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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3부)

by uesgi2003 2013. 7. 11.


어떤 전사에 대해 여러 자료를 참조하다보면 큰 줄기는 거의 같은데 상세한 자료는 다 다르기 마련입니다. 어느 자료에서는 노획한 T-34를 꽤 사용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겨우 20대 정도로 집계하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숫자가 나오는 상세한 자료는 그냥 흐름을 이해하기 위한 도움으로만 생각하고 절대적인 기준이나 숫자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쿠르스크에서 IS-2(영어로는 JS-2, 러시아어로는 아이소프이기 때문에 IS입니다)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면 충분하지, 무슨 중대 몇 호 전차가 어느 전장에 있었다 없었다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 전차부대 또는 전차병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만, 전사를 오랜 동안 공부하다 보면 기억력도 안받쳐주고 분야도 방대해져서 세밀한 부분은 자료수집 정도로 그치게 됩니다. 


이제 쿠르스크의 마지막 이야기인 프로호로프카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리하는 자료에서는 중대단위까지 설명하고 있지만 저는 연대 단위 보통은 사단단위까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전 이야기에서 미리 언급했듯이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너무 늘어져서 여기에서는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양쪽의 전차군이 엄청난 인파이트 전투를 벌였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작전이나 설명할 거리가 없기도 합니다. 

이번 이야기의 그림도 모처럼 스캔한 자료를 대거 사용하기 때문에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그리고 좀 긴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에 최종정리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3부)


7월 12일 남부집단군이 벌인 전차전은 히틀러의 야심찬 성채작전의 마지막이자 러시아군의 대규모 반격작전의 시작이 된다. 쿠르스크 전투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보통 프로호로프카 남서쪽의 들판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다. 검은 제복을 입은 히틀러의 친위군은 스탈린의 정예 근위군과 맞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프로호로프카 남동쪽이나 서쪽의 전투를 무시해서도 안되며 7월 12일에 벌어진 전투는 프로호로프카 일대의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춰야지,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만 집중해서는 안된다. 


만슈타인과 호트는 진격하는 3줄기를 하나로 합쳐서 러시아 방어선을 돌파하고 쿠르스크까지 진격하려고 했다. 러시아 지휘부도 독일군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바투틴은 카투코프의 제1 전차, 치차코프의 제6 근위,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 근위군과 자도프의 제5 근위군에게 하우저의 2 SS 전차군단과 크로벨스도르프의 48전차군단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7 근위군의 40보병사단에게는 라줌노에 동쪽의 켐프특수군을 상대하게 해서 이들이 하우저의 부대와 합류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켐프의 제6 전차사단이 7월 11/12일의 한밤중에 벌인 과감한 시도는 러시아군을 놀라게 만들었다.


노획한 T-34를 앞세운 소수의 전차와 장갑차가 르자베츠와 북부 도네츠강의 중요한 도강지점을 점령하려고 했다. 절대로 발포하거나 독일어를 말하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진 상태에서 7월 11일 저녁에 러시아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사상자 숫자입니다. 아무래도 주력인 남부집단군을 상대했던 보로네즈와 스텝전선군의 피해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전차포와 로켓 발사대를 지나쳤다. 달빛이 희미했고 러시아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호나 길가에서 경계를 했지만 거의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러시아군 부대가 그들을 지나쳐갔기 때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뵈이크(독일 지휘관)는 적의 보병대열 뒤를 따랐고 희한하게도 러시아군 어느 누구도 전차에 올라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두 T-34를 잃은 후에도 계속 르자베츠로 향했고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유령 여행은 끝이 났다. 러시아군이 조명탄을 쏘았고 사방에서 기관총탄이 발사되었다. 

뵈이크의 전차와 장갑차는 마을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전차포대를 점령했고 공병은 박격포대도 제압했다. 갑자기 강쪽에서 육중한 굉음이 들렸고 뵈이크는 다리닷!하고 외쳤다. 전차가 급히 달려갔지만 다리가 파괴되었다. 

그렇지만 공병과 척탄병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다리로 반대편에 교두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전장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공군 조종사와 전차병이 받았지만, 가장 심한 피해를 입으며 절대적인 공헌을 한 것은 공병들이었습니다. 


