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저스가 대단한 진격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역전승을 보면 이 팀이 불과 3개월 전의 사회인야구 수준의 팀이 맞나 싶기도 합니다. 거침없는 진격을 하는 엔진은 푸이그와 류현진선수입니다. 그 둘의 플레이도 훌륭하지만 경기장 밖에서의 모습을 보면 다른 팀에서 볼 수 없는 젊은 힘을 느끼게 합니다.
올 가을에는 온 국민이 TV 앞에서 '다졌으'가 아닌 'LA 다저스'를 응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류현진 선수는 데뷰 첫 해에 월드 시리즈 반지를 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이야기는 처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강철과 같은 의지로 영국을 구한 처칠, 그러나 초기의 미온적인 태도로 히틀러와 독일 나치제국의 부흥을 허용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처칠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처칠이 유럽과 미국을 구했을까?
1940년이 되자, 악몽과도 같은 나치의 헤게모니가 유럽대륙 전체를 뒤덮는 것처럼 보였다. 윈스톤 처칠이 경고했듯이 세계는 새로운 암흑시대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7월 초가 되자 처칠은 가장 어려운 문제 몇 가지를 이겨냈다. 프랑스 항복, 전면전에 반대하는 영국정가,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루프트바페의 무차별 폭격... 처칠은 영국을 일으켜세웠고 미국도 불러들여 나치 독일을 패망시켰다.
처칠의 어려운, 그러나 단호한 결심을 느낄 수 있는 사진입니다. 1941년 8월, 프린스 오브 웨일즈 전함에서 있었던 대서양 회의 때의 모습입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독일의 최대전함 비스마르크 격침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에게 격침당합니다.
1940년 5월 9일, 늦은 오후에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 3명, 수상 네빌 챔벌레인, 외무상 로드 할리팍스 그리고 왕립 해군참모총장 윈스턴 처칠이 한자리에 모였다. 기록원이 배석하지 않았지만 챔벌레인의 일기, 할리팍스와 처칠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 지를 알 수 있다. 차기 수상임명이 회의안건이었는데 단순히 인선차원이 아니라 향후 몇 년 동안의 위험한 정세를 타파할 중요한 자리였다.
보수당 의원 100명 이상이 같은 당의 챔벌레인 정부를 탄핵하는 일이 있었다. 그가 영국의 지도자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뒤를 이을 수 있을까? 보수당 당수인 챔벌레인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1930년대 후반 우호정책을 지지했고 당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던 할리팍스에게 수상직을 제안했다. 당시 보수당은 1935년부터 하원의 과반수 이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수상직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챔벌레인이 정부와 하원을, 처칠이 전쟁을 그리고 할리팍스가 상원에서 정부를 이끄는 이름만 수상인 조건이었다. 그는 제안을 거절했고 나중에 외무상 2인자인 알렉산더 카도건 경에게 "내가 전쟁을 책임지지 않고 하원도 지휘하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지"라고 털어놓았다. 챔벌레인은 어떻게든 공직에 남고 싶었지만 노동당은 연합정부 구성을 거절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처칠이 영국 역사상 최대의 위기 순간에 수상이 되었고 그는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조지 6세에게서 임명을 받은 후에 "얼마나 대단한 임무인지 신은 아신다네.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라네. 늦지 않았나 정말 염려스럽군. 최선을 다해야지"라며 경호원에게 말했다.
왕, 할리팍스, 챔벌레인의 우호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 고위 지휘관, 의회의 보수당 의원 그리고 새 수상의 판단을 믿지 않는 영국의 상류층 인사는 그의 임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처칠이 처음으로 의회에 들어서자 보수당은 침묵으로 모욕을 준 반면에 챔벌레인에게는 환호로 맞이했다. 처칠은 보수당 원내총무에게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총선을 치루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보수당의 외교정책 실패때문에 총선을 치루게 되면 의석 상실은 뻔한 일이었다.
처칠은 2개월 동안 의회의 지뢰밭을 조심스럽게 피해다니며 대표적인 비둘기파 사무엘 호어를 내각에서 스페인 대사로 내보내는 것과 같은 단호한 결정을 연달아 내렸다. 재미있게도 챔벌레인이 처칠의 최대 후원자가 되는데, 그는 영국과 히틀러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깨달았다.
