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서 다시 이야기가 늘어질 수 있는데, 얼마나 자세하게 정리를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늘어지니까 프로호로프카는 나중에 따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중앙집단군의 북쪽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고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런 책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거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프로호로프카 전차전 이야기 때에 그림 몇 장만 인용해야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원서자료가 워낙 많아서... 책 한권을 잡아서 정리하게 되면 다른 책들은 참조할 여유가 없게 됩니다. 도대체 왜 샀는지...
어쨌든 이번 이야기는 워낙 지루하게 진행이 되어서 모처럼 관련자료를 스캔했습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잘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남부집단군의 이야기는 가장 왼쪽의 48전차군단, 중앙의 2 SS 전차군단, 오른쪽의 제3 전차군단(켐프 특수군)의 상황이 반복되어 오가기 때문에, 이것을 잘 기억해두지 않으면 상당히 지루한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는 무슨 사단, 무슨 지휘관 외우고 심취하던 나이가 지나서, 부대 이름과 지명이 나열되는 이번 이야기는 저도 지루합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2부)
7월 8~9일 동안 최고사령부는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 전차군의 593대의 전차와 37대의 자주포에게 속력을 더 내서 프로호로프카로 이동하고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자도프의 제5 근위군도 보로네즈 전선군의 지휘하에 들어갔고 2개 근위보병군단에게 프셀강을 따라서 오보얀에서 프로호로프카 사이에 정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자도프의 80,000명이 제대로 정열하려면 며칠이 걸릴 일이었다.
바투틴은 보로네즈 전선군 내부의 전열도 가다듬어서 오보얀 도로를 따라 방어선을 펼치게 했다. 재배치를 통해 카투코프의 제4 전차군은 10과 5근위전차군단을 보충받게 되었다. 두 군단은 7월 10일에 제1 전차군의 오보얀 도로 방어를 돕거나 페나강을 따라서 독일 48전차군단의 왼쪽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카투코프에게 전차, 보병 그리고 보급품이 우선 보급되었다.
독일쪽에서는, 호트도 가만히 놀고 있지 않았다. 48전차군단의 왼쪽을 노리는 위협을 일소하기로 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제3 전차사단과 제332 보병사단이 서쪽의 러시아군을 처리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일부와 제11 전차사단이 오보얀으로 계속 진격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다면 측면노출로 위협받고 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주력은 계속 북쪽으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왼쪽을 위협하는 러시아군의 전력은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중요한 지도입니다. 오늘과 다음 이야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니까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부대의 위치 정도는 잘 파악해두시기 바랍니다.
2 SS 전차군단은 토텐코프, 라이브스탄다르테 사단과 함께 북쪽을 공격하는 동안, 다스 라이히와 제167 보병사단이 리포이비-도네츠강을 따라 프로호로프카까지 동쪽 측면을 엄호하기로 했다. 쿠르스크 공격은 하우저의 전차와 돌격포 283대에게 맡겨졌다. 만슈타인은 이 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항공기를 모두 동원했다.
7월 9일, 48전차군단의 목표는 노보셀로프카였고, 여기는 3기계화군단과 제67 근위보병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베르호펜에는 오전에 함락되었고 수비군은 독일군의 추격에 궤멸되었다.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꽤 좋은 편이었다.
...스투카가 적의 기갑부대와 보병집결지로 보이는 곳을 폭격했다. 급강하 폭격기가 연달아 러시아 전차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했다. 불기둥이 솟구칠 때마다 전차병이 '공산주의의 천국'으로 보내졌다. 환상적인 공중엄호를 받으며 기갑정찰대대가 260.8 지점으로 접근했다. 관측에 따르면 제11 전차사단이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 아군 전차는 적의 전차 집결지(제86 전차여단)에 뛰어들었지만 2.5km~3km 거리였다. 전차전이 벌어졌고 스투카가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고지 243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지평선에는 연기와 불길을 내뿜는 적의 전차가 가득했다. 유감스럽게도 제6 중대의 전차 3대가 파괴되었다. 이후 교전에서 노보셀로프카 마을의 대전차 진지까지 진격했고 고지에 도달했다.
방어선을 돌파당한 후에 항복하는 러시아군 전차병입니다. 전차는 격파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사진은 모두 커집니다.
