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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4부)

by uesgi2003 2013. 7. 13.


이제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편 중 모든 작전중단 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지휘관인 남부집단군의 만슈타인은 원래 러시아군의 공격을 유도한 후에 반격으로 섬멸하자고 했었죠. 스탈린그라드의 대위기를 벗어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B안처럼 협공을 한다면 5~6개월 전에 독일군도 준비안되었지만 러시아군은 더욱 준비가 안되었을 때에 대규모 기습형태로 협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역사에서 결과론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히틀러의 패착이 너무 컸던 점을 감안하면 만슈타인의 안이 훨씬 합리적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여전히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다고 집착했고 만슈타인은 러시아를 이기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한 도시나 지점보다는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영토를 무대삼아 스케일큰 액션을 펼치려고 했고 독일군의 가장 큰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 설명했듯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술적으로는 무승부, 전략적으로는 대승을 거둔 러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까지 공격해들어갑니다. 독일군은 영미연합군 폭격세례를 막느라 동부전선의 하늘을 완전히 비웠고, 시실리와 노르망디 상륙 후에는 동부전선의 정예사단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면서 러시아군이 골라서 공격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쿠르스크에서 입은 기계화전력과 보병병력의 피해가 도저히 보충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스캔한 자료를 인용하기 때문에 클릭하면 커집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3부)


1943년 7월 13일은 제3 제국에게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과 클루게를 동프러시아의 사령부로 호출했다. 영미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에 이어 남유럽 어딘 가를 다시 노릴 수 있게 되었고 남부집단군과 중앙집단군 사령관에게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 그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발칸반도에 사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에서 펠로폰네스로 제1 전차사단을 이동시키는 것 말고도 쿠르스크 전선에서 병력을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성채작전을 중단할 수 밖에 없소,,,


그렇지만 히틀러도 러시아의 쿠투조프 작전이 걱정될 수 밖에 없었다. 모델의 제9 군은 20,000명의 병력과 많은 전차를 잃었다. 클루게는 총통의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했지만 만슈타인은 성채작전을 계속 이어가서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격 가능성을 아예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의견에는 호트와 켐프도 동의하고 있었다. 



지난 이야기에서도 잠깐 나왔던 쿠투조프 작전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쿠르스크 북쪽의 서부 전선군과 브리안스크 전선군이 오렐을 목표로 모델의 제 9군을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남부집단군이 러시아군 방어선과 예비병력을 모두 돌파하려고 하자 다른 전선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여서 국면을 전환시키는 좋은 작전입니다. 이 지도는 커지지 않습니다. 


작전성공을 눈 앞에 둔 만슈타인은 제5 SS 뷔킹(바이킹) 기갑척탄병 사단과 제23 전차사단을 하르코프 부근으로 이동시켜두고 투입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단이 주축인 24전차군단은 104대의 전차와 7대의 돌격포를 가지고 있어서 잠시 주춤했던 전황에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이 적군의 전략 예비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고록을 보면, 러시아군의 피해는 독일군에 비해 4배나 컸고 예비군이 모두 투입된 상태였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요지부동이었다. 성채작전을 반드시 중지되어야 했다. 마지못해 그는 남부집단군이 단독작전으로 적의 예비군을 섬멸해 반격 가능성을 제거해도 좋다고 양보했다. 만슈타인은 러시아군이 당분간 어떤 공세도 펼치지 못하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서 들어온 보고는 복잡했다. 프로호로프카 지역에서는 전투가 지지부진했다. 2 SS 전차군단은 이제 (4대의 타이거와 12대의 T-34 포함) 250대의 전차와 돌격포만 남았고, 토텐코프는 제10 근위기계화여단과 제24 근위전차여단의 공격을 받고 있어서 더 이상 진격할 상황이 아니었다.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지원공격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군의 반격도 마찬가지로 지지부진했다. 


... 12:40시에 적의 공격이 무산되었다. 제55 로켓발사기 연대의 집중적인 포격덕분이었다...


중앙 전선군 사령관 로코소프스키가 노획한 페르디난트 중전차에 대해 장교들에게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전면장갑이 얼마나 두터운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3발을 맞았는데도 격파되지 않았습니다. 

육지의 전함이라고 불릴 정도였고 러시아군이 가장 두려워하던 전차였는데 여기서는 캐터필러 파손으로 노획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교들의 복장이 이미 제정 짜르의 시대로 돌아갔고 실제로 근위군이라는 이름도 제정시대, 자신들이 혐오하던 정치체계로 복귀한 것입니다. 


라이브스탄다르테와 토텐코프는 실패했지만 다시 라이히는 전열을 가다듬고 스토로즈크보에를 점령한 후에 비노그라도프카 외곽까지 진출했다. 다스 라이히만큼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며 3전차군단의 선봉대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트루파노프의 공격은 예정대로 시작되었지만 공교롭게도 교두보를 확장하고 있던 제19 전차사단과 만났다. 제26 근위전차여단과 제11 근위기계화여단이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7월 13일 밤에는 제7 전차사단이 제19 전차사단과 합동으로 프로호로프카를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만슈타인의 제한적인 공세가 좋은 결과를 얻는 것처럼 보였다. 남부집단군 단독의 작전을 롤란드 작전이라고 불렀다. 