다리를 신속하게 수리한 후에 3전차군단이 건너기 시작했다. 바투틴은 04:00시에 르자베츠 함락보고를 들었고, 로트미스트로프는 예비병력을 투입해서 적을 밀어내고 해가 저물 때까지 샤호보-슈첼로프코보 방어선까지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트루노프는 60대의 T-34와 30대의 T-70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7월 12일 늦게 전투에 돌입했고 다른 부대의 응원을 받으며 제6 전차사단의 상당수를 강너머로 밀어냈고 제19 전차사단의 교두보가 더 확장되지 못하게 막았다. 

바투틴과 로트미스트로프의 단호한 결단덕분에 북부 도네츠강의 러시아 방어선을 회복했고 독일 3전차군단이 7월 12일에 프로호로프카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프로호로프카 전투가 남아있었다. 해가 스텝 위로 떠오르자 대지는 다시 건조해지기 시작했고 태양빛을 받으며 라이브스탄다르테의 기갑척탄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스포보제보에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08:00시에는 67대의 전차가 보병의 지원을 받으면 진격했다. 갑자기 하늘에 보라색 연막탄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아군에게 전차를 알리는 경고였다. 

연막신호가 경사면 전체에 퍼졌다. 


... 첫번째 T-34가 나타나자 우리는 경사면에 멈춰서 포를 발사하고 여러 대를 맞췄다. 러시아군 전차가 불타고 있었다. 800m 정도면 아군 포수에게는 가장 적당한 거리였다.

더 많은 전차가 다가오는 지를 지켜봤다. 습관대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150~200m 정도 솟은 얕은 언덕 위에서 15대, 30대, 40대의 전차가 나타났다.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의 전차가 계속 나타났다. T-34 전차무리는 보병을 태운 채로 우리에게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 29전차군단의 31과 32전차여단이었다. 동시에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좌측도 600~1000m 거리를 두고 60대의 러시아 전차와 전투가 벌어졌다. 


... 그들은 아침에 우리를 공격해왔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적이 있었다. 심지어 우리 곁에도 있었다. 개인참호에서 뛰어나가 수류탄을 적 전차에 붙였고 장갑차에 올라 적의 차량과 보병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지옥과 같았다! 09:00시가 되자 우리가 승기를 잡았다. 내 중대 혼자서 15대의 러시아 전차를 파괴했다...


T-34 76mm도 매우 다양한 포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1941/2년 형을 좋아하는데 플라모델러 중에는 1943년 형의 포탑을 좋아하는 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T-34 85mm는 아직 쿠르스크 전투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큰 그림으로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료가 많은데... 전사 사이트이다 보니 그냥 다른 블로그에게 설명을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2 SS 전차군단의 모든 전선은 거의 같은 상황이었다. 


... 강둑 왼쪽의 언덕 너머로 3대, 5대, 10대가 몰려왔다. 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지? 모든 화기를 총동원하며 T-34가 연속해서 언덕너머 아군에게 돌집했다. 첫 번째 전차를 보자마자 5문의 대전차포로 응사를 했고 T-34가 검은 연기를 내며 멈췄다. 전차에 타고 있던 보병은 백병전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40~50대의 T-34가 오른쪽에 나타났다. 포문을 돌려 사격했는데... T-34 한 대가 바로 앞에 나타나자 보조 사수가 놀라 크게 소리쳤다. '마지막 발 장전' 세상에! 150m 거리에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전차를 조준할 때에 지지대가 무너지면서 포신이 하늘로 향해버렸다. 강제로 포신을 내려서 전차의 포탑을 겨누고 발사했다. 

전차의 해치가 열리면서 두 명이 도로를 가로질러 도망쳤다. 겨우 30m거리였다. ...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반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08:00시에 15분간의 포격 후에 전차를 내보냈다. 500대의 전차와 자주포가 제9 근위공수사단을 싣고 진격하는 독일군에게 바로 반격을 퍼부었다. 


