파예트(La Fayette) 부근에서 군대를 재정비하는 중이었고 시몬 볼리바르 버크너(Buckner)의 8,000명과 존 브렉킨릿지(Breckinridge)의 11,500명이 급히 지원군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뉘어진 북군을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기 위해, 브래그는 토마스 하인드맨(Hindman)에게 북군 선봉대의 측면을 공격시키고 다니엘 하비 힐(Harvey Hill)에게는 정면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일단 선봉 사단을 처리한 후에 토마스 군단의 나머지 병력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놀랍게도 공격적이었던 힐은 부대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을 거부했고 하인드맨도 따라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동안 마구 앞으로 달렸던 북군 선봉사단은 낌새를 눈치채고 후퇴해 토마스 본대에 합류했다.

첫 번째 반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더 이상 쫓겨다니고 싶지 않았던 브래그는 9월 12일에 폴크(Polk)에게 북쪽으로 진격해서 크리텐덴의 군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폴크는 북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두 번의 기회를 날린 브래그는 3일 동안 멈췄다가 65,000명 전체 병력을 크리텐덴 군단을 향해 이동시켰다.

로즈크랜스도 자신의 기대와 달리 남군의 움직임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 맥쿡과 토마스 군단이 서둘러 산맥지대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9월 17일까지 양쪽 군대는 치카마구아 개울로 향하는 길에서 서로 대치만 하다가 결국 서부전역에서 가장 큰 전투를 벌이게 된다.

 

남군과 북군은 치카마구아 개울 양쪽에서 서로 총을 쏘면 맞을 정도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격하고 싶었던 브래그였는데 9월 중순 남군 정예부대가 증원되면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로버트 리의 북 버지니아군 중 최고 정예인 2개 사단이 급파되었던 것이다. 9월 9일 기차에 오른 12,000명은 1,500km를 횡단해 9월 18일에 존 벨 후드의 3개 여단부터 도착했다.

브래그는 후드 여단이 도착하자 마자 즉시 다른 사단과 함께 치카마구아를 건너 전진하라는 명령을 했다. 그는 리 & 고든(Lee & Gordon) 방앗간 근처에 있는 크리텐덴의 21군단의 왼쪽을 공격해 남쪽으로 밀어내 맥레모어(McLemore) 골짜기에 가둘 생각이었다. 계획이 성공한다면 북군의 병력 중 30%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이 브래그가 바라는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존슨 사단은 출발자체가 늦은데다가 북군의 기병여단의 공격을 받고는 제 자리에 완전히 멈춰버렸고 워커 사단은 알렉산더 다리에서 와일더 기병여단의 스펜서 연발소총에 눌려 고전 중이었다.

 

몇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워커 사단은 와일더 기병대를 밀어내고 북쪽 2km 올라가 개울을 건넜고 후드 여단은 존슨 사단 지원에 나서 민티(Minty) 부대를 근처 숲으로 쫓아냈다.

그러나 브래그의 처음 계획과 달리 저녁 때까지 겨우 9,000명의 병력만 개울을 건넜고 나머지 병력이 강을 건너는데 완전히 하루를 허비하면서 북군은 자신의 왼쪽에 큰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로즈크랜스는 크리텐덴에게 왼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한 후에 토마스 군단을 크리텐덴 군단 주변에 배치시켜 좌익을 크게 보강시켰다.

9월 19일 새벽, 토마스 군단의 2개 사단이 라 파예트 길의 켈리(Kelly) 저택에 도착했는데 남군에게서 불과 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전투는 19일 오전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남군 여단이 개울을 건넜다는 것을 보고받은 토마스는 보병 여단을 정찰하라고 내보냈고 오전 8시에 유명한 남군 기병부대인 네이탄 베드포드 포레스트(Forrest) 병력 일부와 마주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군 정찰대가 포레스트를 밀어내고 있는 동안 윌리엄 워커(Walker) 군단의 스테이츠 라이츠 기스트(Gist) 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토마스는 2개 여단을 더 내보내 남군을 상대했다. 

토마스가 계속 증원부대를 보내자 워커도 존 리델(Liddell) 사단을 증원시켜 400명의 포로를 잡고 나머지 북군을 약 3km 밖으로 쫓아냈다. 


남군의 압박을 받던 토마스의 14군단의 2개 사단, 네글리(Negley)와 레이놀즈(Reynolds) 사단은 아직 크리텐덴 군단 근처에서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토마스는 로즈

크랜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맥쿨 군단의 존슨(Johnson) 사단이 라 파예트 도로를 따라 급하게 이동했다. 새 병력을 받은 토마스는 브래넌(Brannan) 사단과 함께 남군 리델에게 반격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했다. 

이제는 거꾸로 워커가 도움을 요청해야 할 판이었다. 벤자민 치썸(Cheatham)이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놈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자, 얘들아"라고 외치면서 토마스 군단에게 달려들었다. 

2시간 동안 치썸 사단은 브로더톤(Brotherton) 도로 근처에서 북군을 두들겼지만 존슨과 팔머(Palmer) 사단의 반격을 받으면서 맹렬한 기세는 한 풀 꺾였다. 


더 많은 사단이 전투에 휘말리면서 이제 전투는 승부를 건 대회전으로 변했고 강변에는 죽은 병사와 말의 시체가 1km 가깝게 널려있었다. 

북군 여단장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비정상적인 전투로 마치 게릴라 전투를 엄청난 스케일로 치루면서 이 사단이 저 사단을 찾아다니며 전투하는 모양새"였다.

오후 2시가 되자, 브래그는 전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알렉산더 스튜워트(Stewart) 사단을 내보내 큰 피해를 입은 치썸 사단을 대신해 공격하게 했다. 

남군 특유의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 스튜어트 사단은 투입되자 마자 호라티오 반 클리브(Cleve) 사단을 밀어내며 북군 토마스 군단과 크리텐덴 군단 사이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북군 전열의 중심이 끊어졌지만 남군은 그 상황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네글리와 레이놀즈 사단이 반 클리브 사단 바로 뒤에서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레이놀즈 사단은 그 자리에서 급하게 전열을 만들고 20문의 대포를 가져와서 스튜어트 사단을 근처 숲으로 쫓아냈다. 

브래그는 전면공격을 시도할 때인데도 사단을 하나씩 투입하고 있었다. 존 벨 후드(Hood)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조바심을 내다가 오후 4시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