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쿠르스크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래 서부전선을 더 좋아했었는데 전사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동부전선으로 옮겨지더군요. 아마 대부분의 아마추어 전사가들의 경로일 겁니다.
제가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은, 원서 한 두 권을 정한 후에 (간택받지 못한 원서는 그대로 뭍히겠죠), 읽어가면서 다음 에디터에 바로 입력합니다. (제 자랑을 하자면) 직독직해가 가능하고 전사 자료는 직관적이어서 별 어려움없이 입력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 서적의 경우에는 단어가 가지는 중의성과 함축성 때문에 며칠을 고민해야 하지만, 전사 자료는 단어와 문장이 직설적입니다. 다음 에디터에 바로 입력하다 보니, 정교한 워드프로세서의 오타와 비문장 교정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4부)
히틀러가 2 SS 전차군단을 전선에서 빼가면서 만슈타인은 7월 5일에 점령했던 지점까지 전선을 줄여야했다. 제3 전차사단이 남쪽으로 내려가 미우스강 방어선을 지원하게 되자 벨고로드와 하르코프를 방어할 병력은 말도 안될 정도로 적어졌다. 만슈타인이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을 동원해 이지움-미우스 공세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러시아가 바라던 루미안체프 작전의 준비작업이 모두 끝났다.
이 작전의 목표는 대규모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제4 전차군과 제6 군을 모두 섬멸하고 흑해까지 내달리는 것이었다. 공격은 독일군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단계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러시아군은 이제 사람, 장비와 경험 모두를 갖춰서 이전보다 훨씬 정교한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보로네즈와 스텝 전선군은 벨고로드와 하르코프를 탈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제 러시아군의 작전실행은 아주 단순한 공식을 따르게 된다. 엄청난 포탄을 퍼부어서 적의 지뢰, 장애물, 참호, 통신망을 조각낸 후에, 전차대군이 방어선 곳곳을 뚫고 보병이 그 틈을 벌리는 것이었다. 워낙 압도적인 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기술이나 전술적 대응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스탈린은 7월 23일에 루미안체프 작전을 개시하고 싶었지만 주코프는 바투틴과 코네프의 병력을 최대한 모으려면 8일은 더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7개 군 중에 4개 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휴식기간 동안 전차군은 각각 500대 이상의 전차를, 보병사단은 신병이 쏟아져 들어왔다.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보로네즈와 스텝 전선군은 980,000명, 2,439대의 전차와 자주포, 12,627문의 대포와 박격포, 1,30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반면에 독일군은 300,000명, 250대의 전차와 돌격포, 3,000문의 대포와 박격포, 1,000대가 안되는 항공기를 보유했다.
독일의 감청과 항공정찰을 역이용해서 엉터리 무전과 철도운행으로 제7 전차사단과 제78 보병사단을 딴 곳으로 보내서 독일군 방어선은 더욱 허약해졌다 (제공권을 잃었기 때문에 치밀한 공중정찰이 안되었습니다.)
8월 3일, 05:00시 러시아의 포대가 독일군 전선을 두들기면서 동부전선 붕괴의 서막을 알렸다. 3시간 후에 포대는 독일군 후방을 두들겼고 그 동안 첫 번째 지상군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른 오후가 되자 바투틴은 4개 전차여단을 투입해서 25km까지 진출했다. 작전개시 첫 날, 러시아군은 제4 군과 켐프 특수군 사이에 10km의 틈을 만들었다.
스텝 전선군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코네프는 5근위기계화군단을 증원받았지만 만수타인의 대응이 매우 신속했다.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를 미우스강 방어선에서 불러내 만신창이가 된 제3 전차사단과 함께 3전차군단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하르코프 북서쪽의 러시아 기갑부대 진출을 막게 했다. 켐프 특수군은 제5 SS 기갑척탄병 사단 뷔킹이 증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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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가 독일군의 전력을 모두 소진시켰고 독일군은 러시아군의 전차와 보병 사이에 벌어진 틈을 제대로 반격할 수 없었다. 8월 5일, 작전개시 2일 만에 벨고로드를 탈환했고 북쪽에서는 히틀러가 오렐을 포기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축포를 쏘아 기념했고 이후부터 제정시대의 전통이 계속 되었다.