... 제5 근위전차군은 전속력으로 나치대열과 부딪쳤다. 너무 신속한 공격이어서 적은 전투채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아군 선봉대는 적의 첫 번째 부대를 돌파했다. T-34는 근접전으로 타이거를 상대했고 격파했다. 좁은 전장에서 수 많은 전차가 뒤섞였고 뒤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이나 공간이 없었다. 내부유폭으로 포탑이 몇 미터 밖으로 날아가버리기도 했다.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고 검은 땅 위에서는 격파된 전차가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누가 공격하고 누가 수비하는 지를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파괴된 3호 전차입니다. 무장과 장갑을 강화시켰어도 T-34에는 이미 손쉬운 상대가 되었습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 아군 전차는 근접전에서 타이거를 파괴하고 있었다. 타이거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 전차병은 양 옆을 공격했다.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포탄은 타이거 장갑에 큰 구멍을 뚫었다. 우리와 독일군 모두 동시에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전차를 오크티아브르스키 방향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어도 러시아군의 손실은 거의 50%에 달할 정도로 막심했다. 전차에 탑승했던 공수부대원의 투지는 대단했다. 그들은 맹돌진하는 배기가스를 마셔가며 전차의 포탑을 움켜쥐고 독일군에게 뛰어들었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러시아 전차병의 투지도 다른 때와 달랐다. 


... 타이거의 포탄에 맞아 전차장이 다쳤다. 운전병과 통신병이 그를 끌어내 안전하게 숨겼다. 타이거 한 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운전병 알렉산더 니콜라예프는 불붙은 전차에 다시 타고는 엔진을 켜고 전속력으로 타이거와 충돌했다. 폭발음으로 대지가 흔들렸고 자살공격에 겁을 먹은 나치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가 자극적인 사진을 잘 인용하지 않는데, 앞으로 몇 차례는 인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파괴된 4호 전차와 버려진 독일군 시체입니다. 4호 전차는 아직 불타고 있는 중입니다. 


오후가 되자 러시아 제170 전차여단은 60대 전차의 절반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기갑정찰대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라이브스탄다르테의 배후로 돌아 토텐코프와의 연결을 막으려고 했지만 토텐코프의 타이거 중대가 때마침 도착해서 위기상황을 벗어났다. 라이브스탄다르테는 오크티아브르스키를 포기하고 1km 더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날이 저물자 러시아군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SS 사단을 프로호로프카 앞에서 막기는 했지만 비싼 대가를 물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30대의 전차를 잃은 반면에 러시아군 전차 192대와 19문의 대전차를 격파했다. 


다른 곳에서도 독일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뒀다. 특히 프셀강 남쪽의 토텐코프는 121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투입해 고지 226을 점령하면서 로트미스트로프의 우측을 크게 위협했다. 러시아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토텐코프는 폴레자에프 이상은 진격하지 못했지만 프로호르프카까지 가장 깊숙이 진격했다.


프로호로프카 전투 지도입니다. 크게해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상세한 지도가 있지만 다음에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우익에 있던 다스 라이히는 95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기록을 한 번 보자. 


... 도이칠란트(사단의 기갑척탄병 연대 중 하나) 연대는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우측을 계속 엄호하고 있었고 사단의 나머지 병력은 수비태세로 적의 보병과 전차공격을 격퇴했다. 우리 사단이 하르코프 공장에서 노획한 T-34 전차를 사용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계곡을 따라 이동하는 50대 가량의 러시아 차량이 포착되었다. 전진방향을 보면 더 퓨어러 (또 다른 기갑척탄병 연대)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군 대열 위의 고지대에서 우리 사단의 T-34들이 포문을 열었다. 러시아군과의 전투는 가장 먼저 지휘전차를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무전송수신이 가능한 유일한 차량이기 때문이다. 다른 차량은 수신만 가능하고 서로 무선교신을 주고 받을 수 없다. 러시아군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였다. 적 전차는 차체 뒤에 여분의 기름통을 달고 다닌다. 기름통을 맞추면 불이 붙고 전차는 파괴된다...


08:30시에 러시아군 2근위전차군단의 전차 120대가 반격에 나서 다스 라이히가 더 이상 라이브스탄다르테의 측면을 엄호하지 못하게 막았다.  