제3 전차사단의 상황은 많이 좋지 않아서 사단장이 계획을 바꿔야했고 그로스도이칠란트는 그 다음 며칠 동안 러시아 6전차군단과 치열을 전투를 벌이게 되어 48전차군단이 오보얀으로 돌파할 귀중한 전력을 잃게 되었다. 바투틴은 자신이 놓여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서쪽 측면에 급하게 병력을 배치시켜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제3 전차사단과 지원 보병이 합쳐져서 오보얀으로 한꺼번에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다.
7월 10일이 되자, 그로스도이칠란트와 제10 전차여단의 전력은 30대의 판터를 포함해 전차와 돌격포 87대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제3 전차사단과 함께 러시아 6전차와 3기계화군단의 교차지점을 공격했다. 제11 전차사단만으로 오보얀으로 향해야 할 판이었다.
... 제200과 112 전차여단이 베레조프카 북쪽 지역에서 분리되어 고립된 채로 하루 종일 적의 전차와 보병을 상대했다. 밤에만 6전차군단의 본대와 연결할 수 있었다. 7월 10일 전투 결과, 6전차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35대의 전차와 10대의 자주포만 움직일 수 있었다. 군단은 노보셀로프카와 노벤코에 수비선으로 후퇴해서 방어선을 절반으로 줄였고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48전차군단은 오보얀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6전차군단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그렇더라도 군단은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전장에 불타고 파괴된 수 백의 전차와 수 천 명의 병사시체가 남겨졌고 적은 우리를 몇 km 후방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노벤코에 마을을 점령하고 북으로 진격하지는 못했다. 아군의 조직적인 방어와 어둠덕분에 적은 더 이상의 공격을 멈췄다...
7월 11일, 48전차군단장 크노벨스도르프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그로스도이칠란트를 기다리는 제11 전차사단은 멀리 프셀강 계곡이 보였다. 쿠르스크로 향하는 마지막 자연 장애물이다. 푸른 들판과 오보얀의 탑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오보얀이 목표다.
겨우 18km 거리밖에 안 남았다. 평상시같으면 기갑군에게 아무 것도 아닌 거리다. 48전차군단이 해낼 수 있을까?
호트가 신중하게 계산한 시간표에 따르면, 48전차군단은 오보얀으로 공격해 들어가 프셀 도하지점을 점령해야 한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선회해서 쿠르스크로 전진할 예정이다. 하우저의 SS 전차군단과 합류해서 프로호로프카 너머에서 접근하고 있는 적의 전략기갑군을 분쇄시켜야 한다. 그것이 호트의 계획이다...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점령한 SS 사단병입니다. 상당히 커집니다.
이제 2 SS 전차군단의 상황이다. 7월 9일 토텐코프가 측면엄호에서 완전히 풀려나면서 다스 라이히와 라이브스탄다르테 뒤로 선회했다. 두 사단은 나란히 옆으로 진격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3기계화군단과 31전차군단을 코페로프카로 밀어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북쪽에 있던 토텐코프는 프셀강변에 도착해서 크라스니 오크티아브르 마을을 점령했다. 이 마을 점령은 쿠르스크 앞의 마지막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뜻이며 프셀강을 건너게 되면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배후로 돌 수 있게 된다. 제11 전차사단과 연결된 라이브스탄다르트 사단은 솔로틴카강을 건넜지만 러시아 10전차군단의 저항을 만났다.
중앙에서의 성공과 달리 동쪽의 3전차군단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제6 전차사단이 멜리호보 근처에 집결해서 북쪽을 정찰하는 동안 제7 전차와 19 전차사단은 북부 도네츠강의 동쪽을 지키고 있었다. 켐프 특수군은 귀중한 전차전력이 코로차로 진격해서 로트미스트로브의 제5 근위전차군을 요격할 수 있도록 엄호해줄 보병전력을 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호트는 공중정찰로 북동쪽에서 대규모 기갑군이 몰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쿠르스크로 진격하기 전에 프로호로프카에서 대규모 지원군부터 상대하기로 결정했다.
흥미로운 사진입니다.
전차의 내구성때문에 장거리 이동 시에는 철로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매서워서 러시아 전차군이 전차로 직접 달려오는 중이었습니다.
휴식 시간 중에 전차의 궤도를 확인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동차 타이어를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7월 9일 저녁늦게 2 SS 전차군단에게 방향을 바꾸라는 프로호로프카 명령이 내려졌다. 라이브스탄다르트가 프셀강의 오른쪽에 토텐코프가 왼쪽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해 프로호로프카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스텝 특유의 짧은 밤시간 동안에 러시아군과 독일군은 위치를 조정했다.