8월 6일, 제6 근위군은 서쪽으로 돌파했고 8월 7일에는 보고두코프와 그라이보론을 탈환했다. 독일 제19 전차사단 전부, 제57, 제255, 제332 보병사단 일부가 포위될 위험에 놓였다.
제19 전차사단장 구스타브 슈미트는 제4 전차군과 켐프 특수군 사이에 50km 정도의 틈이 벌어진 것을 알고 병력을 급히 보내 그라이보론과 아흐리르카 사이에 길게 늘어서게 했다. 루프트바페는 마치 그곳에 러시아군이 있는 것처럼 가상공격을 해서 러시아군을 교란시켰다.
이 기발한 꾀도 얼마 가지 못했다. 제27 군의 트로피멘코는 그 지역에 아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는 우회롤 찾아냈다. 보로네즈 전선군의 포대는 러시아 근접지원기와 함께 얇게 펼쳐진 슈미트의 부대를 포격했고 도로에는 부숴진 전차와 포의 잔해가 가득했다. 슈미트는 전사했고 얼마 안되는 생존자가 후퇴해 오렐에서 급하게 투입된 그로스도이칠란트와 합류했다.
마치 오른쪽의 주코프가 군기가 바짝 든 상태처럼 보이는데, 큰 사진으로 자세하게 보면 주머니에 손을 넣은 거만한 태도입니다. 중앙은 스텝 전선군의 코네프입니다.
8월 8일 자이틀러와 만난 만슈타인은 전멸위기에 몰린 남부집단군을 구원하려면 즉시 전선을 크게 뒤로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이틀러는 총통에게 전달했다. 히틀러는 러시아군이 위협하지 않는 남쪽에서 제3 전차사단을, 켐프 특수군에서 재편성된 제8 군에 합류시키게 했다.
하르코프의 동부외곽까지 러시아군의 전차가 침투했는데 유례없이 적 앞에서 도망친 제282 보병사단은 옛날 로마군의 처형방식대로 10명 중 한 명을 처형하는 것까지 검토할 정도였다. 제6 전차사단이 위기를 잠시 봉합했지만 8월 18일 제57 보병사단이 러시아군의 포화를 못이기고 등을 돌리는 같은 일이 벌어졌다.
8월 12일과 13일 사이에 충분한 보급을 받은 토텐코프가 카투코프의 제1 전차군을 상대하면서 100대의 전차를 격파했다. 다스 라이히도 쿠르스크와 미우스강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라이브스탄다르테 사단이 남겨둔 전차를 모두 흡수하면서 하르코프에서 병력을 소개시킬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하르코프를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도시를 내주면 심각한 정치문제가 발생할 수 있소. 터키의 태도가 이 전투에 달려있소. 불가리아도 마찬가지이고. 하르코프를 내준다면 앙카라와 소피아에 할 말이 없소...
(히틀러는 러시아와 전통적인 적대국가인 터키를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었습니다. 터키는 현명하게도 계속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고 만약 터키와의 국경선을 잃게 된다면 터키 그리고 러시아의 위협을 받게 되는 불가리아와의 동맹도 위협받게 됩니다. 그래서 히틀러의 고민도 이해가 됩니다.)
만슈타인의 결심은 달랐다. "성사될 지도 모르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6개 사단을 희생시킨다... 나는 차라리 도시를 내주고 1개 군을 구원하겠다."
히틀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8월 22일에 하르코프를 소개하면서 중요시설을 모두 폭파시켰다. 코네프는 서둘러 야습을 감행했지만 만슈타인이 한 발 더 빨랐다. 코네프는 잔해만 남은 도시 그리고 탈영병만 포로로 잡았을 뿐이다.
하르코프 상실은 드니에페르강과 키에프까지 그대로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남부 집단군은 텅빈 평원에서 최선을 다하던지 아니면 최대한 뒤로 물러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드니에페르강으로 후퇴하더라도 이전에 약속받았던 방어선 구축공사가 제대로 되었는 지도 의문이었다.
괴벨스의 선전물에서는 이렇게 소개되었다.
... 독일은 드니에페르 서쪽 강변을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시켰다. 우리는 대서양 성벽과 같이 난공불락의 동부 성벽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오는 적은 죽음뿐이다. 드니에페르강에서 여러분은 죽을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멈춰라...