... 다스 라이히 사단의 우측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우저의 군단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3전차군단 사이의 틈을 반복해서 공격했다. 빌어먹을 공간! 그 놈들때문에 병력 중 절반이 측면방어에 묶였고 프로호로프카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프로호로프카 전투에 투입되었던 전차 전력입니다. 전차전에서는 전력외로 쳐야 할 T-70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의 공격은 오후에 비와 함께 전장이 진흙밭으로 변하면서 끝났다. 나중에 제26 근위전차여단이 더 보강되었다. 프로호로프카가 지옥으로 변해가는 동안 서쪽의 상황도 나빠지고 있었다. 독일 48전차군단이 프셀강을 건너 오보얀으로 진격하려고 하는 동안 바투틴의 또 다른 부대가 달려들었다. 

카투코프의 22근위보병군단은 급히 전열을 정비하고 09:00시에 100대의 전차와 함께 독일 제332 보병사단에게 돌격해왔다. 17:00시에는 5근위전차군단의 전차 70대가 라코보에 도착했고 부르코프의 10전차군단이 제3 전차사단을 베르호펜에와 베레조프카 방면으로 밀어냈다. 


제3 전차사단의 전력은 이제 전차 50대도 안되어서 도움이 필요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가 급히 재배치되었지만 그렇게 하면서 마찬가지로 50대의 전차만 남은 제11 전차사단은 러시아군 방어선을 무력정찰하는 정도의 시도 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계속 침투해왔지만 제11 전차사단은 제자리를 고수했고 비가 내리면서 러시아군의 공격이 끝났다. 

마치 칼 끝에 매달린 것과 같았던 이 날의 전투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자연의 개입덕분에 끝날 수 있었다. 폭우가 지면의 피자욱을 씻고 부상병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프로호로프카의 들판에는 온통 연기를 내고 처참하게 부숴진 수 백 대의 전차와 장갑차들의 잔해 투성이였다. 엄청난 수의 그을리고 뒤틀린 시체가 히틀러의 무자비한 야심의 희생양이 되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152mm 포의 위력입니다. 독일군 전차의 포탑 뒷부분이 아예 날아가버렸습니다. 


바이마르(독일군)와 적군(러시아군) 모두 프로호로프카 전투결과에 경악했다. 바실레프스키와 바투틴은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전 전선에 걸쳐 계속 압박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서쪽과 남쪽에서 프로호로프카로 다가오는 적을 막아라.제5 근위전차군과 5근위기계화군단(제5 근위전차군)의 2개 여단의 가용한 병력은 프셀강의 북쪽에 침투한 적의 집결을 막아라. 르자베츠 지역에 침투한 독일 3전차군을 밀어내라. 그리고 제1 전차와 제6 근위군은 공세를 계속 이어가라...


로트미스트로프는 제5 근위전차군에게 이튿날 계속될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동안 트루파노프는 3전차군단의 북쪽 진격을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었다. 

그 날 밤에 바실레프스키는 다음 반격을 협의하기 위해 남-서 전선군으로 이동했고 주코프도 같은 목적으로 바투틴을 만났다. 러시아군은 이제 쿠르스크 전투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북부에 아직 투입하지 않은 서부 전선군과 브리안스크 전선군을 투입해 대규모 공격을 가해서 공세로 전환하는 한 편, 남부집단군의 심각한 위협을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프로호로프카 전투에서의 손실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러시아군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런데도 러시아군이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군의 전력은 극한까지 이용한 것으로 더 이상의 예비전력이 없었던 반면에 러시아군의 예비전력은 아직 여유가 있었으며, 전장에 버려진 전차는 러시아군군의 앞마당이었기 때문에 재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공격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세운 러시아군과 달리 독일군 측에서는 상황이 더욱 혼미해져갔다. 영미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 그리고 러시아군의 오렐을 노리는 쿠투조프 작전개시로 성채작전의 효과에 대해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호트는 다음 날의 작전규모를 크게 줄였고 2 SS 전차군단과 3전차군단 사이의 공백을 메울 생각이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다스 라이히는 제 위치를 고수하고 토텐코프는 다음과 같이 공세를 계속 이어가서 프셀강을 건너 페트로프카 남동과 남서쪽의 러시아군을 라인스탄다르트와 함께 섬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기를 높이기 위해 호트는 만슈타인의 메시지를 전군에게 전달했다. "... 2 SS 전차군단의 뛰어난 성공과 모범이 되는 용기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다..."

살아남은 병사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지만 죽은 병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