서쪽에서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전열정비를 마치고 7월 14일에 제3 전차사단과 함께, 6전차 군단이 보강된 러시아 5근위와 10전차군단에게 반격했다. 반격을 받은 러시아군은 후퇴했고 바투틴은 7월 15일 카투코프에게 방어태세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 모든 상황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좌측의 위험했던 상황도 바로 잡혔고 제3 전차사단은 지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로스도이칠란트는 10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전력이 너무 약해져 있었다. 러시아군의 전력은 오히려 더 보강된 것같았다. 7월 14일 저녁이 되자 아군의 공격일정을 더 이상 맞출 수 없는 것이 분명해졌다. 작전개시에 투입되었던 80대의 판터 중에서 이제 몇 대만 움직일 수 있었다...


7월 13일 저녁에 남부집단군은 롤란드 작전을 시작했다. 프로호로프카 일대의 전선을 연결하고 최대한 러시아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3전차군단과 다스 라이히가 연결되어 리포프이도네츠강과 북부 도네츠강 사이에 포위된 러시아군을 제167과 168 보병사단이 섬멸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코프와 바투틴은 독일군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바로 조치를 취했다. 프로호로프카를 방어할 충분한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 전 기갑병력으로 트루파노프의 부대를 구원하고 제69 군은 포위망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로 했다. 


다스 라이히의 공격은 7월 14일 04:00시에 시작되었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 보병이 사용하던 대전차 무기입니다. 유명한 판저파우스트는 아직 보급되지 않았고 직접 전차에 접근해서 공격하는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위는 날리는 수류탄으로 전차 뒤의 엔진 데크를 공격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흡착지뢰 또는 수류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연합군도 사용할 것을 염려해서 전차에 시멘트를 바르는 찌메리팅을 도입했었죠. 연합군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최후의 수단입니다. 


... 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계속 터지는 지뢰밭을 건너 프라보로트 남서쪽의 고지로 걸어갔다. 고지대 아래의 마을에서는 집마다 백병전이 벌어졌다. 스투카가 마을 내외부의 주요 방어거점을 폭격했고 척탄병은 흡착지뢰를 사용해서 12대의 전차를 부쉈다. 

전차 연대의 도움을 받아 척탄병은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낮까지만 해도 좋았던 상황이 15일 밤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제7 전차사단의 선봉대와 조우하면서 작전이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그로치스체보-레스키지역의 적을 포위했다...


그러나 작전 초기에는 상당히 낙관적이었던 상황이 점차 달라졌다. 


... 성공적인 작전에도 불구하고 성채 작전은 남과 북쪽 모두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예상보다 진격속도는 느렸고 쿠르스크까지 아직도 참호, 지뢰밭과 기갑부대가 널린 130km를 가야했다... 


독일군은 포위망을 만들었지만 러시아군 거의 대부분이 탈출했고 전차사단의 전력은 더욱 줄어들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사단은 15일 당시에 57대의 전차와 28대의 돌격포가 전부였다. 


이제 만슈타인은 전선을 모두 연결시켰고 러시아의 예비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줄 차례였다. 실제로 러시아의 방어선 뒤에서는 코네프의 스텝전선군의 제27과 제53 군 그리고 34근위전차와 1기계화군단의 전차 400대가 오보얀과 프로호로프카 부근에서 집결 중이었고 제47 군은 제7 근위군 뒤로 이동했다. 주코프와 바투틴은 7월 17일에 공세로 나서기로 결정해 둔 상태였다. 


히틀러는 적군(Red Army)의 공격을 도와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17일 정오에 그는 2 SS 전차군단을 이탈리아 행 열차에 타게 했다. 만슈타인이 벼르던 롤란드 작전의 유인 후 반격은 이렇게 끝났다. 

7월 17일, 러시아군은 미우스와 북부 도네츠강의 동쪽 끝에서 남부집단군의 방어선을 공격했다. 이 공세는 조만간 있을 대규모 공세인 루미란체프(Operation Rumiantsev) 작전을 위한 사전의 기만전술이었다.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가 미우스강으로 급파되고 라이브스탄다르테는 이탈리아로 전출되면서 러시아군이 바라던 대로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누구나 봐도 가장 큰 위협은 오렐 부근에 모인 러시아의 서부와 브리안스크 전선군의 쿠투조프 작전이었다. 중앙전선군도 7월 15일에 합세하기 위해 모델의 제9 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나 휴식과 보급을 받고 있었다.  이 지역의 방어책임은 루돌프 슈미트의 제2 전차군에게 맡겨졌다. 제2 전차군이라는 이름은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14개 사단과 제5 전차사단의 160,000명과 350대의 전차가 고작이었다. 멀리서 집결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전력과 비교하면 순식간에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한 직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입니다. 조금 전까지 개인참호를 지켰던 독일군의 시체가 그대로 있습니다. 