그러나 정작 쿠르스크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을 사건은 동부전선이 아닌 이탈리아 지중해의 시실리에서 일어났다. 연합군이 7월 10일에 시실리에 상륙해서 히틀러의 취약한 남부를 노렸다.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흔들렸다. 1차대전에서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났다. 양쪽 전선의 전쟁은 결국 질 수 밖에 없다는 경험이었다. 히틀러는 가용전력이 이미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어디가 더 중요한 지를 판단해야 했다.
히틀러는 7월 10일에 남부집단군에게서 좋은 소식을 받았다. 토텐코프는 어려움 속에서도 프셀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라이브스탄다르테는 53대의 전차와 23문의 대전차포를 부수며 고지를 점령했고 다스 라이히도 측면을 엄호할 보병이 없는데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받은 히틀러는 성채작전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바투틴의 관점에서는 패잔병을 수습하며 전열을 정비하는 동안에 공격을 받은 불행한 소식이었다. 10전차군단, 2전차군단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밤이 되자 제5 근위군의 선봉대인 제9 근위사단이 프로호로프카 부근에 도착했다. 보급과 휴식이 필요했지만 바로 프로호로프카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7월 10일에는 더 많은 제5 근위군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제95와 97근위보병사단이 프셀강을 따라 만신창이가 된 51과 52보병사단을 보강했고 제5 근위전차군이 도착하면서 2근위전차군단은 측면공격임무에서 벗어나 보급을 받고 제5 근위군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위기에도 불구하고 패주하는 기갑군과 보병을 계속 재배치시키면서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게 지킨 결과였다. 만약 방어선이 붕괴되었다면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던 제5 근위군과 5 근위전차군은 독일군 포격과 타이거의 장거리 전투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제5 근위전차군 로트미스트로프는 바투틴을 만났다. 그는 프로호로프카를 연필로 가르키며 "적은 오보얀을 통해 쿠르스크로 진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력을 프로호로프카로 돌릴 것이다. 거기에서 2 SS 전차군단이 집결하고 48전차군단, 켐프 특수군과 함께 공격해 올 것이다. 귀관의 전차 근위병으로 SS 사단을 상대하기로 했네. 2개 전차군단을 보강해서 제5 전차근위군으로 적에게 반격할 것이다."
타이거와 페르디난트 중전차에 대해 염려하는 바투틴에게 로트미스트로프는 "두 전차는 강력한 전면장갑과 88mm 포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76mm 포인 아군전차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근접전에서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T-34의 기동력을 살려 측면장갑을 노려야 합니다. 전차 육박전을 벌여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바투틴은 로트미스트로프에게 2전차와 2근위전차군단을 증원해주면서 "7월 12일 오전에 제1 전차군과 제5 근위군과 함께 프로호로프카 남서쪽의 적을 궤멸시키고 전선을 회복시키게"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5 근위전차군의 출발지점은 15km 정도 트인 평원이었고 초전부터 5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제5 근위전차군의 편성입니다.
아마 깊게 공부하시는 분에게는 귀중한 자료일 겁니다.
7월 11일 05:00시에 SS사단이 먼저 선공을 취했고 라이브스탄다르테 전차가 프로호로프카 도로 양쪽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최소한 남부집단군의 진격로 앞의 하늘만큼은 지배했던 루프트바페가 다시 한 번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며 러시아 수비선에 구멍을 내기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바닥난 2전차군단이 뒤로 물러났고 지원군의 엄호를 받은 라이브스탄다르테가 제9 근위공수사단에게 돌격해들어갔다.
러시아군 방어선의 요충지는 고지 252.2로 이 지역에는 이미 엄청난 폭탄, 로켓, 포탄이 쏟아진 후였다. 3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언덕을 점령하고 오크티아브르스키 집단농장도 곧 점령할 기세였다.
... 오크티아브르스키 집단농장, 고지 252.2와 루토보 마을이 작렬하는 폭탄으로 흔들렸다. 병사들은 지난 밤에 파두었던 참호 속에서 다가오는 적을 침착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농장까지 몇 백 미터 앞으로 전진한 병력수송장갑차에서 보병이 쏟아져나왔다. 자동소총을 쏘며 전차 뒤로 숨은 적들이 공격해왔다. 파시스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그 놈들이 술을 먹고 날뛰는 것이 분명했다.
