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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1차대전 러시아의 대공세 - 브루실로프 작전 (1부)

by uesgi2003 2013. 4. 14.


1차 대전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제 자신이 1차 대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서인데, 지리한 참호전과 자동화기 앞의 무모한 돌격 등이 싫어서 그럴 겁니다. 


이번 이야기는 러시아가 1916년에 시도했던 공세로 만약 1년만 더 일찍 시도했더라면 1차 대전의 흐름을 그리고 러시아 역사도 바뀌었을 이야기입니다. 러시아에 대해 연거푸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국내에 러시아 역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은 적을 지 몰라고 반드시 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브루실로프(Brusilov)의 대단한 공격


1916년 6월 4일 새벽, 1,770문의 대포가 프리페트 습지대(벨라루스 남부와 우크라이나 북부의 여러 주에 걸쳐 있는 광활한 침수지역)부터 루마니아 국경에 이르는 320km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부전선을 두들기면서 러시아의 예비포격이 시작되었다. 6시간 동안만 포격을 가해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짧은 양이었는데 몇 주 후에 있을 솜므 전투에서는 7일 동안이나 포격전이 벌어졌었다. 그래도 예비포격은 적의 철조망을 토막내고 전방 참호, 기관총 진지와 대피소를 부술 정도로 잘 조준되었다. 0시에, 러시아 보병이 적의 전선 근처에 있던 참호에서 뛰어나가 구멍난 철조망 사이를 통과했다. 그리고는 아직 정신을 못차린 적을 완벽하게 기습했다. 

러시아 제국군이 1차대전에서 시도했던 가장 성공적인 공세의 시작이었다. 3개월 동안 32km 깊이의 구멍을 내며 450,000명의 포로를 잡았고 250,000명의 피해를 입혔다. 이 공세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거의 KO 직전 상태까지 몰았다. 러시아 남서부 집단군 사령관인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기획한 이 작전은 브루실로프 공세라고 부르며 러시아에서는 브루실로프의 돌파라고 부른다. 


러시아군은 독일이 전쟁을 선포한 1914년 8월 1일 이후 복잡한 상태였다. 그 해 9월에 있었던 탄넨베르크(Tannenberg)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었다(사진 참조. 전투 후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공격을 당한 프랑스가 제2 전선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자 차르 니콜라스 2세는 우선 급한대로 2개 군을 동 프러시아로 보냈었고 러시아 제 2군이 전멸당했다. 탄넨베르크의 참패는 니콜라스 대공이 남서쪽 갈리시아(오스트리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부코비나(현재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방향으로 공세에 나서서 렘베르크아 '오스트리아의 지브랄타'로 알려진 프르제미슬 요새를 점령하면서 어느 정도는 되갚았다.

오스트리아군이 산맥을 통해 헝가리 평원에 들어서려는 러시아군을 막으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15년 5월, 오스트리아-독일군의 고를리체-타르노우(Gorlice-Tarnow) 공세가 벌어지며 러시아군은 400,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고 크게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리가에서 루마니아에 이르는 1,200km 전선이 고착되었다. 독일은 북부 절반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남부 절반의 전선을 유지했다. 탄넨베르크의 대승을 일궈낸 폴 힌덴베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러시아군이 휴전을 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총사령관 에리히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베르덩(Verdun)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합군 전선에는 1915년 5월에 이탈리아가 합세했지만 모든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조세프 조프리는 12월 8일에 연합군 회의를 소집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솜므에서 이탈리아는 알프스에서 7월 대공세를 펴기로 결정했다. 1915년에 입었던 막대한 피해때문에 러시아는 전선유지만 맡았다. 


독일은 1916년 2월 21일에 베르덩에서 선공을 퍼부어 연합군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차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러시아군은 상처를 채 회복하기도 전에 빌나(Vilna) 지역의 나로치 호수를 공격했지만 봄 진흙밭에서 멈추며 110,000명을 잃었다. 독일군은 10,000명의 피해만 입었지만 그래도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얻었다. 루덴도르프는 러시아군 포격의 강도에 크게 놀랐다. 


심지어 연합국도 모르게 러시아는 병력을 새로 모으고 있었다. 새 전쟁상 알렉세이 폴리바노프의 지휘 아래 신병과 장비가 속속 전선에 도착했다. 포탄 생산은 월 100,000개에서 800,000개로, 개인화기 탄약은 월 6,900만 개에서 8,500만 개로 늘었지만 대형포탄은 여전히 부족했다. 더 많은 포와 탄약을 수입했고 잡다하기는 해도 소총만큼은 모자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노획한 오스트리아 소총으로 2개 군을 완전무장하고도 남아 50,000 정이 창고에 남겨졌다. 러시아의 마르지 않는 인력동원 덕분에 60개 군단이 만들어져서 전쟁 개시 당시의 35개 군단보다 훨씬 늘어났다. 