성채 작전으로 양쪽의 부대가 피를 흘리는 동안 서부 전선군의 소콜로프스키와 브리안스크 전선군의 포포프는 조용히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211,458명, 4,285문의 대포와 박격포, 745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브리안스크 전선군은 170,000명, 35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제3 근위전차군은 731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예비병력으로 남겨두었다. 스탈린은 보로네즈와 중앙 전선군이 가장 심한 압박을 받고 있을 때에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7월 12일 03:00시에, 러시아 포대가 독일군 방어선을 두들겼고 오후가 되면서 제11 근위군이 독일 제5 전차사단이 홀로 방어하던 지역을 10km 정도 밀고 들어왔다. 


... 중앙 전선군의 병사들이 적에게 치명적인 칼날과 진정한 러시아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일주일 동안의 쉴새없는 전투로 적은 그 자리에 못 박혔다. 전투의 첫 번째 단계가 끝났다...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23km 너비의 전선이 15km 뒤로 밀려났다. 오렐 돌출부의 북쪽 방어선이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클루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오렐 동쪽을 방어하던 35군단은 방어태세가 잘 갖춰져있었다. "24개 보병대대 중 6개, 42개 포대 중 18개, 48개 중대전차 포중 24문이 협소한 공격로에 배치되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통신감청과 공중정찰을 통해 러시아군의 주 침투로를 미리 파악해두었고 7월 12일에 대전차포 3문의 피해만으로 60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격파했다. 


제2 전차군과 제9 군을 동시에 지휘하게 된 모델은 성채 작전에서 제12, 제18, 제20 등 4개 사단을 빼내 러시아군의 공격로에 급히 투입했다. 7월 15일, 휴식과 보급을 받은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이 공격에 나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어도 그렇지않아도 출혈이 심한 모델의 전력을 갉아먹었다. 이튿날 모델은 데스나강 일대를 요새화해서 브리안스크의 철로교차점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위기에 몰렸다. 7월 17일, 25전차군단이 볼호프의 방어선 뒤를 노렸고 다시 2일 후에는 리발코의 12와 15전차군단이 올레쉔강을 건너 12km를 침투해왔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는 7월 20일에 어떤 후퇴도 용납하지 않겠다며 모델의 목을 조였다. 7월 21일에 오렐 북쪽의 독일군 방어선은 제11 군이 돌파하자 히틀러는 약간의 양보를 하며 기동방어전은 허용했다. 전선의 너무 많은 곳에 구멍이 난 상태였고 모델이 투입한 제441과 제707 보안사단은 대전차 전투가 아예 불가능한 병력들이었다.

7월 25일, 제3 전차군이 오렐-쿠르스크 철로를 끊으며 독일 방어선의 취약점을 찾는 무력정찰을 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오랜 동안 구축된 독일 방어선이 만만치 않은 것을 알고 작전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오렐을 북과 서쪽에서 포위하려던 계획을 남서쪽으로 변경했다. 리발코의 제3 전차군의 450대 전차가 이 방향으로 다시 배치되었다. 


독일군도 노획한 전차를 많이 사용했지만 러시아군도 독일군 노획전차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T-34와 4호 전차를 결합한 변종도 만들어냈죠.

아주 재미있는 장면인데 3호 전차를 견인해가고 있습니다. 연료가 떨어져서 버려야 할 때에는 보통 포 조준경을 부수고 엔진에 수류탄을 넣거나 모래를 넣게 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탈리아가 다시 등장했다. 7월 25일 무솔리니가 체포되었다. 히틀러는 클루게를 다시 호출해서 2 SS 전차군단이 이탈리아로 급파될 것이며 다른 사단도 차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출할 병력을 마련하기 위해 오렐 돌출부를 가능한 한 소개하라는 명령이었다. 클루게는 반대했지만 소개작전이 7월 28일에 시작되었다 (오랜 동안 공들여 구축한 방어선을 그대로 러시아군에게 내주는 것입니다.)

막 도착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지원을 받아 오렐 일대의 독일군은 데스나강 방어선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파르티잔의 게릴라 작전이 기승을 부렸지만 보급품과 부상병도 모두 성공적으로 소개되었다. 쿠투조프 작전에서 큰 피해를 본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바로 추격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8월 5일에 오렐은 완전히 비워졌고 10일 후에 독일군은 새 방어선 뒤로 들어갔다. 


쿠투조프 작전으로 오렐 돌출부를 탈환한 러시아군은 중앙집단군을 포위섬멸하는 수퍼 스탈린그라드 목표는 실패했다. 이제 스탈린은 쿠르스크 전투의 방어작전 다음 단계로 미리 결정해두었던 루미안체프 작전을 개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