정작 국내정치는 외교와 군사문제에 비해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1940년 5월 10일, 처칠이 수상에 취임했고 독일은 본격적인 보복에 나섰다. 지난 6일 동안 서유럽은 나치 독일에 비해 우세했던 상황에서 절대 열세의 신세가 되었다. 연합정부는 1939년 9월 3일에 제3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에 강경대응을 주저하는 바람에 독일은 한 방을 날릴 힘을 모을 수 있었다.
독일의 한 방은 1940년 봄에 터졌고 독일이 소련 점령 하의 폴란드 국경에 6개 사단도 안되는 병력을 배치시켰는데도 소련은 가만히 서유럽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봤다.
독일육군의 전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겨우 우위였던 반면에 루프트바페는 유럽대륙을 마음껏 날아다녔고 연합군의 최강 전투기들은 영국방어만 하기에도 버거웠다. 프랑스가 단 한 번의 공격에 무너지면서 독일군의 신화는 계속되었다. 프랑스 병사들은 100,000명 이상이 전사하며 끈질긴 저항을 했지만 워낙 무능한 지휘체계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940년 3월, 프랑스 참모총장 모리스 자믈랭(Maurice Gamelin, 사진참조)은 랭스(Reims)에 있던 주력을 연합군 전선의 서쪽 멀리로 전환배치시키는 프랑스 전사상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랭스에 주력이 있었다면 독일군의 주공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고 서쪽 끝에서 주력이 배후를 끊기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5월 12일, 독일 3개 전차군단이 뫼즈 강변에 도착했고 그 후 3일 동안 세계 전사에 빛나는 대단한 전술적 승리를 거뒀고 결국 프랑스는 항복하게 된다.
처칠에게도 재앙의 첫 번째 기미가 5월 15일에 다가왔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수상 폴 레노(Paul Renaud)에게서 "우리는 졌소. 참패했소. 파리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우리는 끝났소"라는 전화를 받았다.
영국은 즉시 프랑스로 허리케인 전투단을 추가로 급파했지만 안좋은 소식만 들어왔다. 처칠은 파리로 날아가 레노와 자믈랭과 만나자 마자 어설픈 프랑스어로 "예비군 주력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자믈랭은 단 한 마디만 대답했다. "없습니다."
처칠은 전의를 잃은 프랑스 지도부까지 일으켜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르노가 자믈랭을 해임하고 노쇠한 페탱 원수를 스페인 대사직에서 다시 불러들이면서 파리는 패배주의에 휩싸였다. 교체된 인사들은 오히려 르노 정부를 뒤흔들고 독일과의 휴전을 모색했다.
처칠도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의 동맹국은 더 이상 전쟁을 하려들지 않았고 본국에서는 할리팍스가 더 이상 승산이 없으니 독일과 더 늦기 전에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더 많은 공군기를 보내 열세에 있는 프랑스 공군을 지원하는 갓이었다. 프랑스 공군은 루프트바페에 비해 전력도 약한데다가 북부 기지까지 점령당했다. 공군 최고사령관 휴 다우딩(Hugh Dowding)은 전투기 급파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5월 20일, 처칠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달리 지휘관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고 다우딩의 강력한 항의는 받아들여졌다.
6월 초에 프랑스가 다시 한 번 공군지원을 요청해오자 처칠은 내각의 조언을 받아 허리케인 3개 비행단을 급파했다. 이번에도 다우딩은 5월8일~18일 사이에 허리케인 250대를 잃었고 덩케르크 부근에서 스피트파이어가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을 지적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처칠은 기술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29살 먹은 캠브리지 출신의 물리학자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 폭격기가 라디오 빔을 교차(그림 참조)시켜서 야간이나 악천후에도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보고를 했다. 영국공군과 물리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말도 안된다며 무시했고 준비를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끝에 이 주장이 내각에 제출되었고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내각에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처칠은 예외였다. 처칠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만약 그 주장이 5%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영국은 전쟁을 치룰 수 없게 된다.
처칠은 공군에게 테스트해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두 번째 야간 테스트에서 정교한 라디오 장치를 장착한 비행기가 독일의 크니케바인(Knickebein) 시스템을 찾아냈다.
처칠의 현명한 판단덕분에, 공군이 가장 취약하던 1940~1941년 겨울에 영국은 독일의 무선지향시스템을 교란시켜서 야간폭격의 정확도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었다.