144개 장교양성 학교에서 4개월 과정으로 장교를 양성하며 전방의 손실이 바로 메워졌다. 윈스턴 처칠은 자서전 세계의 위기(The World Crisis)에서 "러시아가 1916년에 보여준 부활만큼 인상적인 일도 없다"라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유능한 대공 니콜라스를 제치고 자신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바보 짓을 했던 차르는 1916년 4월 14일에 모질레프 사령부에서 회의를 소집한 후에 러시아의 계획을 수립했다. 참모장 미하일 알렉세이에프, 3개 집단군 사령관 알렉세이 쿠로파킨(북서), 알렉세이 에베르트(서), 브루실로프(남서) 장군이 회의에 참석했다.


브루실로프(사진참조)는 1개월 전에야 우유부단한 니콜라이 이바노프를 대신해서 제8 군의 남서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었다. 그는 63세였지만 힘이 넘치는 지휘관이었다. 코카서스 티플리스에서 태어나 1877년에는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중위로 참전했었다. 능력을 입증하며 승진한 그는 상 페테르스부르크 기병학교 교장을 맡았다가 군단과 군 사령관으로 호출되었다. 그는 러시아 전사에서 치욕스러웠던 1904-5년의 러시아-일본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었다. 그는 일반 병사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훈련과 처우에 신경썼다. 예를 들어, 그는 루블린 시립공원 입구에서 '병사와 개는 입장불가'라는 안내문을 보고 제한조치를 풀었다. 러시아 장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전선을 갑자기 방문해서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지를 확인하곤 했다. 1914년 12월, 그는 제45 시베이라 연대의 15 중대를 방문해서 2일 동안 더운 음식을 못 먹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장교를 혼내고 앞으로 이런 대우를 하는 장교는 처벌하겠다고 엄중 경고했다. 


모질레프 회의에서, 알렉세이에프는 에베르트의 서부 집단군이 나로치 호우 남쪽의 몰로데치노에서 빌나 방향으로 전면공격을 하고 쿠로파킨의 북서 집단군이 지원공격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쿠로파킨은 러시아-일본 전쟁에서 패전했던 지휘관이었지만 차르가 선호하는 지휘관이었다. 병력이 2.5배나 많았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집중포화때문에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브루실로프는 긍정적이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는 러시아군이 전체 전선에 걸쳐서 공세를 취해야 적이 우월한 철도를 이용해서 병력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한다고 믿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숫자가 러시아군보다 적었지만 러시아군이 공격하는 지점에서는 항상 병력이 많았다. 브루실로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병력을 그 자리에 못 박아 두어서 쿠로파킨과 에베르트의 어깨를 가볍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비부대와 중포는 모두 쿠라파킨과 에베르트 방향으로 돌리기 때문에 지원병력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조건으로 승인받았다. 


차르 니콜라스도 조용히 알렉세이에프의 결정에 동의했다. 회의가 끝나자 한 장군이 브루실로프에게 그가 나설 자리가 아닌데도 일부러 위험한 임무를 맡아서 이름만 높이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브루실로프는 명성에는 관심이 없으며 러시아를 위해 공격에 나설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장군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나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그리고는 가버렸다"라고 회고했다. 


브루실로프는 4명의 군 지휘관을 소집했다. 알렉세이 말레딘(최북단의 제8 군), 블라디미르 사카로프(제 11군), 디미트리 쉬체르바쵸프(제 7군), 알렉산드르 크리모프(제9 군). 각 군 스스로가 공격 지점을 고르게 했다. 20~30개의 서로 다른 지점으로 돌파하는 공격을 받는 적은 다음 공격이 어디가 될 지 모를 것이다. 적의 예비병력이 분산되면, 브루실로프 주 공격로는 루츠크(Lutsk)를 향해 북쪽에서 움직일 예정이었다. 

만약 9군이 남쪽에서 성공한다면 그 당시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루마니아를 연합군 측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5월 23일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야 하고 전군에는 전신으로 공격시작 명령을 받게 되어 있었다. 


지상에서는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브루실로프의 비행기는 적의 방어체계를 사진촬영했다. 그 정보는 큰 지도로 만들어져서 오스트리아군이 가지고 있는 지도보다도 더 정확하게 만들어졌다. 병력은 뒤에 숨겨두고 지휘관들은 최전선을 오가며 공격할 지형을 익혀두고 있었다. 포 관측병도 최전방에서 기관총 진지, 대피소,

구멍을 낼 철조망 등의 목표물을 정확하게 등록했다. 러시아 공병은 밤에만 작업을 하며 참호를 오스트리아 전선에 100m 지점까지 파들어갔다.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1km 거리를 두고 3개의 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각 방어선마다 50m 간격으로 3개의 참호가 잘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철조망 20줄이나 얽혀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여우구멍이라고 부르는 깊은 대피소도 가지고 있었다. 목재나 철근을 지지대로 세우고 지하 몇 미터 밑으로 파고 들어간 대피소는 직격탄이 아니고서는 부술 수가 없었다. 대피소의 치명적인 단점은 입구가 너무 좁아서 포격으로 막히기 쉽고 한꺼번에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없었던 겨울동안 방어선을 두텁게 보강했지만 방어선이 두터워지는 만큼 오스트리아군의 집중력도 떨어졌다.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병사들이 훈련보다 파는 일에 집중했다"라고 인정했다. 일부 고위 장교는 가족을 데리고 오기까지 했고 제 4군의 지휘관이었던 대공 조세프 페르디난드는 루츠크 사령부에서 파티를 열고 소풍을 가고 심지어 스티르 강을 따라 보트놀이를 하기도 했다. 