(실제로 천혜의 장애물인 드니에페르강 방어선은 히틀러의 패배주의 망상때문에 공사가 상당히 늦어졌고 순식간에 러시아군에게 돌파당하고 맙니다.)
하르코프를 손에 넣은 러시아군은 다시 한 번 미우스강을 공격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물러섰다. 북쪽에서는 8월 7일, 독일 중앙 집단군의 전선에 서부와 칼리닌 전선군이 수보로프 작전을 개시해서 동부전선 전체에서 독일군을 밀어냈다.
8월 27일,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비니차를 방문해서 만슈타인의 보고를 받고 중앙 집단군의 병력을 남부 집단군에게 증원시키기로 했지만 그 때의 상황은 어떤 부대도 전출시킬 수 없는 전체 전선의 위기였다. 27~28일 밤에 러시아군 2개 군단이 6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마리우폴을 향해 남진했다.
최대한 탄약을 챙기고 있는 독일군 병사입니다.
9월 3일은 전쟁발발 4년차이자 영미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한 날이기도 했다. 만슈타인, 클루게와 히틀러는 동 프러시아에 다시 모여, 중앙 집단군을 데스나강까지 후퇴시키고 만슈타인은 코카서스의 쿠반 교두보와 미우스강을 포기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3일 후에, 러시아의 제3 군은 제1 전차군과 제6 군 사이에 36km 정도의 틈을 만들었고 중앙 전선군은 중앙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 사이를 파고 들었다. 결국 만슈타인은 9월 7일에 위기를 돌파할 수 있도록 부대이동과 후퇴에 대해 위임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다음 날 히틀러가 자포로즈예로 날아왔고 만슈타인은 중앙 집단군을 드니에페르강 너머로 후퇴시켜서 우탄 방어선을 지킬 병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히틀러는 대신에 중앙 집단군에서 부대를 전출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클루게는 만슈타인의 요청을 무시했다. 9월 15일에 히틀러는 결국 만슈타인과 클루게에게 데스나강과 드니에페르강 너머로 후퇴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제6 군만 강을 건너지 않은 채로 우탄 방어선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강건너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미처 탈출하지 못한 병력은 전멸했다. 바투틴의 제51 근위전차여단의 병사 4명이 강을 건넜고 그렇게 시작된 아주 작은 교두보는 3일 만에 31평방km로 확장되었다. 9월 22일에는 로코소프스키의 제13 군이 키에프 북쪽의 강에 도착했다. 몇 주 동안 드니에페르강에 포위된 독일군을 일소하는데 시간을 보낸 러시아군은 10월 말에 크리미아에 있던 클라이스트의 군 집단을 남부 집단군과 단절시키고 고립시켰다.
훈장을 받은 3명의 여성 전차병... 이라기에는 외모가 이상하죠? 양털을 뒤집어 쓰고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다음 목표는 키에프였다. 11세기에 시작된 러시아 역사에서 키에프는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였고 11월 7일인 볼쉐비키 혁명 26주년까지 탈환하고 싶었다.
키에프는 11월 6일 아침이 되기 전에 러시아군에게 열렸다. 바투틴의 선봉대는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4개월 하루 만에 조심스럽게 도시에 진입했다. 그 기간 동안 러시아는 독일 정예부대와 자신이 고른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독일군을 보잘 것 없는 패잔병으로 만들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성채 작전의 실패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렇게 공들여 재건한 기갑전력은 병력과 장비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오랜 시간 동안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것이다. 제 시간에 다시 충원해서 동부전선을 방어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그들은 내년 봄으로 예상되는 연합군의 서부전선 상륙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러시아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이제 더 이상 휴식기는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적은 선공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얻었다...
포로로 잡힌 독일군입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부터 부대 단위의 포로가 잡히게 되는데, 스탈린그라드를 원상복구시킨 후에 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943년 11월 7일, 제26주년 볼쉐비키 혁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스탈린이 남긴 말이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파시스트의 황혼을 알렸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재앙을 안겨주었다...
베를린까지 그리고 궁극의 승전까지는 길고도 험할 것이며 적군 병사는 그 첫 발을 내딛으며 끔찍한 희생을 치뤘다. 쿠르스크 전투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시작이자 끝으로 남았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던 양쪽의 부대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사용할 기회를 잃어서 그냥 올리는 참조자료입니다.
러시아군의 대표적인 대공무기입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전차엽병(대전차)대대의 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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