5월 20일, 처칠은 프랑스에 대한 공군지원을 중단했고 프랑스 해안으로 보낼 수 있는 가능한 한 많은 배를 모으라고 해군에 지시했다. 이미 패전이 확실해졌고 영국해협쪽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공세에서 아군을 어떻게 구출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프랑스는 눈에 빤히 보이는 포위망에서 병력을 구출할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신임 사령관 베강(Weygand)는 심지어 영국군이 탈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영국 파견군이 벨기에의 연합전선 좌측에서 남쪽으로 돌파해서 남쪽에서 북진하는 프랑스군과 연결시키자고 제안했다. 문제는 남쪽에서 어떤 프랑스군도 북진하지 않고 있었다.
이 순간에 파견군 사령관 고트경이 주도하고 나섰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이 절대로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처음에는 그도 단호한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아라스 부군의 영국전차가 독일군의 움직임을 봉쇄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제는 배후가 끊겼고 프랑스군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고트는 병사들을 영국해협 해안으로 달리라고 명령했다. 그의 올바른 판단덕분에 덩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고 영국군은 귀중한 육군전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트의 결정때문에 처칠은 프랑스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베강은 영국이 반격작전을 무산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300,000명이 해안에 모여 사실상 불가능한 철수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 지휘관은 영국해협을 천혜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의 대양해군에게는 바다는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처칠이 말했듯이, 소개작전덕분에 승전한 것은 아니어도 국민의 사기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월 초에 솜므 부근의 프랑스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프랑스의 최후가 눈 앞에 보였다. 처칠은 프랑스에게 북 아프리카의 식민지와 다른 곳에서 계속 전쟁을 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페탱을 포함한 지도부는 프랑스를 떠난 항전은 아무러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도 곧 프랑스의 운명을 따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동안 처칠은 프랑스를 전선에 붙잡아두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심지어 레노 수상에게 두 나라의 합병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강과 페탱의 패배주의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처칠의 어떤 설득에도 프랑스 지도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베강은 "영국은 곧 닭처럼 목매달릴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가 항복하기 1주일 전에 처칠은 그들에게 게릴라전이라도 하라고 설득했지만 베강은 듣지 않았다. 처칠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베강은 독일제국이 영국을 공격할 때에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처칠은 몹시 화를 내며 "영국으로 건너오는 동안에 최대한 수장시키고 해안에 기어올라는 놈들은 머리통을 갈겨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페탱 정부는 6월 22일에 독일과 휴전서명을 하며 사실상 종전이 되었고 서유럽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프랑스가 숨을 죽이자 전체주의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위협이 머리를 들었다. 프랑스의 소식이 암울해질 수록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후 성과분배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지도부는 연합군에게 이탈리아가 참전하지 않도록 손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처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 참전이 오히려 독일의 전력을 축내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39년 8월 말에 무솔리니 정권을 전쟁에 끌어들일 기회가 있었다. 이집트와 튀니지아의 연합군 지상군은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에 압도적이었고 이탈리아 해군은 숨어 다니기에 급급했다. 그런데도 연합군 지도부는 너무나도 무기력해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챔벌레인은 선제공격을 검토했었지만 프랑스와 영국 내각은 심지어 독일의 전격전이 폴란드를 집어삼킬 때조차도 선제공격에 반대했다.
6월 10일, 무솔리니가 로마의 발코니에 서서 환호성을 지르는 대중에게 독일편을 들어 참전한다고 선언했다. 루즈벨트는 같은 날 오후에 있었던 버지니아 대학에서의 연설에서 "그 손에 쥐어진 단검은 인접국가의 뒤를 찔렀다"라고 평가했다.
프랑스가 항복하기 일주일 전에 무솔리니는 어설프게 프랑스 남부를 침공했고 수 만 명의 사상자만 냈다. 그것뿐만 아니라 소수의 영국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는데 그들의 패전은 늘 있는 일이었다.