포대 지휘관의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제3 대대의 일제사격이 파시스트에게 쏟아졌다. 중기관총이 적의 옆을 갈겨댔고 사단 포와 제3 포병침투사단이 집단농장 앞 들판을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포탄을 퍼부었다. 대대와 연대포도 직격탄을 날렸다.
14:00시까지 파시스트가 두 번 더 공격해왔지만 무력정찰이었을 뿐이다...
... 14:00시에 100대의 전차와 연대급 보병이 장갑차를 타고 집단농장과 고지 252.2를 공격해왔다. 전차 40대와 기계화보병 연대가 옆의 제287 근위보병연대도 공격했다. 제95 근위와 제9 공수사단의 연결점을 찾은 파시스트는 그 틈을 노렸다. 3km 정도의 방어선을 140대의 전차가 공격해왔다. 그리고 50대의 급강하폭격기의 공습이 먼저 있었다.
다시 한 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적의 전력이 워낙 압도적인데다가 연결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라이브스탄다르테는 측면이 노출되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프로호로프카 앞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러시아 2전차군단의 방어선은 단절되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방어선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미리 정한 29와 28 전차군단의 집결지를 돌아볼 것을 권했다. 프로호로프카에서 벨레니히노까지 윌리스 짚(렌드리스로 받은 미군 짚)을 타고 돌았다. 부상병을 실은 수송차가 우리 옆을 느리게 지나갔다. 파괴된 트럭과 수송차가 도로 옆에 흩어져 있었다.
군단 전차가 집결할 숲의 북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집단농장이 2km 정도 밖에서 보였다. 갑자기 원수동지가 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문을 열고 몇 발자욱 걷지 않아서 전차의 엔진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잇었다. 바로 쌍안경을 들어 10대의 전차가 전투대형으로 포를 발사하며 들판을 건너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군동지, 저건 우리 전차가 아니오. 적이 어딘 가를 돌파한 모양이군. 우리를 선제공격해서 프로호로프카를 점령하려나 보군.' 나는 원수동지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죠'라고 대답하고 키리첸코 장군에게 2개 전차여단을 바로 투입해서 적의 진격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우리가 선택한 출발지점이 이미 적에게 넘어갔다...
2 SS 전차군단의 편성과 전력입니다. 필요없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귀찮아서 이대로 올립니다.
2 SS 전차군단은 적의 반격에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99대의 전차와 29대의 돌격포를 잃었고 라이브스탄다르테는 60대의 전차, 10대의 돌격포, 20대의 자주포가 전부였다. 남은 60대의 전차에는 타이거가 고작 4대뿐이고 심지어 2호 전차(4대), 3호 전차 (5대) 그리고 노획한 T-34도 10대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4호 전차였다.
하우저는 다음 날 작전에서 라이브스탄다르테 게 공격의 주공을 맡으라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다스 라이히 사단은 오른쪽에서 남쪽 길을 열고 켐프 특수군의 3전차군단은 가능한 지원을 모두 하다가 프로호로프카에서 2 SS 전차군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하우저의 군대에게 달려드는 러시아군을 가능한 한 유인하기로 했다.
남부집단군 작전의 마지막 단계는 48전차군단이 프셀강의 도강지점을 장악하고 프로호로프카를 점령하면 두 전차군단이 스텝을 너머 오보얀과 쿠르스크로 전진하며, 3전차군단은 동쪽 측면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바투틴과 로트리스트로프는 이것만은 피하기 위해 병력을 신속하게 전개했다.
독일군의 공격에 놀란 로트미스트로프는 오전 08:30시(모스크바 기준)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출발점은 프로호로프카 바로 외곽이었다. 공격의 주력은 29전추군단으로 19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보유했고 제1529 자주포연대의 자주포 21대가 가세했다. 그리고 120대의 전차를 보유한 2근위전차군단이 다스 라이히를 공격하기로 했다. 228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가진 5근위기계화군단은 예비병력으로 남겨두었다.
모두 합쳐서 430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투입되며 70대가 더 증원될 예정이었다. 전력 중 T-70과 같이 큰 도움이 안되는 경전차가 많아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전속력으로 적의 대형 안으로 뛰어 들라는 당부를 해두었다. 장거리에서 피해를 입더라도 수로 밀어붙이고 특히 타이거 전차 옆에 붙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7월 12일 02:00시까지 로트미스트로프의 부대는 반격준비를 마쳤다. 이동 중에 보급을 받고 수리를 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승리를 눈앞에 둔 SS 보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뒤에 러시아군 포로 3명이 있는데 그들의 분위기도 쾌활합니다.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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