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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의 프랑스 전격전? 프랑스의 삽질!

by uesgi2003 2013. 8. 13.


다른 사이트에 정리했던 글인데 처칠 이야기의 배경으로 옮겨와 봅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큰 줄거리만 정리한 것이고 사관은 시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옳은 것은 없습니다. 특히 이번 이야기처럼 예상을 전제로 한 역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밤에도 덥군요.
다음 주에도 폭염이 내리 계속된다고 하던데, 서울보다 지방의 나이드신 분들과 저소득층이 염려됩니다.

블로그에 처칠 이야기를 정리하다가 중간에 프랑스와의 연합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DP에 간단한 배경을 설명할까 합니다.

당시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전격전으로 마치 전쟁기계와 같은 신화를 남겼고 전사에 대해 깊게 파고들지 않은 분들은 많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폴란드는 독일뿐 아니라 소련에 협공을 당해 무너질 수 밖에 없었지만, 독일군보다 훨씬 강력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도 마치 창기병이 최정예부대였던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 폴란드의 전차부대 사진입니다. 숫자는 침공당시의 독일군보다 적었지만 훨씬 강력한 전차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강대국이던 프랑스가 독일에게 단 45일 만에 무너지자, 독일군의 전격전 신화는 상당한 거품이 끼게 됩니다.

물론 독일의 전격전은 시대를 앞선 전략전술인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프랑스의 삽질이 컸습니다.

프랑스 침공 전 독일은 1번과 3번 주공격로를 검토하다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3번 안을 채택했습니다.



3번 공격로의 유명한 아르덴느 숲 통과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2차대전판 퍼시픽 림 예거'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죠?

이것이 사실입니다. 프랑스 침공당시의 독일군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전차가 주력이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는 독일군 전차로는 맞대결할 수 없는 강력한 무장의 전차(좀 노후했어도)가 주력이었습니다.





이런 전차를 만나면? 독일군도 후반기의 미군처럼 '루프트바페 플리즈(공군!)'을 외치거나 대공포인 88mm 포병을 급하게 불러들였습니다.

88mm 대공포의 신화가 시작되면서 대전차포로 그리고 전차의 주무장으로 널리 애용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도도한 전차병들도 88mm 대공포 부대를 지날 때에는 굽신 굽신 모드였다고 합니다. 타이거 전차가 등장할 때까지는요.

그럼 왜 이렇게 강력한 프랑스군이 순식간에 돌파당할 것일까요? 독일의 전차도 예상과 달리 허약했는데요...



바로 프랑스 참모총장 모리스 개믈랭의 삽질덕분이었습니다. 위의 지도에 있는 2번이 그의 반격로였던 것입니다. 그는 독일의 주공은 벨기에부터 시작된다고 예상했고 벨기에군이 버티는 동안 주력을 그곳에 투입해 막을 생각이었습니다. 많은 반대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만약 예비군 그리고 전차전력이 원래대로 랭스(Reims)에 있었다면 독일의 3개 전차군단을 맞아 분쇄는 못하더라도 충분히 버텨서 영국공군의 지원과 함께 장기전을 가져갈 수도 있었죠.

조금만 시간을 끌었다면, 독일이 단 6개 사단만 배치시켰던 폴란드 국경에서 소련군이 독일을 협공했을 것입니다. 스탈린도 적당한 순간을 간보기 했다는 주장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력을 북부로 올려보냈고, 독일전차 군단은 텅빈 곳을 달려서 개전 5일 만에 뫼즈 강변까지 도착해 북쪽에서 놀고 있는 프랑스군의 배후를 끊어 놓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임수상이 된 처칠이 파리로 날아와서 레노 수상을 만나자 마자 영어로 한 번, 프랑스로 한 번 묻습니다. "예비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개믈랭은 "Aucune! 없습니다"라는 황당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개믈랭을 경질하고 전쟁영웅 페탱 원수를 불려들였지만 오히려 독일과의 휴전을 추진합니다.

결국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덩케르크에 고립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몰리는 것은 매우 유명한 사건입니다.

바로 여기에



요렇게 전멸아니면 항복만 있는 상태로 남게 됩니다. 아무리 허약한 독일 경전차라도
저승사자와 같은 상황이었죠.


  

그런데 크리스마스도 아닌 초여름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독일육군에게 3일간의 진격금지 명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려 33만 명의 영-프 병사들은 몸만 건져서 달아납니다.








이들은 재무장을 한 후에 아프리카 전선에 다시 투입되었습니다.

오죽하면 덩케르크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이 삽질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히틀러에게 묻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1. 영국과의 협상설 - 실제로 영국 내에서는 독일과 휴전을 맺어야 한다는 기조가 강했습니다. 특히 처칠과 경쟁자였던 할리팍스가 그 여론을 이끌었습니다. 히틀러는 33만 명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하려고 했는데 영국이 필사적으로 빼내갔다는 주장입니다.

2. 육군의 피해 - 아무리 일방적인 전쟁이었다고 해도 독일군의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3. 히틀러 독박설 - 전쟁 초기에는 히틀러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고 집단군 사령관끼리 합의를 보고 히틀러에게 조언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어쨌든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의 삽질로 프랑스를 45일만에 함락시킨 독일은 반대로 히틀러의 삽질 덕분에 영국 육군을 고스란히 살려보내게 됩니다.