브루실로프는 정찰병을 통해 독일군은 3개 사단, 오스트리아-헝가리는 38개 사단의 총 480,000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대부분의 예비부대, 중포와 비행기는 5월 15일에 있을 트렌티노 공세를 위해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출된 것도 알아냈다. 브루실로프는 40개 사단 510,000명을 가지고 있었고 공격에 반드시 필요한 수비병력의 2배에는 한참 모잘랐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격은 하지 않기로 했다. 5월 23일, 4개 군이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알렉세이에프는 언제 브루실로프가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지를 물어왔고 "1주일 후면 시작됩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가 도움 요청을 해왔기 때문에 차르는 병력을 보내고 싶어했다. 블루실로프는 에베르트가 6월 1일에 공격한다면 그 때까지 작전을 미루기로 했다. 5월 25일, 알렉세이에프는 에베르트의 준비가 미흡하기 때문에 6월 4일까지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더 이상의 지연은 없다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알렉세이에프는 6월 3일에 여러 전선을 동시에 공격하는 작전 대신에 한 곳에 집중시키라고 명령했다. 브루실로프는 차르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깨울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분노가 치민 브루실로프는 "차르의 잠자리따위는 상관없어"라고 소리쳤다. 알렉세이에프는 "알았소. 신이 당신을 축복하기를 바라오.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답변했다. 이 정도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눈부신 성공을 거둔 작전은 없었다. 


브루실로프는 적을 제자리에 못박아둬서 주력이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전략목표를 정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대성공을 거둘 지 몰랐기 때문에 아까운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작전은 6월 4일에 무력정찰과 함께 시작되었다. 독일의 힌덴베르크는 나중에 "브루실로프는 마치 벽을 두드리며 어디가 단단하고 어디가 비어있는 지를 알아내려고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곧 약점을 찾아냈고 전사가 바실 리델 하라트가 "여호수와가 나팔을 불자마자 여리고(Jericho)가 무너진 이후에 이렇게 놀라운 작전성공은 없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공을 거뒀다. 

브루실로프의 치밀한 포격준비는 올리카(Olyka)의 오스트리아 방어선에 30km 정도의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조세프에게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맹렬한 포격으로 우리 전선의 병사들은 대피소에서 흙에 파묻혀 버렸고 예비병력은 전선에 투입되기도 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엄청난 포화는 막강한 철조망 방어선을 파괴했고 독가스를 내뿜는 고폭탄이 마른 날씨와 어울려서 눈을 뜨거나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보고가 들어갔다. 


러시아군이 침투한 곳은 물론이고 공격을 당하지 않은 곳도 어쩔 수 없이 밀려나며 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체코와 다른 슬라브 군대은 같은 슬라브 민족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마구 항복했다. 그나마 제대로 버티던 부대도 마구 후퇴하는 부대와 섞이며 무너져내렸다. 러시아군은 정교한 방어선을 관통해서 루츠크를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루츠크를 내려다 보는 크루피 고지는 헝가리 부대가 꼼짝도 않고 버텼지만 오스트리아 10군단이 물러나면서 무너졌고 루츠크도 6월 8일에 함락되었고 러시아군은 출발점에서 40km 떨어진 스트리 강을 건넜다. 며칠 후면 스토크호드(Stokhod) 강을 따라 다음 전선이 있는 40km를 더 진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 황제군입니다. 1-보병, 2-포병 장교 3- 기병 4/5-코사크 6- 보병 사관 7- 장군 8-기병 장교 9-보병 장교 10- 보병 사관. 큰 그림으로 보세요)


6월 9일까지,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73,040명의 포로를 붙잡고 94문의 포, 179정의 기관총과 53문의 박격포를 노획했다.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곳은 루츠크 아래의 스티르 강 만곡부에 있는 콜키(Kolki) 뿐이었다. 여기는 남서와 북남 철로가 교차하는 중요한 코벨(Kovel) 철도 중심을 방어하는 곳으로 여기만 점령하면 북쪽에서 오는 독일군 구원군을 막을 수 있었다. 브루실로프는 칼레딘 장군을 재촉해서 서쪽방면으로 방어태세로 전환하고 코벨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그는 블라디미르 볼린스키를 향해 반격이 거의 없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해서 결정적인 기회를 잃었다. 


제 9군은 오스트리아의 제 7군을 밀어내며 20,000명을 사로 잡았다. 오스트리아 지휘관은 병석에 누워 지휘를 계속 했는데 명령체계에 혼선이 생기면서 수송대는 남서쪽으로 후퇴한 반면에 전투부대는 다른 방향으로 이동해서 엉뚱한 도로에서 발목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