유럽대륙의 상황이 악화되자 할리팍스는 처칠에게 독일과 협상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5월 27일, 내각회의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처칠은 프랑스가 영국을 계속해서 독일과의 협상장에 끌어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할리팍스는 영국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그는 독일의 제안이 영국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다면 평화를 이룰 수도 있다고 한 처칠의 고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의 주권을 보장할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영국의 독립을 보장할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6월 말에 외무부가 런던의 스웨덴 대사에게 만약 독일이 합리적인 제안을 할 의사가 있다면 영국정부는 협상에 나설 의사가 있다는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할리팍스에게는 불운하게도 이 비밀은 지켜지지 않았고 처칠은 할리팍스가 내각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대화 중에 그런 내용을 알게 되었고 끔찍한 오해라고 답변했다.
1938년 9월, 챔벌레인 수상은 히틀러와 회동을 했고 독일군 사열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히틀러에 대해 오판을 하고 있었고 러시아에 대해 더 큰 우려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칠은 이렇게 정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의 뛰어난 말솜씨는 영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 처칠을 반대했던 토리(보수)당원들까지도 수상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처칠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영국이 과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처칠은 미국과 소련도 독일이 유럽대륙을 장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오랜동안의 볼쉐비키 정권에 대한 반감을 누르고 소련에 접근했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멀리 있지만 나치의 위협은 바로 해협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대사 스타포드 크립스 경과 막스주의자를 모스크바로 보내 나치에 대한 공동전선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소련은 분명한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6월 18일, 프랑스가 항복한 다음 날, 소련 외무상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독일 국방군의 찬란란 성공에 소련 정부의 극찬을 보낸다"라는 메시지를 독일 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1년 4일 후인 1941년 6월 22일 오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독일 대사에게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것이요?"라며 한탄했다. 실제로 소련은 막대한 원자재를 독일에 수출하는 등, 독일 정부에 최대한 협조했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기 불과 2시간 전에 마지막 수송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을 정도였다.
처칠은 두 나라의 달콤한 밀월관계를 막지는 못했지만 얼마 안가서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고 제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원은 훨씬 더 큰 압박이 필요했다. 영국은 외환금고가 바닥나서 공군과 해군을 증강시키는 것은 커녕 내부 경제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판이었다. 미국만이 영국이 전선에 그대로 남게 할 비용과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처칠은 수상이 되는 순간부터 루즈벨트 행정부와 미묘한 줄타기를 해왔다. 미 대통령도 전례가 없었던 3선 출마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이 유럽의 문제는 유럽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찰스 린드버그와 같은 고립주의 지도부는 연합군을 지원하려는 정부의 어떤 움직임도 비난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미국의 참전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영국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루즈벨트와 군관계자는 추축군이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인수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대서양 함대에 큰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이미 태평양의 일본 해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미국은 1938년부터 함선건조 속도를 올렸지만 1942년은 되어야 그 결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루지벨트는 처칠에게 만약 영국이 무너진다면 영국 해군을 캐나다로 보내서 미 해군과 협력하라고 제안을 했다.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자신이 수상으로 있는 동안에는 제3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겠다는 분명한 뜻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이 없다면 영국은 그 전쟁을 계속 할 수 없다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그리고 캐나다 수상에게 일부러 "우리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캐나다만이 미국의 동맹으로 남는, 전세계가 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루즈벨트를 압박하게 만들었다.
처칠은 미국인을 설득하기 위해 무자비하면서도 현명한 행동을 취했다. 1940년 7월 초에, 영국해군은 프랑스 함대를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했다. 알렉산드리아와 영국항구에서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프랑스 함대가 독일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함대는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제리의 메르스-엘-케비르 해군기지에서의 협상이 결론을 내지 못하자, 지브랄타에서 온 영국해군은 15인치 포탄을 퍼부어 프랑스 전함 브르타뉴(사진참조)를 침몰시키고 다른 전함 두 척과 구축함을 파손시켰고 그 과정에서 1,300명의 프랑스 해군이 죽었다.
영국해군이 과도한 대응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의 위기상황을 보면 다른 대안이 없었다.
영국 제독의 말처럼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같은 사소한 문제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처칠은 7월 4일에 있었던 하원 연설에서 해군의 작전을 옹호했고 파시스트와 나치에게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대처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처칠의 결단은 영국정가와 국민을 단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에게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홀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의지를 알게 되었다.
미군 장교들이 영국 장교와 협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영국을 지원할 첫 번째 조치를 준비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영국은 독일의 무자비한 공습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처칠은 취임 8주 만에 나라를 단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이 나치에 공동전선을 펼치게 만들었다.
처칠이 20세기의 지도자 중 가장 위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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